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재야의 리더 이부영-김근태-장기표, 민주화 세력 대통합 기치 내건 신당창당을 논의하다
순서는 아무래도 좋다.
굳이 나이로 따진다면 이부영(61), 장기표(58), 김근태(56) 순이고, 국회의원 된 횟수로 따지면 이부영(3선), 김근태(재선), 장기표(아직 못했다) 순이다.
1980년대 재야의 ‘트로이카’로 불렸던 세 사람이 최근 한 묶음으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민주화운동 세력의 대통합을 기치로 한 신당 창당 문제를 논의했기 때문이다. 90년 이후 각자의 길을 걸었으니 13년 만이다. 80년대의 뜨거움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자극하는 일종의 ‘사건’이다.
군부독재에 맞선 세 사람의 상징성
세 사람을 한자리에 불러모은 것은 박형규 목사와 함세웅 신부다. 세 사람의 분열을 항상 안타까워하던 이들이다. 이들은 5월25일과 31일 잇따라 만나 1987년 김대중·김영삼 두 김씨의 분열과 그 연쇄반응으로 나뉜 민주화세력을 한데 모아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범민주대연합 단일정당’을 건설하고, 이를 간판으로 내년 총선에 나서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부영·김근태 두 의원은 이 모임 뒤에도 6월 초 별도로 한두 차례 더 만나 논의를 진척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세 사람이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받는 이유는 80년대를 관통하는 상징성 때문이다. 80년 등장한 신군부의 철권통치에 모두들 두려워 떨 때 김 의원은 83년 9월 민청련을 결성해 최초의 저항 기지를 구축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이부영 의원과 장기표 한국사회민주당 대표는 85년 전국에 흩어져 있던 민주화세력을 한데 묶어 민통련을 결성했다. 민통련은 이후 87년 6월항쟁의 사령탑 역할을 해낸다. 87년 격동기에 세 사람 모두 구속돼 있었지만 밖의 활동가들은 이들이 내보내는 행동지침에 목말라했다. 87년 대선 패배 이후 활동을 재개한 이들은 패배감에 짓눌려 있던 민주화세력을 다시 일으켜 세워 89년 전민련을 만들어냈다. 이 의원이 상임의장, 장 대표가 사무처장, 김 의원이 정책위원장을 맡아 40대 트로이카 체제를 형성했다. 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재야인사들로는 문익환·계훈제·박형규·백기완 등의 ‘원로’들이 있었지만, 세 사람의 정세 판단력과 상황 돌파력이 없었다면 80년대 재야운동은 활력이 크게 떨어졌을 것이라는 게 당시 활동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색깔로 보이지 않는 경쟁도 벌였지만, 함께 일하면서 절묘한 역할분담을 해냈다. 김 의원의 경우 ‘말하는 것을 옮겨 적으면 그대로 한편의 논문이 나온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논리정연한 이론가였다면, 장 대표는 서울법대 재학시절 전태일의 분신자살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먼저 성모병원 영안실로 달려가 그의 주검을 온몸으로 껴안은 전력답게 열정의 소유자였다. 이 의원은 부드럽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해내며 한군데로 힘을 결집시키는 ‘맏형’ 구실을 했다는 것이 당시를 함께했던 사람들의 기억이다. 80년대를 함께 이끌었던 세 사람이기에 이들의 재결합 가능성만을 두고서도 적잖은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그러나 높기만 한 ‘불신의 벽’
87년 대선 당시 후보단일화, 비판적 지지, 독자후보론으로 갈갈이 나뉘었던 민주화세력이 다시 뭉쳐 정통성을 회복하는 중요한 계기점이 될 수 있다. 또 요즘 지지부진한 신당 논의 과정에서 돌파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70~80년대 세 사람과 동지적 관계를 맺었던 지역과 부문의 주요 활동가들이 큰 덩치의 세력으로 신당에 합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사람이 다시 힘을 모으기에는 지난 13년 세월의 더께가 너무 두꺼운 것 아니냐는 비관론이 아직은 우세한 편이다.
우선 현재 각자의 처지가 너무 다르고 서로간 불신의 벽이 높다.
이 의원은 범민주대연합 신당 문제에 대해 “6월항쟁의 에너지가 모든 것의 원류다. 민주화세력의 대동단결이야말로 지역구도를 극복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된다”고 말했다. 셋 중에서는 가장 적극적인 편이다. 신당을 위해 민주당이나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이 모두 당을 뛰쳐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사실 이 의원은 2년 전에도 비슷한 것을 추진한 적이 있다. 화해와 전진 포럼이다. 당시 이 의원은 이 포럼을 발전시켜 한나라당이나 민주당과는 별도의 제3신당을 만든 뒤 독자적으로 대선을 치른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번번이 좌절했고 그때마다 한나라당에 깊게 발을 들여놓았다. 이 의원쪽에서는 보수적 색채가 강한 한나라당에서 ‘썩는 것을 막는 소금’ 노릇을 했다고 항변하지만 ‘반한나라’ 정서가 강한 과거의 동지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할 형편이다.
김 의원은 “그동안 내 일관된 주장은 역사성을 지닌 민주당을 중심으로 개혁적인 통합신당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87년 김대중 후보에게 비판적 지지를 보낸 이후 줄곧 한길을 걸어온 김 의원으로서는 당연한 결론이다. 민주당과 이를 지지하는 호남대중의 개혁성을 고스란히 보전해야 하는 만큼 민주당 중심의 신당이 만들어진 뒤, 한나라당 개혁성향 의원을 비롯한 여러 개혁세력들이 합류하기를 내심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민주당 중심 사고에 대해 이 의원쪽에서는 “차기를 바라고 동교동계를 너무 의식하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장 대표는 “87년 이후에 이부영·김근태·나 장기표 이렇게 셋이 운동권을 결집시키지 못한 것은 3김보다 더 큰 죄였다. 김근태 저러고 있고, 이부영 결단 못 내리는 것 같아 답답하다. 이부영·김근태에게 당에서 사람들 끌고 나오라고 주문했다”고 말했다. 재결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로 풀이된다. 하지만 그는 신당 논의에서 어디까지나 ‘구경꾼’이다. 사민당 대표인 만큼 기존 보수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 재편에 발벗고 나설 처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사회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이를 위해 내년 총선에서 최소한 150곳 이상의 후보를 내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89년 일찌감치 재야세력의 독자정당론을 내걸고 민중당을 창당했던 그로서는 한두번의 굴곡을 거친 이후 제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이런 노선 차이는 과거 이들이 후보단일화론(이부영)과 비판적 지지론(김근태), 독자정당론(장기표)으로 나뉘었다는 점을 되돌아보면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한다. 게다가 이들의 재결합이 지니는 의미 자체에 회의를 품는 시각도 많다.
“의미없는 복고풍” 비판적 시각도
“너무 복고풍이다. 과거 민통련과 전민련을 복원한다고 지금 무슨 의미가 있나. 과거 군사독재와 싸웠던 시절에는 효용성이 있을지 모르나 지금 그 세력으로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여러 사정 때문에 현재 세 사람의 논의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그래도 3김 이후 새로운 정치질서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고, 그 결과물로 ‘신당’은 태동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세 사람이 과거의 분열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스스로 주인공이 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밑거름이 되겠다고 자세를 낮출 때 트로이카의 영광은 재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세 사람을 다 잘 아는 한 후배의 충고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사진/ 1980년대 재야의 트로이카로 불렸던 세 사람. 이부영·김근태 의원·장기표 대표(왼쪽부터 한겨레 이정용,강창광,이종근 기자)의 대통합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세 사람을 한자리에 불러모은 것은 박형규 목사와 함세웅 신부다. 세 사람의 분열을 항상 안타까워하던 이들이다. 이들은 5월25일과 31일 잇따라 만나 1987년 김대중·김영삼 두 김씨의 분열과 그 연쇄반응으로 나뉜 민주화세력을 한데 모아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범민주대연합 단일정당’을 건설하고, 이를 간판으로 내년 총선에 나서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부영·김근태 두 의원은 이 모임 뒤에도 6월 초 별도로 한두 차례 더 만나 논의를 진척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세 사람이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받는 이유는 80년대를 관통하는 상징성 때문이다. 80년 등장한 신군부의 철권통치에 모두들 두려워 떨 때 김 의원은 83년 9월 민청련을 결성해 최초의 저항 기지를 구축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이부영 의원과 장기표 한국사회민주당 대표는 85년 전국에 흩어져 있던 민주화세력을 한데 묶어 민통련을 결성했다. 민통련은 이후 87년 6월항쟁의 사령탑 역할을 해낸다. 87년 격동기에 세 사람 모두 구속돼 있었지만 밖의 활동가들은 이들이 내보내는 행동지침에 목말라했다. 87년 대선 패배 이후 활동을 재개한 이들은 패배감에 짓눌려 있던 민주화세력을 다시 일으켜 세워 89년 전민련을 만들어냈다. 이 의원이 상임의장, 장 대표가 사무처장, 김 의원이 정책위원장을 맡아 40대 트로이카 체제를 형성했다. 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재야인사들로는 문익환·계훈제·박형규·백기완 등의 ‘원로’들이 있었지만, 세 사람의 정세 판단력과 상황 돌파력이 없었다면 80년대 재야운동은 활력이 크게 떨어졌을 것이라는 게 당시 활동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색깔로 보이지 않는 경쟁도 벌였지만, 함께 일하면서 절묘한 역할분담을 해냈다. 김 의원의 경우 ‘말하는 것을 옮겨 적으면 그대로 한편의 논문이 나온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논리정연한 이론가였다면, 장 대표는 서울법대 재학시절 전태일의 분신자살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먼저 성모병원 영안실로 달려가 그의 주검을 온몸으로 껴안은 전력답게 열정의 소유자였다. 이 의원은 부드럽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해내며 한군데로 힘을 결집시키는 ‘맏형’ 구실을 했다는 것이 당시를 함께했던 사람들의 기억이다. 80년대를 함께 이끌었던 세 사람이기에 이들의 재결합 가능성만을 두고서도 적잖은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그러나 높기만 한 ‘불신의 벽’

사진/ 87년 격동기에 세 사람은 모두 구속돼 있었지만 재야 활동가들은 이들이 내보내는 행동지침에 목말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