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창의 그림자, 고민되네…

469
등록 : 2003-07-24 00:00 수정 :

크게 작게

이회창 전 총재 복귀설에 입지 흔들릴까 긴장하는 최병렬 대표,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됐나

최병렬 대표 체제의 한나라당에서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전선은 보이지 않고 총성도 들리지 않지만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물밑 신경전이 치열하다. 고지는 내년 총선을 앞둔 당내 주도권이다.

싸움의 복판에 서 있는 사람은 최병렬 대표와 이회창 전 총재다. 물론 이 전 총재는 정치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최 대표도 그를 깍듯이 예우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 주변에선 상대쪽에 대한 차디찬 냉기류가 감지된다.

“그만뒀다가 돌아오는 처신 안 할 것”


사진/ 이회창 전 총재쪽의 협력이 필수적이지만, 이 전 총재의 당내 영향력이 커질수록 자신의 입지는 좁아지는 모순적인 상황이 최병렬 대표의 딜레마다.(한겨레 윤운식 기자)
두 사람의 관계는 미묘하며 애매하다. 이는 한나라당에서 차지하고 있는 이 전 총재의 절대적인 영향력에서 기인한다. 22만명이 넘는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된 최 대표의 당내 기반은 이 전 총재의 그것에 견주면 허약하기만 하다. 아직도 한나라당 내 최대 계파는 ‘창계보’이기 때문이다. 이 전 총재의 당내 영향력이 확산될수록 최 대표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진다. 당내 권력과 파워의 측면에서 보자면 두 사람은 이미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 대표는 솔솔 불거져나오는 이 전 총재 복귀론이 신경에 거슬릴 수밖에 없다. 문제를 더욱 꼬이게 한 것은 최 대표 자신이 경선 과정에서 ‘삼고초려론’으로 이 전 총재의 복귀론에 불을 질렀다는 점이다.

이 전 총재 복귀를 둘러싼 양쪽의 신경전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7월15일 밤 11시께 이 전 총재의 장모 김분남씨의 빈소가 마련된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최 대표는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공세를 받았다. 그가 대표 경선 때 “삼고초려라도 해서 이 전 총재를 모셔오겠다”고 말했기 때문인지 질문이 이 부분에 집중됐다. 최 대표는 예의 거침없는 어투로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이회창 전 총재의 정계복귀 운운했다고 언론에서 쓰고 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이 전 총재가 옆에 있어주면 총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 외에 다른 뜻은 없다. 그런데 내가 한 말을 두고, ‘내년 총선에서 이회창 전 총재에게 전국구 1번을 준다’거나 ‘고문직 같은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는 등 생각하지도 않은 얘기를 기사로 쓰니까 할 말이 없어진다. 이 전 총재는 DJ처럼 (정치를) 그만두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그런 처신을 할 분이 아니다.”

점잖은 표현이었지만 말인즉 ‘이 전 총재가 정계에 복귀해선 절대로 안 된다’는 얘기였다. 최 대표쪽에선 이 전 총재와 가까운 당내 인사들이 정계복귀론을 의도적으로 흘리는 것으로 의심해왔다. 앞서 이 전 총재의 비서실장을 했던 신경식 의원은 7월12일 “이 전 총재를 전국구 1번으로 모셔와 총선 지원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최 대표쪽에선 대표 취임 1개월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꾸 이런 얘기들이 나오는 상황에 쐐기를 박아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최 대표의 발언이 전해지자 이 전 대표의 측근들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한 측근은 “이 전 총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최 대표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했다. 최 대표는 자신의 길을 가면 된다. 가만히 있는 이 전 총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측근도 “최 대표가 조급한 것 같다. 속내가 그렇더라도 그 얘기를 꼭 그런 식으로 꺼낼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최 대표의 오락가락 행보, 원인은?

사진/ 7월4일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홍사덕 원내총무와 이강두 정책위의장(왼쪽부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최병렬 대표.(한겨레 윤운식 기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최 대표는 “이 전 총재의 정계복귀 여부는 이 전 총재 본인이 결정할 문제”라고 급히 진화에 나섰다. 임태희 비서실장도 “진의가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최 대표의 한 측근은 “국민이 원하면 이 전 총재에게 전국구 1번을 줄 수도 있는 게 아니냐. 최 대표의 말은 아직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이지 반드시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단 최 대표쪽이 이 전 총재쪽과 갈등의 골을 확대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내년 총선 때까지 끊임없는 논란을 부를 전망이다. 이 전 총재 본인의 의사와는 별개로 ‘창심’을 활용하려는 당내 인사들이 이 문제를 끊임없이 꺼낼 것이고, 이런 상황을 방치할 수 없는 최 대표로선 나름의 방어망을 동원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 대표가 직면한 당 안팎의 여러 문제들도 큰 틀에선 ‘이회창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최 대표는 취임 직후 “새로운 야당 대표상을 보여주겠다”고 의욕을 보이며 대여 유화적 제스처를 취했다. 최 대표가 제2차 대북송금 특검법에 대해 취임 직후 ‘150억원의 진상을 밝히는 것’으로 한정한 것도 이 연장선이었다. 그러나 최 대표는 이후 180도로 방향을 돌려 ‘핵개발 자금 전용 의혹’까지 포괄하는 강경한 내용의 새로운 특검법안 제출을 주도했다. ‘대통령 불인정’ 발언 등 노무현 대통령을 압박하는 수위 높은 발언을 이어갔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호되게 몰아붙였다가 방문을 거절당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이런 오락가락 행보는 ‘리더십 부족’이라는 당내 비판론에 직면했고, 합리적 보수주의자라는 이미지에도 금이 갔다.

최 대표쪽은 이런 ‘변심’을 당내 여러 세력의 조직적 반발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보수파는 물론이요, 당내 여러 세력이 조직적으로 최 대표의 운신에 제약을 걸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홍사덕 원내총무가 특검의 대상을 ‘150억원’으로 한정하는 내용의 2차 특검법안을 전격적으로 통과시키자 이해구 의원 등 보수파 의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당 운영위원회에서도 서청원 의원과 가까운 위원들이 ‘제왕적 대표’ ‘지도력 부족’ 등 원색적 단어를 동원해 최 대표를 일제히 공격했다.

최 대표쪽 “공존하는 지혜가 필요”

사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7월15일 밤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된 장모 김분남씨 빈소에서 조문차 찾아온 최병렬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국회사진기자단)
문제는 ‘흔들리고 있는 최병렬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유일한 인물이 이회창 전 총재라는 점이다. 최 대표의 핵심측근도 “이 전 총재를 도왔던 당내 중진들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느냐가 최 대표 체제가 연착륙할 수 있는 관건이다”라고 말한다. 대표로서 안정감 있게 당을 끌어가기 위해서는 이 전 총재쪽의 협력이 필수적이지만, 이 전 총재의 당내 영향력이 커질수록 자신의 입지는 좁아지는 모순적인 상황이 최 대표의 딜레마다.

최 대표쪽에선 “한나라당이라는 체제와 이회창이라는 국민적인 지도자가 공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라고 해법을 제시한다. 즉, 이 전 총재가 최 대표에게 힘을 실어줘 한나라당을 안정시키면서 정계복귀가 아닌 형태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접합점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최 대표의 한 측근은 “최 대표는 전략에 능한 사람”이라며 “최 대표 체제가 취임 초반에 흔들린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 대표의 발언들이 나름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얘기다. 이 전 총재쪽에서도 최 대표 체제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상황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내년 총선 패배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년 총선 때까지는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형식으로 정립되느냐가 한나라당의 항로를 제시하는 나침반 구실을 할 것 같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