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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경선주자탐구]‘개혁적 비주류’의 꿈/김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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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5-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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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한나라당 경선주자 탐구- 김덕룡 의원

대표경선은 김덕룡 의원에게 모든 것을 건 ‘올인 게임’… “전라도 출신이라는 점이 오히려 기회”

‘백두’와 ‘지퍼’. 김덕룡 의원의 별명이다. 머리가 희고 입이 무겁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런 것들보다 그를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특징은 그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점이다. 전라도 출신 정치인이 어디 그뿐인가. 하고 많은 게 전라도 정치인이다. 그런데 그는 한나라당 소속이다. 전라도 출신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희귀종’이다.

그가 날개를 펼치려 할 때 고향이 전라도라는 점은 그에게 족쇄였다. 그는 지금도 “97년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출신지역을 이유로 오랜 정치동지들이 나를 멀리 할 때가 가장 힘들고 괴로웠다”고 회고한다. 그와 정치를 함께했던 주변의 동지들은 죄다 고향이 영남쪽이었다. 그의 측근들은 “그가 전라도 출신만 아니었어도…”라고 늘 아쉬워했다.


YS와 만난 뒤 고난의 가시밭길

사진/ 김덕룡 의원(이용호 기자)
그런 그가 이젠 “전라도 출신이라는 점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며 ‘호남대표론’을 내세운다. 한나라당의 영남당 이미지를 깨기 위해 호남출신인 자신보다 더 좋은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영남출신인 노무현 대통령이 호남중심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영남후보론’을 설파했던 논리와 비슷하다. 그는 “호남에서 출생했지만 수도권에서 정치를 하면서 영남인들을 도와 정치를 해왔기에 이제 영남인들이 빚을 갚을 때가 됐다”고 호소하며 영남지역을 파고들고 있다.

전라도 출신인 그가 경상도 정치인들에 둘러싸이게 된 것은 YS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1963년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인 그는 축제 때 야당 대변인 YS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몇 차례 만나게 된다. 64년 6·3대일굴욕외교반대 서울대투쟁위원장으로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돼 제적된 그는 1970년 YS의 수행비서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후 공보비서, 비서실장 등을 거치면서 정치수업을 쌓았다.

1985년(45살) 정치규제가 해제될 때까지는 고난의 가시밭길이었다. 시인 김지하씨 양심선언과 관련해, YH사건 백서발간 사건과 관련해, YS의 단식투쟁을 내외신기자에 공표한 혐의로 각각 구속되는 등 유신과 군사독재 시절 모두 4차례의 옥고를 겪어야 했다. 민추협의 초대 기획실장으로도 활약하기도 했다. 그에게 ‘개혁의 전도사’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것은 이런 민주화운동 경력이 밑거름이 됐다.

88년 서울 서초을 지구당에서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그는, 이후 내리 4선의 관록을 쌓는다. 그는 90년 3당합당을 ‘고뇌에 찬 결단’과 ‘명예혁명’으로 평가한다. 3당합당을 ‘야합’으로 규정하고 합류를 거부했던 노무현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선택이었다. 92년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엔 정무제1장관으로 임명돼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선다. 하지만 그는 ‘입바른 소리’를 참지 못했다. YS에게 비공식라인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 것과 차남 현철씨의 외국행을 건의했다가 현철씨의 반격을 받고 정무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사진/ 5월22일 열린 한나라당 대표 후보 정견 발표회. 김덕룡 의원은 ‘호남대표론’을 내세운다.(이용호 기자)
그는 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 98년 한나라당 총재경선, 2001년 총재경선 등 3차례 경선에 나선 적이 있다. 이번 당 대표 도전은 ‘4수’인 셈이다. 과거 경선에서 그는 한번도 1등을 차지하지 못했다. ‘6룡’이 대결한 97년 대선후보 경선 당시 그는 이회창, 이인제, 이한동 후보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2, 3위와의 표차는 100표도 안 됐지만 ‘4등’에 머물렀다. 당시 김 의원은 1673표를, 함께 이번 경선에 나선 최병렬 의원은 236표를 각각 얻었다. 이회창, 이한동, 서청원 후보와 대결한 98년 총재경선 때 김 의원은 1283표(17.5%)를 얻어 3위에 그쳤고, 역시 이번 경선에 나선 서 후보는 392표(5.4%)를 기록했다. 2001년 총재경선 때는 이회창 후보에 이어 1473표(20.8%)로 2위였다.

지난 3차례의 경선에선 ‘이회창’이라는 큰 나무가 버티고 있었다. 그 그늘 아래서 그는 늘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개혁적 비주류’로 규정하며 개혁과 변화를 주장했다. 이회창 전 총재에게 도전했던 주요 후보들이 대부분 탈당했지만 어쨌든 그는 당을 지키며 두 차례의 대선에서 각각 선대위원장과 선대본부장으로 활약했다. 이제 그를 가리던 ‘큰 나무’는 사라졌다. 그는 “이회창 전 총재가 떠난 지금, 한나라당 창당의 주역이며 당의 또 다른 한 축을 차지하던 제가 당을 이끌어가는 게 순서이자 순리”라고 외친다. 그에게 이번 대표 경선은 ‘올인게임’이다. 이회창 전 총재의 그늘이 사라진 선거에서도 패배하면 그가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던질 수밖에 없다.

신중하다? 결단이 늦다?

그는 인간적이고 생각이 열려 있으며 신중하다는 평을 듣는다. 겉보기엔 무뚝뚝하지만 마음이 섬세하고 여리다는 인물평도 나온다. 이 때문에 따르는 의원들이 많다. 확실한 ‘계보원’을 거느린 주자는 그가 유일하다. 하지만 너무 좌고우면하고 심사숙고한다는 게 단점으로 꼽힌다. 그러다보니 정치적 결단의 시기에 한 박자씩 늦었고 목소리를 내야 할 때 목소리가 수그러들기도 했다. 한발짝 앞서며 분위기를 주도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비서생활을 오래 한 탓에 한동안 지도자보다는 비서나 참모의 이미지가 강했던 것도 그의 도약을 제약했던 요인이었다.

그는 이번 경선에서 ‘개혁의 리더십’을 자신의 고유상표로 개발해 종횡무진 휘두른다. 그의 선거구호도 ‘개혁대표로 선거승리, 개혁정당으로 정권창출’이다. “개혁이 노무현 정권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개혁엔 개혁으로 ‘맞짱’을 뜨자”는 ‘개혁맞짱론’을 내놨고, 내년 총선에서 박빙의 승부가 벌어질 수도권 승리를 위해선 개혁의 이미지가 강한 자신과 개혁적인 젊은 의원들이 당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개혁원조론’도 선보였다.

대표로 당선되면 ‘개혁적 보수’의 정체성으로 노동자와 농민, 서민의 아픔을 감싸주고 꿈을 키워주는 개혁적 국민정당으로 한나라당의 체질을 바꾸겠다는 그가 이번엔 ‘개혁적 비주류’에서 ‘개혁적 주류’로 올라설 수 있을까.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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