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한나라당 경선주자 탐구- 강재섭 의원
‘TK의 황태자’로 출발한 강재섭 의원, 젊음을 무기로 도전장 낸다 한나라당의 새로운 ‘얼굴’을 뽑는 전당대회가 오는 6월26일 치러진다. 대표 경선에 뛰어든 주자는 강재섭·김덕룡·김형오·서청원·이재오·최병렬 의원. 이들 6명의 정치·인생역정과 경선전략 등을 차례로 짚어본다. 편집자
강재섭 의원은 올해 초 하루 두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우리 당이 또다시 야당이 됐으니 심기일전하자는 것이지요. 나도 내 정치 한번 해보자고 독하게 마음먹었습니다. 이전에도 몇 차례 시도하다 결국 못 끊었는데, 이번엔 진짜 확실합니다.” 와신상담인 셈이다.
양지만 추구하는 것 아닌가
내리 4선의 관록을 쌓았고, 부총재에다 최고위원까지 했던 그가 이제야 ‘내 정치’를 하겠다? 그는 재선 때 이미 ‘TK의 황태자’였고 ‘차세대 기대주’였다. 3선 때는 ‘차세대 주자’ 반열에 오르내렸다. 1998년 국회의원을 상대로 한 정치지도자 설문조사에서 그는 이회창·이수성·이인제·정몽준·김근태·김덕룡에 이어 6위를 달렸다. 하지만 그는 기회가 올 때마다 번번이 자세를 낮췄다. 97년 대선후보 경선 때 대구·경북 지역에선 그가 나서줄 것을 기대했으나 그는 침묵했다. 98년엔 한나라당 총재 경선에 도전했다가 1주일 만에 ‘역부족’을 선언하며 뜻을 접고 말았다.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뚜렷한 목소리를 크게 낸 적도 없다. 그는 “당의 단합과 대선승리를 위해 꿈을 접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그에겐 현상에 안주하고, 도전의식이 없으며, 강단과 추진력이 부족하다는 꼬리표가 붙었다. 도전하지 않았기에 도약의 기회가 없었고, 대중적 지명도도 쌓지 못했다. 대신 견제를 피하며 착실히 관록을 쌓았고, 늘 웬만한 위치는 차지했다. 그런 그가 이제 ‘내 정치’를 선언하며 거대야당 한나라당의 ‘얼굴’이 되겠다고 도전한다. 그의 정치역정은 아픔과 시련이 없는 탄탄대로였다. 정치입문 이후 그가 속한 정당은 민정당에서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바뀌었지만 그는 한번도 이 흐름을 거스른 적이 없다. 몇 차례의 결정적 고비 때마다 그의 선택은 항상 다수파였다. 그는 5·6공 시절 ‘실세’였던 박철언 전 의원이 이끄는 월계수회의 제2인자였다. 박 의원과 함께 북한에 밀사로도 다녀왔다. 그래서인지 ‘박철언의 오른팔’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러나 그는 14대 대선을 앞둔 92년 10월, YS에 반기를 들고 민자당을 탈당한 박 의원을 따라가지 않았다. 이후 YS는 그를 민자당 대변인과 총재비서실장, 대구시지부장으로 중용하며 두고두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대구·경북 지역엔 자민련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그는 “당이 어렵다고 떠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민자당을 고수했고, 총선에서 살아남았다. 16대 총선을 앞둔 2000년 2월, 한나라당 공천파동의 후유증으로 민주국민당의 창당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이었다. 이회창 총재가 공천에서 탈락시키자 한나라당을 뛰쳐나간 TK의 맹주 김윤환 전 의원은 그를 영입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 전 의원이 신당추진을 발표하는 날, 대구지역 원내외위원장을 끌어모아 이 총재쪽으로 ‘회군’했다. 그의 이런 선택을 두고 ‘권력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물’이라거나 ‘양지만을 추구한다’는 부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양지를 좇은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곳에 햇볕이 나를 따라왔다”고 항변한다. 어쨌든 그는 정치적 갈림길마다 ‘탁월한 선택’을 함으로써 차기 대권을 넘보는 정치지도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 정치입문 이전에도 그에겐 고비와 부침이 없었다. 아버지는 엄격하지만 자상한 교장 선생님이었다. 대학생인 아들을 무교동 낙지집으로 불러 소주잔을 기울이고, 함께 어깨동무를 하며 거닐 정도로 자상한 아버지였다. 서울 법대에 들어간 아들은 데모 한번 안 하고 4학년 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대학시절부터 노래 잘하고 술·담배 즐기며 당구·볼링 잘 치는 한량이었다. 지금도 골프는 핸디 15(87타)의 수준급 실력이다. “노무현과 맞장뜰 후보” 광주·대구·부산·서울 등지에서 검사로 일하던 그는 80년 32살의 나이에 청와대 정무·법무비서관으로 발탁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동향인 TK의 선배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는 ‘운’도 그의 출세를 도왔다. 그의 정계입문 과정은 그를 끌어준 선배 박철언씨와 판박이다. 그도 박 전 의원의 뒤를 이어 ‘검사-대통령 정무비서관-여당의원’의 정규코스를 밟았다. 음지가 들지 않은 순탄한 인생의 전형이었다. 그는 ‘점잖고 겸손하며 따뜻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많이 듣는다. 상처받지 않고 곱게 성장해 출세가도를 달려온 때문일까. 집안 분위기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부농인 할아버지가 가첩(집안의 내력을 담은 책)에 써준 글귀를 좌우명으로 간직하고 있다.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讓土壤 河海不擇細流).’ 큰 산은 작은 흙덩이도 마다하지 않고, 큰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이 글귀를 새기며 정치적 포용력을 길렀다. 그에겐 젊음이 무기다. 그러나 세대교체론은 입에도 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노·장·청의 조화’를 강조하며 “나이가 많으니 나가라는 식의 인위적 세대교체와 물갈이엔 반대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한나라당 의원의 60% 이상이 60대다. 세대교체를 주장하는 순간 그들을 죄다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50대 기수론’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싶지만 그러기 어려운 한나라당의 현실이 그에겐 고민이다. 대신 ‘노무현 대 강재섭’의 대비효과를 통해 ‘젊은 지도자’의 이미지를 확보하려 한다. 그의 주요한 경선전략도 ‘노무현과 맞장 뜰 유일한 후보’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는 올해 55살. 노 대통령보다 2살이 젊다. 젊음의 코드가 같다고 노 대통령을 칭찬한 것도, 정치하는 방식의 채널이 다르다고 비판한 것도 다 이런 까닭에서다. 그의 외아들 병수(26)씨는 최근 공익근무요원 근무를 시작했다. 원래 군입대를 면제받았지만 지난 1월 재신검 신청서와 자원입대를 신청한 끝에 ‘가까스로’ 입대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장래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아들의 ‘효심’이었다. 그의 여의도 사무실에는 ‘비젼 2010’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그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TK의 황태자’로 출발한 강재섭 의원, 젊음을 무기로 도전장 낸다 한나라당의 새로운 ‘얼굴’을 뽑는 전당대회가 오는 6월26일 치러진다. 대표 경선에 뛰어든 주자는 강재섭·김덕룡·김형오·서청원·이재오·최병렬 의원. 이들 6명의 정치·인생역정과 경선전략 등을 차례로 짚어본다. 편집자

사진/ 강재섭 의원(김진수 기자)
내리 4선의 관록을 쌓았고, 부총재에다 최고위원까지 했던 그가 이제야 ‘내 정치’를 하겠다? 그는 재선 때 이미 ‘TK의 황태자’였고 ‘차세대 기대주’였다. 3선 때는 ‘차세대 주자’ 반열에 오르내렸다. 1998년 국회의원을 상대로 한 정치지도자 설문조사에서 그는 이회창·이수성·이인제·정몽준·김근태·김덕룡에 이어 6위를 달렸다. 하지만 그는 기회가 올 때마다 번번이 자세를 낮췄다. 97년 대선후보 경선 때 대구·경북 지역에선 그가 나서줄 것을 기대했으나 그는 침묵했다. 98년엔 한나라당 총재 경선에 도전했다가 1주일 만에 ‘역부족’을 선언하며 뜻을 접고 말았다.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뚜렷한 목소리를 크게 낸 적도 없다. 그는 “당의 단합과 대선승리를 위해 꿈을 접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그에겐 현상에 안주하고, 도전의식이 없으며, 강단과 추진력이 부족하다는 꼬리표가 붙었다. 도전하지 않았기에 도약의 기회가 없었고, 대중적 지명도도 쌓지 못했다. 대신 견제를 피하며 착실히 관록을 쌓았고, 늘 웬만한 위치는 차지했다. 그런 그가 이제 ‘내 정치’를 선언하며 거대야당 한나라당의 ‘얼굴’이 되겠다고 도전한다. 그의 정치역정은 아픔과 시련이 없는 탄탄대로였다. 정치입문 이후 그가 속한 정당은 민정당에서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바뀌었지만 그는 한번도 이 흐름을 거스른 적이 없다. 몇 차례의 결정적 고비 때마다 그의 선택은 항상 다수파였다. 그는 5·6공 시절 ‘실세’였던 박철언 전 의원이 이끄는 월계수회의 제2인자였다. 박 의원과 함께 북한에 밀사로도 다녀왔다. 그래서인지 ‘박철언의 오른팔’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러나 그는 14대 대선을 앞둔 92년 10월, YS에 반기를 들고 민자당을 탈당한 박 의원을 따라가지 않았다. 이후 YS는 그를 민자당 대변인과 총재비서실장, 대구시지부장으로 중용하며 두고두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대구·경북 지역엔 자민련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그는 “당이 어렵다고 떠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민자당을 고수했고, 총선에서 살아남았다. 16대 총선을 앞둔 2000년 2월, 한나라당 공천파동의 후유증으로 민주국민당의 창당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이었다. 이회창 총재가 공천에서 탈락시키자 한나라당을 뛰쳐나간 TK의 맹주 김윤환 전 의원은 그를 영입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 전 의원이 신당추진을 발표하는 날, 대구지역 원내외위원장을 끌어모아 이 총재쪽으로 ‘회군’했다. 그의 이런 선택을 두고 ‘권력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물’이라거나 ‘양지만을 추구한다’는 부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양지를 좇은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곳에 햇볕이 나를 따라왔다”고 항변한다. 어쨌든 그는 정치적 갈림길마다 ‘탁월한 선택’을 함으로써 차기 대권을 넘보는 정치지도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 정치입문 이전에도 그에겐 고비와 부침이 없었다. 아버지는 엄격하지만 자상한 교장 선생님이었다. 대학생인 아들을 무교동 낙지집으로 불러 소주잔을 기울이고, 함께 어깨동무를 하며 거닐 정도로 자상한 아버지였다. 서울 법대에 들어간 아들은 데모 한번 안 하고 4학년 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대학시절부터 노래 잘하고 술·담배 즐기며 당구·볼링 잘 치는 한량이었다. 지금도 골프는 핸디 15(87타)의 수준급 실력이다. “노무현과 맞장뜰 후보” 광주·대구·부산·서울 등지에서 검사로 일하던 그는 80년 32살의 나이에 청와대 정무·법무비서관으로 발탁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동향인 TK의 선배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는 ‘운’도 그의 출세를 도왔다. 그의 정계입문 과정은 그를 끌어준 선배 박철언씨와 판박이다. 그도 박 전 의원의 뒤를 이어 ‘검사-대통령 정무비서관-여당의원’의 정규코스를 밟았다. 음지가 들지 않은 순탄한 인생의 전형이었다. 그는 ‘점잖고 겸손하며 따뜻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많이 듣는다. 상처받지 않고 곱게 성장해 출세가도를 달려온 때문일까. 집안 분위기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부농인 할아버지가 가첩(집안의 내력을 담은 책)에 써준 글귀를 좌우명으로 간직하고 있다.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讓土壤 河海不擇細流).’ 큰 산은 작은 흙덩이도 마다하지 않고, 큰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이 글귀를 새기며 정치적 포용력을 길렀다. 그에겐 젊음이 무기다. 그러나 세대교체론은 입에도 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노·장·청의 조화’를 강조하며 “나이가 많으니 나가라는 식의 인위적 세대교체와 물갈이엔 반대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한나라당 의원의 60% 이상이 60대다. 세대교체를 주장하는 순간 그들을 죄다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50대 기수론’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싶지만 그러기 어려운 한나라당의 현실이 그에겐 고민이다. 대신 ‘노무현 대 강재섭’의 대비효과를 통해 ‘젊은 지도자’의 이미지를 확보하려 한다. 그의 주요한 경선전략도 ‘노무현과 맞장 뜰 유일한 후보’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는 올해 55살. 노 대통령보다 2살이 젊다. 젊음의 코드가 같다고 노 대통령을 칭찬한 것도, 정치하는 방식의 채널이 다르다고 비판한 것도 다 이런 까닭에서다. 그의 외아들 병수(26)씨는 최근 공익근무요원 근무를 시작했다. 원래 군입대를 면제받았지만 지난 1월 재신검 신청서와 자원입대를 신청한 끝에 ‘가까스로’ 입대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장래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아들의 ‘효심’이었다. 그의 여의도 사무실에는 ‘비젼 2010’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그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