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 세력 재규합에 나선 한나라 탈당파 6인…민주당 분화의 촉매제 역할 하게 될 듯
6월25일 저녁 서울 여의도의 한 허름한 중국음식점.
김영춘 한나라당 의원의 친구와 후배 30여명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1984년 김 의원이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지내던 시절의 옛 동지들이다. 탈당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김 의원의 속내를 들어보고 한마디씩 거들자고 마련한 자리다.
“늦어도 9월 전 신당 추진”
김 의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한나라당의 개혁을 위해 소금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으나, ‘도로 민정당’이 돼가는 것을 보고 벽을 느끼고 있다. 그동안 무조건 제 편을 들어주던 친구들도 대선 이후에는 다른 길을 얘기하기 시작해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제가 총학생회장이 된 것은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당시 학생운동의 조직적 결정이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의 얘기를 듣고 싶다.”
옛 친구들은 대부분 초심을 강조하며 결심을 권유했다.
김 의원과 함께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한 이후 여전히 한 길을 걷고 있는 한 친구는 “같이 자취를 하던 영춘이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뒤 20년 만에 다시 만났다. 나는 오늘 잃어버린 옛 친구를 다시 찾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다. 방송사에 근무하는 한 친구는 “내가 어려울 때 영춘이가 ‘라면값은 대줄 테니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고 말해 집에서 큰소리칠 수 있었다. 영춘아, 이번에는 내가 네 라면값을 대줄게!”라고 소리쳤다.
물론 김 의원의 정치적 장래를 걱정하는 친구도 있었다. “정치는 냉혹한 현실이다. 국회의원 하나를 길러내는 데 얼마나 어려움이 따르는지 아는가. 자칫 고급 철새라는 소리를 듣고 정치 건달이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김 의원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 “정치인이 초심을 잃고 변하는 것은 ‘재선만 되면, 3선만 되면, 대통령만 되면’ 하고 자신의 입지를 키우는 데만 주력하기 때문이다. 제 처는 ‘개라도 키워 팔면 먹고야 살지 않겠느냐’고 말한다”고 웃어 내심의 한 자락을 내비쳤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없었지만, 중국음식점은 20년 전의 학교 광장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한나라당 개혁파 의원들의 집단탈당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최병렬 새 대표가 적극적으로 탈당을 만류하고 있지만, 이부영·이우재·김부겸·김영춘·안영근·김홍신 의원 6명은 이미 루비콘강을 건넌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함께 논의해오던 의원 7명 가운데 서상섭 의원만이 지역구(인천 중·동·옹진) 사정과 다음 총선 경쟁구도 때문에 잔류쪽으로 기우는 분위기다. 결행 시기도 7월 초로 잡혀 있다.
이부영 의원은 6월27일 일본 오사카에서 “적어도 9월 전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목표로 신당을 추진할 생각”임을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
관심은 탈당 여부보다는 오히려 이들로부터 시작되는 정계개편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나 될지로 모아지고 있다. 민주당에 충격을 던지고 범개혁세력의 단결을 이끌어내 한국 정치사의 일대 회오리가 될지, 아니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버리면서 정치 미아로 고립될지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영남 지역에 역량 집중할 계획
일단 이들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해묵은 지역구도를 깨뜨리고 이념과 정책으로 재편되는 새로운 정치질서 형성의 뇌관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단지 의원 몇몇의 이합집산을 넘어서 우리 사회 전체 세력의 재편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이 때문에 이부영 의원의 경우 70~80년대 재야운동 세력의 재규합에 나서는 한편, 박형규 목사와 함세웅 신부부터 시작해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남덕우 전 국무총리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원로들을 만나 지지와 협조를 부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연극이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받기 위해서는 단지 배우격인 의원들의 연기가 뛰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웅장한 무대 배경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게 한 탈당파 관계자의 비유다.
이에 따라 탈당파 의원들은 다양한 세력들의 힘을 모아내는 ‘접착제’로서의 구실에 당분간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느슨한 형태의 ‘정치개혁 연대 위원회’ 등이 탈당 뒤 활동틀로 적극 검토되고 있다.
자연히 범개혁신당추진운동본부(범추본)나 개혁국민정당 등 기존 조직·정당과의 직접적 결합은 늦춰질 전망이다. 이들 조직·정당의 경우 주요 구성원이 386세대로 아직 대중적 역량이 검증되지 않았고, 섣부른 결합이 자칫 ‘노무현 신당’으로 비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한나라당 탈당파 의원들의 우려다. 하지만 범추본쪽은 “지역구도 타파, 정치개혁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함께 범국민 운동을 벌인다는 자체가 중요하다”며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여서 결정적 순간이 오면 화학적 결합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또 탈당파 의원들은 지역주의 탈피는 호남뿐 아니라 영남에서도 이뤄지지 않으면 정계개편의 의미가 없다고 보고 영남지역에 역량을 집중 투입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내년 총선에서 경북고 출신인 김부겸 의원(경기 군포)은 대구에, 부산 동고 출신인 김영춘 의원(서울 광진갑)은 부산에 출마하는 방안이 진지하게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탈당파 관계자는 “부산이나 대구의 경우 한 선거구나 마찬가지여서 몇몇 거점에 역량 있는 인사들이 투입되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으며, 설사 당선되지 않더라도 정치질서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게 이들 의원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민주당 신주류의 탈당으로 이어질까
탈당파 의원들은 자신들의 결행이 곧바로 민주당 신주류 의원들의 탈당으로 이어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안영근 의원 등은 같은 인천 지역의 이호웅·송영길 의원을 비롯해 정범구·임종석 의원 등 평소 친분 있는 초선 의원들과 수시로 접촉하며 탈당을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런 동반 탈당 권유가 민주당의 복잡한 사정 때문에 당장 효과를 거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민주당 신주류로서는 구주류와의 타협 대신 선명한 원칙을 견지하는 쪽으로 도덕적 압력을 느끼게 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최근 신당을 둘러싸고 노골적인 이해관계가 드러나면서 민주당도 본격적으로 분화의 기류에 휩싸이게 됐다. 다양한 수사들이 동원됐던 민주당 신·구주류 사이의 쟁점들이 막바지 논의과정에 들어가면서 결국 구주류의 ‘공천권 보장’ 요구로 압축되고 있는 것이다.
내년 17대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서 신주류는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참여형 경선을 주장하는 데 반해, 구주류는 물밑협상 과정에서 대의원이나 당원만 참여하는 제한적 경선을 각각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 협상에 나선 의원들의 전언이다. 심지어 일부 구주류 의원들은 상무위원회를 통한 공천을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무위원회는 지구당 위원장이 일방적으로 지명하는 위원과 지방의회 의원으로 구성되는, 90명 이하의 소규모 조직으로 사실상 지구당 위원장의 친위부대다. 이에 따라 신주류 한 의원은 “재벌 회장이 자기 사람들로 이사진을 구성하고, 이사진이 다시 재벌회장을 뽑는 식이다. 그럴 경우 자신뿐만 아니라 대대손손 의원을 해먹자는 얘기다”라고 극도의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또 구주류의 한 중진의원은 협상 과정에서 “우리 지역구에는 노사모 회원이 4명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국민참여형 경선이 시작되면 몇몇 타격대상 지역구를 정해 전국의 노사모 회원들이 떼로 몰려들어 경선에 참여할 텐데 그 인해전술을 막아낼 수 없다”며 국민참여 경선 수용불가 태도를 분명하게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신주류로서는 국민참여형 경선에 대해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라는 선을 긋고 있어 사실상 접점이 없는 상태다. 이에 따라 민주당 신·구주류간 대결은 신주류의 탈당이나, 당무회의 또는 전당대회를 통한 일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한나라당 의원들의 탈당은 결과적으로 민주당 분화의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김 의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한나라당의 개혁을 위해 소금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으나, ‘도로 민정당’이 돼가는 것을 보고 벽을 느끼고 있다. 그동안 무조건 제 편을 들어주던 친구들도 대선 이후에는 다른 길을 얘기하기 시작해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제가 총학생회장이 된 것은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당시 학생운동의 조직적 결정이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의 얘기를 듣고 싶다.”

사진/ ‘국민속으로’ 기자회견. 탈당파에 대한 관심은 이들의 탈당 여부보다는 오히려 이들로부터 시작되는 정계개편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나 될지로 모아지고 있다.(이용호 기자)

사진/ 한나라당 탈당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는 6명의 탈당파 의원.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부영·이우재·김부겸·김홍신·안영근·김영춘 의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