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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회창,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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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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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돌아올 것인가, 한국에선 무엇을 할 것인가, 다음 대선에 출마할 것인가

눈물을 흘리며 정계를 떠난 그는 과연 돌아올 것인가. 돌아온다면 언제 돌아올 것인가, 돌아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다음 대선에 출마할 것인가. 이회창 복귀를 둘러싼 스무고개를 넘어본다.

“어떻습니까. 저, 이제 다시 돌아갈까요?”

잘 빗어넘긴 머리에 뾰족한 턱의 그가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돌아갈 때까지 건강을 챙겨야겠다”며 예의 그 허리 굽히기까지 시연했다. 지난 주말,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 등장한 개그맨조차 어떤 ‘조짐’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마 그는 은근히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복귀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배칠수와 김학도에 비해 박명수의 자리는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있다. 그는 ‘잊혀져가는 정치인’ 흉내로 6개월을 먹고살았다.

사진/ 지난 3월16일 인천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출국하는 이회창 전 총재 부부. 부인 한인옥씨는 이미 귀국했다.(연합)
‘모사’(模寫)의 매력은 ‘원형’(原型)이 가진 아우라(aura) 때문에 가능하다. 정치인에 대한 풍자는 그 권위와 권력이 실재해야, 비로소 우스꽝스럽다. 풍자의 대상이 실존하지 않으니, 비꼬고 틀어야 할 ‘우스갯거리’도 당장 마땅찮다.

박명수는 지금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다. 가수 이승철이 퇴물 취급을 받으면서 덩달아 침체에 빠졌던 그는, 야심차게 준비한 새로운 캐릭터의 조기 퇴장으로 또다시 위기에 처했다. ‘멀티 플레이’가 가능한 배칠수나 김학도와 달리 ‘한우물만 파는’ 아날로그 개그맨 박명수는 이대로 주저앉고 말 것인가.


이 글은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짧은 보고서다. 한국 코미디의 대표 코드가 돼버린 ‘흉내내기’의 원조세대, 개그맨 박명수가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지, 이를 위해 이 전 총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스케치다.

이 과정에서 지루한 정치 이야기를 피해나갈 도리가 없다. 할 말은 많지만, FAQ 방식(뻔한 문답들을 모아 귀찮은 질문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이 부담스런 화두를 돌파하겠다. 하여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이것이다. 이회창 전 총재의 정계복귀는 가능한가?

이회창은 미국에서 돌아오나

물론 돌아온다.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가 외국으로 떠난 이유는 ‘노무현 정부가 제대로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피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무슨 비리에 연루돼 도망다니고 있는 게 아니다. 구제금융을 자초한 전직 대통령조차 상도동 집에서 가정부와 집사 등을 거느리고 잘살고 있지 않은가. 유승준과 달리 그는 미국 시민권도 없다. 노 정권이 뿌리를 내렸는지 아닌지는 순전히 ‘주관적’ 판단이므로,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 노 정권의 ‘착근’을 축하해주면서 말이다.

이 전 총재가 도대체 언제 미국에 갔나

꼭 이런 지진아들이 있다. 지난해 12월20일,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거,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이미 그때 외유 방침이 정해졌다. 우선 1월15일 일본으로 떠났다가 29일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다 2월8일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고 3월5일 비자 갱신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 마지막으로 출국한 게 3월16일이다. 이후 석달 동안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연구활동 중이란다.

부인 한인옥씨는 이미 한국에 왔다는데

신문 정치면 1단 기사까지 찾아읽는 정성에 박수를 보낸다. 다만 할 일 없는 사람이란 오해받을까 걱정된다. 부인 한씨는 일본 외유 때도 이 전 총재보다 닷새 앞서 귀국했고, 이번에도 지난 6월6일 잠시 귀국했다. 노환을 앓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간호가 이유였다. 한씨는 과거 이회창 총재 시절 ‘베갯머리 송사’는 물론 일부 당직 인사를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는 게 당내 정설이다. 한씨의 이번 귀국이 이 전 총재의 귀국 시기를 탐색하는 의미로 읽히는 이유다.

언제 온다는 건가

이 전 총재가 9월 이전에 돌아온다는데 ‘하프 베팅’ 하겠다. 6월26일 당 대표 선출을 비롯해 7월 중순이면 한나라당의 주요 당직자 인선이 확정된다. 새 지도부의 출범은 대선 패배 이후의 과도기를 끝낸다는 의미다. ‘창심’ 논란을 피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9월 정기국회에 있다. 한나라당의 새 지도부는 9월 국회에서 대대적인 대여 공세를 펼치며, 사실상 내년 총선 체제에 돌입할 것이다. 동시에 신당 창당과 대표경선 후유증 등으로 인한 당내 이탈 세력의 등장도 점쳐진다. 당내 정비와 대여 공세를 위해 이 전 총재의 ‘아우라’가 필요하다는 게 핵심 인사들의 판단이다. 당 지도부 구성이 끝나자마자 여러 사람들이 미국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이런 분위기를 전하고, 결국 ‘삼고초려’에 성공할 것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그럼 왜 ‘올인’ 하지 않나

혹시라도 예측이 틀려서 공신력에 결정적 흠결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다. 정세판단을 혼돈스럽게 하는 건 내년 4월 총선이다. 이 전 총재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판알을 튕기는 과정에서 귀국 시기가 조정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대선 패배 직후 이 전 총재의 한 측근 중진의원은 “내년 총선 전에 총재를 모셔와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원유세를 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치적 반격에 장기간 노출시키기보다 총선 직전의 ‘깜짝 귀국’을 고려하는 분위기도 있다. 실제로 이 전 총재의 미국 비자 만료는 내년 3월이다. 이를 이유로 귀국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런’ 명분은 없다.

한국에 돌아와서 뭘 한다는 건가

사진/ 다시 정치무대에 설 것인가. 울먹이며 정계은퇴를 밝히던 지난해 12월의 모습.(이용호 기자)
당분간 옥인동 자택에 칩거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한나라당 주변 인사들이 옥인동을 찾아올 것이다. 한두달 정도의 ‘탐색 시기’가 끝나면, 그의 공식적 활동은 원로급 인사들로 구성된 일종의 사회단체로부터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한 측근은 “사회의 어른으로 자리매김하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조계종 총무스님처럼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곧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지위에 머무르고 싶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권 밖에 머무르겠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건 ‘정계복귀’가 아니잖아

날카로운 질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사회 어른론’이 오히려 정계복귀설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질문이다. ‘개인 이회창’의 이른바 ‘사회적 발언’은 본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정치권의 블랙홀에 빨려들어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한나라당에 ‘야인 이회창’의 존재는 크나큰 유혹이다. 당 대표 경선에 나선 한 중진 의원은 지난달 이 전 총재의 선영이 있는 충남 예산 지구당을 찾아 “대표가 되면 이 총재를 당 고문으로 모셔오겠다”고 공언했다. 최병렬 후보는 아예 공개적으로 ‘삼고초려’를 약속했다. 이 전 총재가 어떤 직함을 갖든, 적어도 내년 총선까지는 측근 인사들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왜 하필 이회창인가

1996년 정치권에 입문할 때만 해도 이회창은 일종의 정치적 ‘대리모’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정계를 견제하기 위해 등판시켰을 때 그는 민주계의 ‘용병’이었고, 이후 김 전 대통령과의 권력투쟁 과정에서는 민정계가 그를 밀었다. 그랬던 그가 97년 대선 때는 민주계 및 민정계를 두루 중용해 ‘친위부대’를 구축했고, 2000년 총선 직전 김윤환 등 민정계 핵심을 거세해버리고 대신 ‘젊은 피’를 수혈했다. 지난해 대선을 치를 때, 한나라당은 곧 ‘이회창당’이었다. 민자당 합당 이후, 10여년을 이어온 이른바 ‘보수 대연합’을 성공적으로 통합한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현재 탈당설이 나도는 상당수 개혁성향 의원들도 애초에는 ‘이회창’이라는 인물을 보고 한나라당 입당을 감행한 셈이다. 보수 원조인 민정계를 안심시키고, DJ라면 치를 떠는 민주계를 끌어안고, 일부 민주화 세대까지 희망을 품게 할 정도로 그는 ‘화학적 혼융’의 능력을 보여줬다.

그럼, 다음 대선에 또 출마하겠네

아니다. 이 전 총재의 복귀를 주장하는 한나라당 중진들이 틈날 때마다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그의 복귀는 다음 대선을 겨냥한 카드가 아니다. 그는 이미 68살이다. 2007년 대선이 되면 72살이 되고 임기를 마칠 즈음에는 77살이 된다. ‘창사랑’ 등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복귀와 곧잘 비교하면서 이 전 총재 복귀의 정당성을 찾는데, 상당한 비약이 있다. 그 이야기 다 하려면 지면이 모자란다. 하나만 들자면, 이 전 총재의 복귀를 맘에 두고 있는 당내 정치인들은 다음 대선을 제대로 치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점이다. 현재 그들은 ‘직선제 공포증’에 직면했다. 총칼로 권력을 잡고, 체육관에서 선거를 하고, 금권·관권 선거로 표를 창출했던 시절이 다 끝나버렸다. 과연 다음 대선을 승리할 보장이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잠정적인 대답은 내각제 개헌이다. 일본 자민당의 사례에서 보듯이, 내각제를 통한 안정적 집권을 위해서는 거대 정당이 필수적이고, 거대 정당은 막후에서 계파간 이해를 조정할 ‘보스’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전 총재의 복귀는 딱 그만큼의 의미다.

안수찬 기자/ 한겨레 정치부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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