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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반도 평화, 군축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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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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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적대 해소한 10·13 북미공동성명… 동북아 안정 도모하며 관계정상화로

‘10·13 북미공동성명’은 지난 50여년간 계속된 북한-미국 사이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한반도에서의 ‘전쟁상태’를 종식시키며, 동북아에서의 군사적 불안정을 해소하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사변적” 의미를 지닌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이루어진다면 현안문제 타결과 관계정상화 등 양국간 “새로운 관계”의 출발을 선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변적” 의미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북-미간에 반드시 합의해야할 몇 가지 핵심 의제가 있다. 이 합의는 적대관계 종식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미간 적대관계의 시원(始源)인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키는 것이다. 현재까지 북한은 북-미간 평화협정을 주장해왔다. 협정의 주체는 북한과 미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이에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동맹국 남한의 정권적 차원의 이익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미국으로서는 이번 공동성명에서 명기된 바와 같이 4자회담의 틀 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것이다. 차선책으로 남북간, 그리고 북-미간 평화협정을 동시에 체결하고자 할 가능성도 있다. 그것도 어려울 경우 미국은 평화협정의 미체결 상태에서 페리 프로세스의 마지막 단계로서의 북-미수교를 통해 한반도 전쟁의 실질적 종결을 제시할 가능성도 있다.


새로운 관계는 선언적 의미에 가까워

(사진/50여년간 갈등을 청산하는 북한과 미국의 악수.지난 10월10일 백악관에서 조명록 북한 국방위 제1부위원장과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악수를 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의 태도다. 북한으로서도 현재 북-미수교 등 교차승인이 자신의 체제를 확고히 보장하는 실질적인 방안임을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이러한 대안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결국 러시아와 일본처럼 ‘선수교 후평화협정 체결’의 순서를 밟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핵심 의제는 북한의 핵관련 의혹들이다. 이 문제는 현재 제네바기본합의의 틀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 “금창리 지하시설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제거했다”고 할 만큼 핵문제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만족할 만한 상태이다. 남은 문제는 북한의 ‘과거 핵 활동에 대한 투명성’ 보장이다. 북한의 ‘과거 핵’에 대한 투명성 보장과 관련해 북한과 미국은 94년 10월 제네바 합의를 통해 이미 경수로의 주요 핵심 부품의 인도 이전에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조처를 취한다고 명시해 사실상 ‘특별사찰’을 실시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합의문에서 ‘특별사찰’이라는 용어는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북-미간 해석의 차이가 존재한다. 미국은 합의문 조인 당시 북한이 특별사찰을 받기로 이면 협약(confidential minute)을 맺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한은 유엔대표부를 통해 “군사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은 불가”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현재까지 국제사회에서 특별사찰이 실시된 경우는 루마니아와 이라크 단 두 경우뿐이다. 루마니아는 1992년 5월 민주화된 뒤 자신의 투명성을 밝히기 위해 ‘자발적’으로 IAEA에 플루토늄 분리작업에 대한 특별보고서를 제출하고, 이를 검증하는 사찰을 요청했다. 이라크는 ‘강제적’ 사찰을 받았다. 걸프전 패배로 수모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뒤 아직 어느 국가도 ‘강제적’ 특별사찰을 받은 일은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북한은 미국이 심각하게 문제삼지 않는 한 특별사찰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특별사찰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 높아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미국도 북한이 일본 등에 핵무장할 명분을 줄 수 있는 핵 실험 또는 ‘핵무기 보유 선언’만 하지 않는다면 북한 정권·체제 생존 전략에 큰 지장을 초래할 특별사찰을 예정대로 강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핵동결이 검증가능한 한 만족을 표명할 것으로 보인다.

페리보고서가 강조하듯이 “미국 대북정책의 핵심은 핵뿐 아니라 장거리 운반수단의 개발을 저지하는 것”이다. 미국은 1998년 8월31일의 북한 미사일 실험 발사는 ‘누군가’를 위협하기 위한 동기 외에 다른 요인들이 숨어 있을 가능성 또한 간과하고 있지 않다. 즉 생존을 담보하기 위한 ‘공격적 수세전략’, 미국이 기본합의 사항 이행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데에 대한 불만의 표현, 외국의 미사일 고객들에 대한 북한 미사일 기술 과시 등이 그것이다.

미국은 또 거의 유일한 주요 외화원으로서 미사일(부품 및 기술) 수출은 북한에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법리적으로 북한의 주권에 해당하는 사안이다. 이번 공동성명에서 “양국관계가 주권에 대한 상호존중과 내정불간섭의 원칙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한 대목은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국내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대인 요인’ 등을 고려하고, 또한 비밀스러운 미사일 수출은 탐지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매수’(買收)를 포함하는 ‘정치적 해결’을 제시·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직접적인 매수는 미국 정부가 “악행을 보상한다”는 미국 내 보수세력의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적다. 대신 한국, 일본, 이스라엘 등의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인도주의적 지원을 강화하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북-미 관계의 진정한 개선을 위한 걸림돌이 되는 대량파괴무기는 핵과 미사일뿐이 아니다. 바로 생·화학무기 문제가 남아 있다. 특히 이 문제에는 남한의 안보계산이 개입한다. 그러나 미국은 핵·미사일 문제 해결에 장애가 된다면 이를 외교적 수사로 처리할 것이다. 남한은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스커드-C, 로동 1·2호 등 기존의 수단으로도 생·화학무기가 운반될 수 있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운반수단의 장거리화만 저지해 타격거리에서 벗어난다면 일차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남한과 미-일간의 입장 차이이기도 하다.

더구나 미국은 이와 관련해 또 하나의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다. 미국은 서방의 여러 가지 추측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생·화학무기 보유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입증하기도 쉽지 않다. 더욱이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할 경우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미국 국내여론에 시달릴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때문에 문제제기 자체를 꺼릴 수도 있다. 결국 북한의 생·화학무기는 관련국들과 이해관계의 공통부분을 취하는 식의 타협이 이루어질 개연성이 높다.

테러국가에 묶어들 명분과 실리 사라져

(사진/북미관계가 진전되더라도 주한미군은 남한에 계속 주둔할 전망이다)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는 그리 큰 난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긴급수혈을 필요로 하는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경제제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남한과의 경제협력도 미국시장에 접근이 불가능한 ‘미국의 제재’하에서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다. 미국도 대량파괴무기 문제가 해결된다면 지난 10여년 테러와는 무관하고 이번 공동성명에서 “테러를 반대하는 국제적 노력을 지지 고무하기로 합의”한 북한을 굳이 테러국가에 묶어둘 명분과 실리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북한에 30여년간 체류중인 일본 적군파 3명의 처리문제가 걸려 있다. 하지만 이는 리비아의 방식을 따를 공산이 크다. 19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 팬암기 폭파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아온 리비아는 1999년 사건용의자들을 중립국으로 보내 국제재판을 받도록 했다. 북한도 이들을 중국으로 보내 일본인 심판관이 주재하는 국제재판을 받도록 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북-미간 핵심 현안들이 타결된다면 경제제재 해제, 연락사무소 개설 등을 포함하는 관계정상화 등의 수순이 기대된다. 공동성명에서 보듯, “양국은 호혜적인 경제협력과 교류를 발전시키기 위해 협력”하며, “가까운 시일 안에 경제무역 전문가들의 상호방문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물론 경제제재 해제는 실질적으로 미 의회의 동의와 법개정을 필수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관계설정”이 갖는 정치적 의미와 최근 미국의 쿠바 제재 완화 분위기, 남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 등을 고려할 때 경제제재 해제는 자연스런 수순으로 간주될 것이다. 일본도 미국의 이니셔티브에 따라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결국 이와 같이 교차승인이 이루어지면 동북아는 ‘뿌리깊은 역사적 적의(敵意)’를 상당부분 해소한 ‘보편경쟁의 체계’로 전환될 것이다. 이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 가지 남는 문제가 있다. 한반도 문제의 중심에 있는 주한미군 문제다. 미국은 북-미관계가 진전될 경우에도 주한미군을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는 ‘힘의 공백’을 야기할 중국-일본간 군비경쟁, 중국의 지역적 패권국으로의 부상, 그리고 주일미군 철수에 대한 압력 증가와 그에 따른 일본의 군사적 독자노선화 가능성을 높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모두 미국의 ‘근본이익’에 반하는 것들이다. 특히 ‘보편경쟁’의 시대로 회귀한 세계질서가 동북아에도 스며들 경우 남한(특히 통일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긴밀해져 미국과 일본의 이해에 반하는 연합이 형성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때문에 미국은 이에 대한 예방적 대처 수단으로 미군의 남한 주둔을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당국자들의 평화의지 뒷받침돼야

클린턴 대통령은 올해 9월24일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기고문을 통해 “아시아에 전진배치된 미군의 현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주둔미군의 임무가 단순히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안정을 위한 균형자적 역할을 수행해 위험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확히 했다.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긴장이 완화되고 중국이 계속 개방되더라도 주둔미군을 철수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문제는 북한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다. 주한미군과 관련한 북한의 태도는 92년 1월22일 김용순-캔터 회담을 기점으로 사실상 정리되었다. ‘전쟁방지와 역할변경을 전제한 주한미군 용인’이 핵심 내용이다. 북한이 대남한 대미국 관계개선의 조건으로 늘 제시되던 주한미군 문제가 이번 공동성명에서 명시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북한이 주한미군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것이며 남한과 미국간의 문제라는 법리적 접근을 묵인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남한을 포함하는 3자 또는 4자회담의 형식을 빌려 입장을 정리하려는 복안이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6·15 선언 이후 남한 내에서 알려진 바와 같이 주한미군의 지역안정자적 역할을 북미가 묵시적 합의한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 전략’의 일환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한반도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아니다. 평화협정 등을 통해 북-미 남북간 적대관계가 해소된다 해도, 이에 대한 실질적인 담보와 협정당사자간의 평화 의지가 없을 때는 휴짓조각에 불과하다. 평화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군축이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군축에 대한 미국의 접근은 냉전구조 해체와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주한미군 철수 및 군산복합체 문제와 관련해 조명되는 것이다. 기존 군사 동맹국들과의 군사 협력 관계를 유지·발전시키고자 하는 미국은 남한과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철수하지 않고 미국의 이해를 보장하는 첨병으로 계속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의 조속한 군축은 동북아에 전진 배치된 미군의 효용성과 정당성에 대한 주변국들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켜 미국의 세계 군사전략에 차질을 빚게 될 수 있다.

한반도 군축에 있어 또 하나의 걸림돌은 군축에 사활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방해이다. 군축은 전투 인원뿐 아니라 현재 보유하고 있는 군사장비의 감축을 의미한다. 만약 한반도에서 군축이 실현된다면, 미 군산복합체는 매년 수억∼수십억달러의 무기 및 부품을 판매하고 있는 주요 시장 하나를 상실한다. 더구나 탈냉전으로 군산복합체의 경영상태가 불량한 상태다. ‘참여와 확산 전략’을 통해 경제부흥을 해외시장에서 찾는 미국 정부가 상당 규모의 미국의 독점 시장을 포기하기는 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세계 무기 시장에서 확보하고 있는 압도적 우위는 미국의 세계적인 개입 능력을 공고히 해줄 것임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하다.

군산복합체는 한반도 군축을 거부한다

(사진/북한은 북-미수교를 통해 체제를 확고히 하고자한다.조명록 부위원장이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기에는 미국 국내정치까지 복잡하게 개입돼 있다. 민주국가인 미국에서의 정치권력은 선거에서의 승리를 통해 유지 또는 창출된다. 그런데 선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상황은 ‘일자리, 가격, 생산, 성장, 삶의 기준, 경제적 안전’의 문제를 지배하는 미국 내 대기업들의 경영성과에 의해 주로 결정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부의 주요 기능은 기업인들이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일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의 정권적 차원에서의 이익을 고려할 때도 조속한 한반도의 군축은 바람직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더욱이 미국 대기업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무기생산 자본이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국내 무기생산 자본의 이해관계에 부합하지 않는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어렵다. 이들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동북아 및 한반도의 현상유지라는 미국의 국가이익과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면 미국 정부로서는 한반도 군축에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과 정치·군사적 신뢰가 구축된다 해도 미국으로서는 군축을 가능한 한 지연시키려고 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북-미관계 개선과 평화체제 구축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막대한 군비 지출과 대규모 병력의 존재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것이다.

박건영/ 가톨릭대 교수/ 국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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