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한나라당 대표 경선주자 탐구- 서청원 의원
화려한 복귀를 꿈꾸는 서청원 의원, 도발적 쟁점으로 주도권 잡았지만 대표 경력 등 부담
서청원 의원을 설명할 땐 늘 ‘뚝심’과 ‘의리’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 화끈하고 직선적인 그의 성격을 일컫는 말들이다. 친화력도 좋다. 만나기만 하면 금세 형님하고 아우한다. 19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상도동계가 만든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 간사장이던 그가 친화력 좋기로 이름난 이수성씨를 지지한 것도 자신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는 오기가 있고 저돌적이다. 그를 잘 아는 한 의원은 “서청원은 한번 결심하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밀어붙인다”고 평한다. 인간관계도 원만하고 친화력이 뛰어난 것과는 대조적으로 무모할 정도의 저돌성 때문에 정적이 적지 않다. 92년 대선 경선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YS를 흔들어대자 그는 “당을 뛰쳐나가자”고 분위기를 잡았다. 97년 정발협 간사장 시절 이수성씨에 대한 집단적 지지를 무리하게 이끌어내려다 반발에 부닥쳐 간사장을 사임한 것도 그의 저돌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번에 다른 경선주자들이 포위공격하듯 그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데는 그가 워낙 세게 밀어붙이는 데 대한 반작용의 측면도 있다.
친화력 뛰어나… 한때 ‘반창대열’ 선도 그는 “대학 때부터 정치지향적인 것 같았다”고 스스로 회고한다. 원래부터 정치활동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전공도 정치외교학이다. 중앙대 총학생회장 시절 6·3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과 군정반대를 주도하다 4개월간 옥살이를 한다. 12년 동안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는 동안 광주항쟁을 취재하기도 했다. 집이 2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유치송 전 민한당 총재와의 인연으로 11대 때 민한당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뒤 서울 동작에서만 5선을 쌓았다. 민추협에 참여해 기관지 <민주통신>의 주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신민당이 평민당과 통일민주당으로 분화과정에서 YS와 확실히 인연을 맺은 뒤엔 대변인과 총재비서실장, 정무1장관, 원내총무를 역임하며 YS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지금이야 그의 출마가 이른바 ‘창심’ 논란을 유발할 정도로 이회창 전 총재와 유별난 사이가 됐지만 두 사람은 원래 ‘적대적인’ 관계였다. 97년 3월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 날치기파동과 김현철씨 비리의혹의 와중에 이회창씨를 새 대표로 지명하고 서청원 의원을 사무총장에 내정한다. 이 대표는 서 의원이 원내총무로서 날치기 파동의 주역이었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고, YS는 이를 받아들여 서 의원 대신 박관용 의원을 사무총장에 기용했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서 의원은 입술을 앙다물며 화를 삭였다. 이런 ‘악연’ 때문인지 그는 97년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반창대열’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정치의 세계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법. 이 전 총재가 2000년 총선 때 서 의원에게 선대본부장을 맡기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동지’ 관계로 전환된다. 그는 일단 일을 맡으면 몸을 사리지 않는다. 94년 정무1장관 시절 야당은 모든 국무위원(23명)을 대상으로 해임안을 제출한다. 어차피 야당이 소수여서 해임안 표결은 자연스럽게 장관들에 대한 ‘인기투표’가 됐다. 그는 반대 186표로 야당의 최다 신임을 얻었다. ‘발로 뛰는 정무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야당 의원들과 자주 만난 덕택이었다. 96년 신한국당 원내총무 시절 국회 운영위원장 선출 투표에서도 97.8%로 역대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당시 야당과 개헌협상을 벌이면서 총무이던 박상천, 이정무 의원과 19차례나 협상테이블에 마주앉았다. 이때 ‘타고난 대화론자’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가 경선에 나선 것은 이번이 세 번째. 처음엔 꼴찌였고, 그 다음은 1등이었다. 98년 총재경선 때는 392표(5.4%)의 참담한 성적이었다. 그는 와신상담했다. 2000년 국회의장 후보를 뽑는 당내 경선에서 그는 박관용 의원과 맞붙어 압승했다. 2002년 전당대회에서 그는 1위를 차지한다. 당시 전당대회 대의원들 앞에서 웃옷을 벗고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어헤친 채 ‘강한 당수론’을 외쳤다.
그는 이번에 몇 가지 도발적인 쟁점을 내놨다. ‘중간세력주도론’은 보수를 기조로 하는 한나라당의 정체성을 고치더라도 중산층과 서민을 대변하는 중도정당으로 가자는 주장이다. 보수의 기조를 더욱 굳건히 하자는 최병렬 후보와 각을 세운 구호다. ‘중간세력주도론’은 언뜻 이철승씨의 ‘중도통합론’이나 민주당의 ‘중도개혁노선’을 떠올린다. 이에 대해 서 후보쪽은 “오른쪽에 있던 사람들이 왼쪽으로 가자는 것이니 ‘사꾸라 시비’와 무관하며, 노동자와 빈민층까지 다 대변하려했던 DJ의 노선과는 차이가 난다”고 반박한다. 내년 총선에서 승리해 책임총리지명권과 조각권을 확보하자는 ‘주도적 국정참여론’도 논란을 일으켰다. 여기엔 두 차례의 대선패배 이후 만연한 당원들의 무력감을 해소하고, 지지자들에게 주류에 복귀할 기회임을 설득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적 고려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만년 야당’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국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지지자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자는 계산이다. 총선 직후에 권력구조 개헌을 공론화하자며 조기개헌론을 들고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도정당론 내놓고 국정참여론으로 논란
대표경선에 도전하는 그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지난 대선 당시 대표를 지낸 경력이다. 이회창 전 총재는 정계를 은퇴하면서 당의 ‘환골탈태’를 주문했다. 이제 그가 또다시 당의 얼굴로 나서려 하는 것을 국민이 어떻게 바라볼지가 문제인 것이다. 수도권 초·재선 의원들의 만만치 않은 반발기류도 변수다. 수도권의 한 소장·개혁파 의원은 “서 후보가 당의 대표로 선출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떨쳐 일어서야 하는 순간”이라고까지 말한다.
서 의원은 ‘신의’를 덕목으로 정치를 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겐 지난 대선 패배 후 대표경선 불출마를 선언했다가 이를 ‘번복’했다는 멍에가 씌워져 있다. 올해 그의 나이 60. 비로소 모든 것을 순리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이순의 나이다. 당내의 격한 비난을 감수하며 경선에 뛰어든 그의 결정이 순리인지, 아닌지 지켜볼 일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사진/ ‘신의’의 정치를 해왔다고 자부하는 서청원 의원. 그는 대표 경선 불출마 번복의 멍에를 털어낼 것인가.(한겨레 김봉규 기자)
친화력 뛰어나… 한때 ‘반창대열’ 선도 그는 “대학 때부터 정치지향적인 것 같았다”고 스스로 회고한다. 원래부터 정치활동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전공도 정치외교학이다. 중앙대 총학생회장 시절 6·3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과 군정반대를 주도하다 4개월간 옥살이를 한다. 12년 동안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는 동안 광주항쟁을 취재하기도 했다. 집이 2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유치송 전 민한당 총재와의 인연으로 11대 때 민한당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뒤 서울 동작에서만 5선을 쌓았다. 민추협에 참여해 기관지 <민주통신>의 주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신민당이 평민당과 통일민주당으로 분화과정에서 YS와 확실히 인연을 맺은 뒤엔 대변인과 총재비서실장, 정무1장관, 원내총무를 역임하며 YS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지금이야 그의 출마가 이른바 ‘창심’ 논란을 유발할 정도로 이회창 전 총재와 유별난 사이가 됐지만 두 사람은 원래 ‘적대적인’ 관계였다. 97년 3월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 날치기파동과 김현철씨 비리의혹의 와중에 이회창씨를 새 대표로 지명하고 서청원 의원을 사무총장에 내정한다. 이 대표는 서 의원이 원내총무로서 날치기 파동의 주역이었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고, YS는 이를 받아들여 서 의원 대신 박관용 의원을 사무총장에 기용했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서 의원은 입술을 앙다물며 화를 삭였다. 이런 ‘악연’ 때문인지 그는 97년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반창대열’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정치의 세계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법. 이 전 총재가 2000년 총선 때 서 의원에게 선대본부장을 맡기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동지’ 관계로 전환된다. 그는 일단 일을 맡으면 몸을 사리지 않는다. 94년 정무1장관 시절 야당은 모든 국무위원(23명)을 대상으로 해임안을 제출한다. 어차피 야당이 소수여서 해임안 표결은 자연스럽게 장관들에 대한 ‘인기투표’가 됐다. 그는 반대 186표로 야당의 최다 신임을 얻었다. ‘발로 뛰는 정무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야당 의원들과 자주 만난 덕택이었다. 96년 신한국당 원내총무 시절 국회 운영위원장 선출 투표에서도 97.8%로 역대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당시 야당과 개헌협상을 벌이면서 총무이던 박상천, 이정무 의원과 19차례나 협상테이블에 마주앉았다. 이때 ‘타고난 대화론자’라는 평가를 얻었다.

사진/ 서청원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당 대표로 선거를 이끌었다. 그는 대선 패배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류우종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