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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하나로 가는 길목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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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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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동당 창건 행사 참관인이 본 북한 사람들… 편견을 씻는 배려의 모습 역력

(사진/조선노동당 창당 55돌 기념행사의 집단체조 모습)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과 실제 북한의 모습은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 참관을 위해 북한으로 향하는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이런 생각이 맴돌았다. 평양에 머문 5박6일 동안도 좀처럼 이 화두를 접을 수 없었다.

솔직히 노동당 창당 55돌 공식 기념행사를 지켜보면서 북쪽 주민들이 보여준 모습에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100만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열병식과 군중시위, 김일성 광장을 수놓은 횃불행진, 집체예술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북한이 아니면 지구 위의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북쪽 안내원들의 자랑섞인 설명에 대해 남쪽 참관단은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북쪽의 집체예술이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것은 통일에 관심있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이다. 나도 이런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의 모습은 나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었다. 참관단의 반응도 각양각색이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다” “놀라움 감정의 한켠에서 두려운 감정도 생긴다”….

나는 행사의 규모나 예술성뿐만 아니라 이런 대규모 행사를 일사불란하게 치러내는 조직력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다. 10월10일부터 비가 왔기 때문에 대규모 야외행사들은 대부분 그날 오전에 최종 결정됐다. 이 때문에 남쪽 참관단은 행사 일정을 사전에 알 수 없는 이른바 ‘묻지마 관광’을 해야 했다. 그런데 오전에 최종 결정된 대규모 인원이 참가하는 행사를 북쪽 주민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했다.


강제동원과 일심단결, 그 차이를 넘어야

북쪽 안내원들은 이에 대해 “일심단결의 모습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남쪽에서는 “강제동원”이라고 바라보았던 것에 대해서 북쪽은 “일심단결”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남북의 시각 차이는 그만큼 컸던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런 북쪽의 행동을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북은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자긍심으로 여기고 있었다.

또 북쪽 사람들의 일상에는 ‘총폭탄 정신’, ‘자폭정신’이라는 섬뜩한 용어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선군정치’라는 군사주의적 용어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열병식과 군중시위에 학생, 청년, 평양시민들이 군인들과 함께 참여한 것에 대해서도 ‘전민의 무장화’, ‘총대 중시사상’이라는 관점에서 자신 있게 설명을 했다. 우리에게는 섬뜩한 표현이지만 북쪽 사람들은 오히려 섬뜩함을 느끼는 우리를 이상하게 여겼다.

이번 방북에서 느낀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우리를 대하는 북쪽 당국의 태도가 방북 전에 갖고 있던 우리의 예상과는 크게 달랐다는 것이다. 사실 남쪽에서는 북한이 노동당 창건 55돌 행사에 정당, 사회단체, 개별인사를 초청한 것을 놓고 출발 전부터 많은 논란을 벌였다. 노동당 행사에 참여할 경우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을까 하는 게 그 논란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북쪽 관계자들은 우리가 평양에 머무르는 동안 오히려 남쪽 참관단한테 정치적인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내내 “노동당 창건 기념일이 국가적인 명절이기 때문에, 명절을 함께 쇠자는 차원에서 남쪽 인사들을 초청했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이러한 자신들의 뜻이 혹시나 왜곡될까봐 노심초사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부담없는 참관 꾀해… 따뜻한 동포애 넘실

(사진/남북이 서로를 심장에 남기기 위하여….남쪽 방문단 일행이 북한쪽 인사들과 손에 손을 잡았다)
우리는 솔직히 출발 전부터 고민했다. “혹시 김일성의 시신에 참배를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 조문파동 등을 겪었고, 우리의 방북을 놓고 논란이 컸던 탓이었다. 그러나 평양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안내원들은 “여러분이 여야가 팽팽히 대치한 상황에서 방북했다는 것을 잊지말아달라”거나 “김정일 장군께서는 여러분이 사회문화적인 분야에 참여해서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남쪽 참관단 중 일부가 “북의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봐야 한다”면서 금수산 기념궁전이나 혁명열사릉 참관 등을 북쪽에 요구했지만 북쪽관계자들은 이를 거절했다. 혹시나 이번 초청이 정치적인 것으로 변질돼 우리들이 남쪽에 돌아가서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런 일들은 노동당 창건 기념일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남북 양쪽이 얼마나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분단의 긴 세월은 이처럼 남북의 차이를 만들어 놓았다. 나는 “동일한 현상에 대해서도 다르게 보는 차이, 더욱이 ‘마음의 눈’에도 다른 시각이 생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는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다. 평양시민들을 접하면서 따스한 동포애와 변화된 현실을 느꼈다. 길가, 지하철, 묘향산 등을 다니며 만난 북한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무조건 손을 흔들었다. 북한 주민들에게 “남쪽에서 왔다”며 “함께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이런 요구에 대해서도 그들은 어색해하는 분위기가 없었다. 몇몇 안내원들은 이런 변화에 대해 “과거에는 남한이 미국을 앞세웠기 때문에 싫어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게 없지 않냐”는 말로 자신들의 마음을 전했다.

5박6일의 평양체류를 통해 나는 남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족, 같은 핏줄이라는 동질성을 쉽게 확인했다. 하지만 이런 동질성이 남북이 추구하고 있는 다른 가치를 완전하게 일치시킬 수 없다는 것 또한 확실했다. 이번 방북을 통해 분명하게 느낀 것은 남북이 서로에게 강요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통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이란 남북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91년 12월13일에 채택한 남북기본합의서 1조1항이 바로 ‘남북의 상호인정과 존중’이다.

남쪽은 분단 55년 동안 민주주의, 평화, 인권, 다양성에 대한 존중 등 많은 소중한 가치를 발전시켜왔다. 북쪽도 나름대로 소중이 여기는 가치가 있다. 일심단결, 자주성, 총대중시사상…. 이런 것들이다. 통일은 이런 남쪽의 가치와 북쪽의 가치들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간의 이같은 다름을 인정하는 게 통일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통일이…

(사진/남북의 만남은 통일로 가는 디딤돌이다. 남쪽 방문단이 평양시내를 관광하며 한반도기를 흔들고 있다)
때문에 통일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이번 방북에서처럼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를 잘 알아야 한다. 나는 언젠가 8월 통일행사 도중에 ‘만남은 기적을 이룬다’는 제목의 대자보를 본 적이 있다. 서로를 잘 알기 위해서는 만남이 필요하다.

이번 노동당 창건 기념일 행사 참관이 남긴 의미 가운데 하나는 북을 방문한 정당·사회단체들이 각각 해당 분야의 북쪽 정당과 단체들하고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데 있다. 민족의 화해와 통일은 우리 온 겨레가 주체로 참여해야 하는 민족전체의 문제이다. 남북 당국이 정상회담을 하고, 북한과 미국이 관계 개선을 위해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통일환경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남북 정당, 사회단체들의 만남은 민족 구성원들이 다방면적으로 통일과정에 참여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앞으로 이어질 각계각층의 대화와 접촉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을 익혀나간다면 그것은 훌륭한 ‘통일연습’이 된다. 일부의 우려와는 달리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 참관이 민간교류를 확대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계기가 된 것이다.

김창수/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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