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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치개혁, 마음껏 꿈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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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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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탈당한 ‘독수리 5형제’ 어떻게 지내나… 시련은 있어도 의욕은 더 넘쳐 흘러

‘독수리 5형제’는 각자의 특기와 능력을 발휘해 우주의 침략자들로부터 지구를 지켜내는 만화영화의 주인공들이다. 지난 7월7일 한나라당을 탈당해 ‘지역정치 타파 국민통합 연대’를 만든 이우재·이부영·김부겸·안영근·김영춘 의원도 ‘독수리 5형제’로 불린다. 그들도 네티즌들이 붙여준 이 ‘애칭’이 꽤 흡족한 모양이다. 공식적인 기자회견 자리에서도 스스럼없이 자신들을 ‘독수리 5형제’로 표현한다.

사진/ 8월22일 아침 통합연대 소속 의원과 당직자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우재·이부영 의원, 이희원 운영위원, 김영춘·김부겸 의원.(이용호 기자)
이들의 근황이 궁금해 8월22일 아침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 뒷쪽 건물에 있는 통합연대 사무실을 찾았다. 의원들이 돈을 갹출해 얻은 30평 남짓한 사무실이다. 9시30분이 되자 ‘5형제’ 가운데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 중인 안영근 의원을 제외한 ‘4형제’가 모였다. 매일 아침 열리는 회의가 시작됐다. 이들은 이 회의를 ‘의원총회’라 부른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통합연대 소속 의원 5명 전원이 참석하기 때문이란다. 이들의 ‘지상과제’인 신당 추진과 관련한 얘기들이 의원총회의 주요 화두다. 1시간 남짓, 신당의 밑그림이며 민주당 신주류와 신당연대의 움직임에 대한 논의가 오간다.

회의를 끝마치고 나오는 이우재 의원에게 물었다. “만화영화 속의 독수리 5형제는 지구를 지켰는데, 통합연대의 독수리 5형제는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습니까.” 모임의 맏형격인 이 의원은 대번에 ‘정치개혁’이라고 응수했다.

“우리는 119 구조대원”


사진/ 7월15일 통합연대 현판식을 연 뒤 박수치고 있는 의원들. 이들은 돈을 갹출해 30평 남짓한 사무실을 얻었다.(연합)
그동안 이들은 외로워보였다. 탈당 이전엔 언론의 각별한 주목을 받았으나 막상 탈당을 결행한 이후엔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그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또렷하게 각인시키지도 못했다. 신당 창당의 기치를 내걸고 의욕적으로 출발했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나오지 않은 채 신당의 전망은 짙은 안갯속이다. 신당의 밑그림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니 무엇을 어떻게 하자고 지지자들을 설득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는 게 초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들은 놀라우리만치 자신만만했다. 신당의 성공과 다음해의 총선 승리에 대한 확신에 넘쳤다. 김영춘 의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의욕과 기대가 차오른다”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부영 의원은 자신들을 ‘119 구조대원’에 비유하는 여유를 보였다. “밖에선 우리들이 서 있는 곳이 눈비바람 몰아치는 허허벌판인 줄 아는데, 아니다. 오히려 민주당은 대들보가 무너지고 서까래가 내려앉은 위태로운 상태다. 민주당 의원들은 집 바깥이 추운 줄만 알고 집안 대들보 무너지는 것은 모른 채 나오려 하질 않는다. 우리가 구조를 준비 중이니 걱정말고 나오길 바란다.”

시간이 지날수록 반응 좋아져

물론 어려운 처지를 돌파하려는 과장된 자신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5명의 의원과 차례로 만나 차근차근 얘기를 들어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던’ 민주화운동 시절로 되돌아간 듯 보였다. 이들 5명은 모두 민주화운동을 하다 몇 차례씩 투옥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김영춘 의원의 경우 1984년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정당사 점거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구속된 전력이 있다. 그래서 옛 동지들로부터 때론 ‘배신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젠 그런 비난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김 의원은 탈당 이후의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문제 많은 집안을 뛰쳐나온 가출소년의 해방감 같은 홀가분함”이라고 대꾸했다. 이우재 의원도 “지역에서 ‘이제 이 의원님이 제자리로 돌아오셨습니다’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고 털어놨다. 떳떳하고 명분 있는 선택을 했다는 신념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초조함을 희석시키고 자신감을 솟게 하는 것이다.

사진/ 8월21일 국회 기자실에서 이부영·이우재·김영춘 의원(왼쪽부터)이 신당추진 연석회의를 제안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이용호 기자)
이들에겐 지금의 초라한 처지가 오히려 힘이 되는 부분도 있다. 신당의 반석이 다져진 이후 탈당해 탄탄대로를 걸었더라면 ‘철새’라는 낙인이 찍힐 수도 있었지만, ‘고행의 길’을 걷는 이들에겐 ‘독수리 5형제’라는 애정 어린 별명이 붙었다. 옹색한 처지가 약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그동안 배드민턴 코트 등을 찾아다니며 지역구민을 접촉하던 일상적인 지역구 활동을 모두 접고 칩거하다시피 해왔다. 무엇보다 이들이 탈당의 명분으로 내세운 신당 추진이 지지부진한 탓에 지역구민들을 설득할 재료가 없었던 탓이다. 간혹 접하게 되는 골수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딴죽걸기도 부담스러웠다. “젊은 사람이 그러면 못 쓰지. 한나라당 때문에 금배지 단 것 몰라”라는 반응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해해주고 안쓰러워하는 반응이 늘어난다는 게 이들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8월21일 서해 연포해수욕장에서 지구당 사람들과 여름캠프를 겸한 의정보고대회를 개최한 김부겸 의원은 상당히 고무된 표정이다. 관광버스 4대를 예약했는데 희망자가 몰려들어 8대로 늘려야 했기 때문이다. 한나라 당원을 제외한 지역구 1만여명에게 행사안내 편지를 보냈을 뿐인데 그랬다. 조직동원은 할래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참석자 대부분이 그동안 지역구 행사에서 만나지 못하던 낯선 얼굴들이었다. “새 물고기들을 만난 셈이지. 나도 모르게 말이 터져나오더라고.”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어디 말할 데가 없어 가슴에 담아뒀던 얘기들을 실컷 쏟아낼 수 있었다. 김 의원은 “정당행사를 처음 접해본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1시간20분이나 얘기를 했는데도 분위기가 굉장히 진지했다”고 전했다.

이부영 의원도 요즘 지역구 동별로 의정보고대회를 진행 중이다. 적게는 200명에서 많게는 400명까지 나온다. 전화자동응답(ARS)을 이용해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행사의 시간과 장소를 알리면 자발적으로 모이는 숫자다. 다른 해보다 훨씬 늘어났다. 무엇보다 정당행사라면 고개를 돌리던 고학력 주부층의 참여가 부쩍 늘어난 것이 반가운 일이다. 이 의원은 “국민들은 현재의 정당 구조가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 이번에 단숨에 지역당 구도의 아성을 깨진 못하겠지만 상당한 성과를 얻을 것이다”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지역정당 구조 깨는 일만 남았다

이우재 의원은 한나라당에서 함께 일했던 지구당의 핵심 당직자들과 접촉하며 공세적인 담판을 짓고 있다. 삼계탕 재료를 사들고 당직자들의 집을 찾아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내가 잘못한 게 뭐냐. 내가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다그치며 공격적인 설득 작업을 벌인다. 대부분 논리적으로는 수긍한다. 자신의 생각을 밝힌 4쪽짜리 의정보고서 10만부도 인쇄해놨다. 이 의원은 30% 정도는 마음을 돌릴 것으로 추정했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국민들 가슴 속에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다 있다. 지역정당 구조에서 키워진 대결의식을 아직 씻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이것을 깨는 일만 남았다.”

지구당 사무실을 한나라당원들에게 내주고 작은 후원회 사무실로 옮긴 김영춘 의원도 그룹별 간담회와 동별 의정보고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지역구 활동에 돌입했다. 지금으로선 후원회를 이탈하는 사람과 새로 가입하는 사람의 숫자가 어금지금하다. 9년 동안 형제 같은 정을 나눈 지구당 당직자들이 원망할 땐 가슴이 아팠지만, 경북 출신의 70대 동 노인회장이 찾아와 격려할 땐 눈물나게 고마웠다.

안영근 의원은 탈당 직후 지구당 당원명부를 넘겨주기에 앞서 꼼꼼히 살펴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3600여명의 당원 가운데 호남 출신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는 “이 땅의 정당이 이 정도구나라고 생각하니 새삼 신당을 만들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안 의원은 꼬박꼬박 당비를 납부하는 진성당원체제로 지구당을 탈바꿈시킬 결심으로 열렬한 지지자 100여명을 확보했다. 지역구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병원장이 “동책이든 뭐든 맡겠다”고 자원하고 나서기도 했다.

신당 추진 등 앞으로도 가시밭길

이들은 탈당 직후부터 한덩어리로 움직였다. 7개 지역을 순회하며 지역별 간담회를 했고, 일요일 밤 텅 빈 국회 의원회관 세미나실에서 밤늦도록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도 나란히 좌석을 배치받아 수시로 얘기를 나눈다. 신기남·천정배·이호웅·정장선·송영길·임종석 등 민주당 신주류 의원들과도 분주히 만났다. 민주당 의원들과 한 횟집에서 대취하도록 술잔을 나누며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사정이 복잡한 민주당 신당파들은 통합연대가 정기 국회에 대비해 원내 교섭단체 구성 시한으로 제시한 8월20일을 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로선 기다릴 만큼 기다렸으니 이제 독자적으로라도 움직이겠다고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통합연대가 8월21일 신당 추진 연석회의를 제안한 것은 이런 사정에서였다.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해 신당 추진의 교두보가 되겠다던 이들은 당분간 꿈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 밖에도 이들 앞에는 험한 가시밭길이 놓여 있다. 내부적으로 민주당과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설정 문제에 대한 미묘한 이견을 해소해야 한다. “뜻은 갸륵하고 취지엔 동감하지만, 냉엄한 현실정치판에선 뜻이 꺾일 무모한 오기가 아니냐”는 유권자들의 회의적인 평가를 불식시키는 것도 당면 과제다. 다만, 이들의 ‘대박’ 가능성을 기대하며 각 지역에서 부지런히 찾아오는 신진 정치인들이 이들에게 큰 위안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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