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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대권을 향한 박근혜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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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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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입문 3년 만에 야권의 막강 파워로 성장… YS와 제휴 모색하며 정치력 가다듬어

“박근혜 부총재가 ‘킹’은 못 돼도 ‘제2의 이인제’가 될 우려가 있다. 이미 정치적 야망을 펼칠 기회를 엿보며 명분쌓기에 나선 만큼 대책이 필요하다.”(이회창 총재의 한 핵심 참모)

“한나라당 간판이 걸려 있는 한 박 부총재는 결코 당을 떠날 수 없는 존재다. 누구보다 스스로 자기 처지를 잘 알고 있다. 당내 입지를 강화하려는 행동일 뿐이다. 괜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이 총재의 한 측근 의원)

‘공주머리’에 허리가 잘록한 드레스풍의 양장을 고집하는 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 그의 최근 행보를 놓고 한나라당 내부에서 이런 논란이 한창이다. 논란의 핵심은 박 부총재가 차기 대권을 향한 야망을 본격화한 것이냐, 아니면 당 안에서 생존공간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이 총재와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느냐이다.

이회창 총재와 부딪치며 분리의 선 명확히


이 문제는 한나라당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정권재창출 방안을 고심하고 있는 민주당이나 이른바 ‘영남 대권 후보론’을 내걸고 정치적 재기를 모색하고 있는 YS와 민국당 김윤환 대표도 박 부총재의 속뜻을 가늠하려 애쓰고 있다.

박 부총재의 정치적 위상이 차기를 둘러싼 이들의 정치적 계산법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선 현역 정치인 가운데 그의 대중 동원력은 최고 수준에 손꼽힌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권주자 물망에도 빠지지 않고 오르내리고 있다. 그의 영향력은 영남권에서는 더욱 막강하다.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내년부터 본격화할 차기 대권을 향한 각 세력의 쟁투 속에서 박 부총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특히 누구와 짝짓기를 하느냐에 따라 대권판도 자체가 뒤바뀔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뒷배경과 ‘좋았던 그때’를 그리워하는 대구·경북지역의 향수를 바탕으로 정치입문 3년 만에 정치권 전체에서 무시할 수 없는 ‘막강 파워’로 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박 부총재가 최근 일련의 행보를 통해 얻으려는 노림수는 무엇인가.

박 부총재의 정치적 행보에서 가장 큰 특징은 이회창 총재와 대립각을 확대하면서 이 총재와 점차 분리의 선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4·13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 총재에게 ‘팽’당한 뒤 절치부심하고 있는 김윤환 민국당 대표대행을 지난 9월7일 만났다. 이 만남 이후 두 사람의 움직임은 여간 심상치 않다. 박 부총재는 이회창 총재의 장외투쟁 노선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며 김덕룡 부총재 등과 ‘국회 등원론’(9월22일)을 주장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 총재와 차별화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자리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앞으로의 자신의 거취에 대해 뭔가 고심하고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허주(김윤환의 아호)는 비슷한 시기인 9월27일 민국당 대표에 선출되면서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 신망을 받는 참신한 인물을 영입해 큰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 대선에서는 어느 정당도 독자후보로는 정권을 창출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정치세력간 제휴와 연합, 지역연대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곁들였다.

두 사람의 이런 움직임을 놓고 정치권 안팎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던 ‘킹메이커’에서 소속 국회의원 2명인 초미니 정당의 대표로 전락한 김 대표가 차기 대선을 앞두고 박 부총재를 ‘카드’로 내세워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는 일에 착수했다는 분석이 나오고있다. 민국당의 다른 한 핵심 인사도 “민국당은 대선전에 뚜렷이 내세울 인물이나 세력도 없다. 결국 허주가 과거 인연과 대구·경북지역의 영향력 등을 매개로 박 부총재를 붙잡는 게 우리의 가장 효과적인 생존책이다”며 이런 분석에 무게를 더했다. 그러나 박 부총재는 지금까지 말을 매우 아끼고 있다. “그분(김 대표)의 여러 가지 정치적 지론을 듣고 미래지향적인 얘기를 나눴다. 그 가운데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다”는 정도로 그 가능성의 한 자락만을 내비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지난 10월4일 박 부총재가 YS의 대변인격인 박종웅 의원과 “조만간 YS와 만나기”로 약속한 사실도 박 부총재의 노림수와 관련해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대선판도에 변수로 작용… 민국당의 생존 카드

박 부총재는 그동안 YS와 예리하게 대립해왔다. 대립의 근원은 YS가 지난해 정부의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 지원을 “DJ의 장기집권을 위한 대선전략”이라고 비판하며 박 전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깎아내린 데서 시작됐다. 그뒤 박 부총재는 YS와 정면으로 맞섰다. 아버지를 욕하는 YS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인 이회창 총재에게 공공연히 불만을 토로하며 대립할 정도로 감정이 상당히 안 좋았다. 이런 두 사람 사이에 최근 화해 무드가 형성됐고, 이제 서로 만날 날을 정하는 문제만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관심은 YS와 박 후보의 행보가 묘하게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YS는 최근 민주산악회 재건을 본격화하면서 ‘반디제이, 반이회창’을 기본으로 한 영남 대권 후보를 적극 물색하고 있는 상태다. 박 부총재는 이 총재와 대립하며 영남 대권 후보를 주창하는 김윤환 대표와 만나는 등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여왔다. 더욱이 김 대표는 박 부총재를 만나기 며칠 전인 지난 9월2일 상도동에서 YS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이 앞으로 영남 대권 후보 물색 등 정치적 행보를 함께하기로 약속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영남에 기반한 잠재적 대권주자로 주목받는 박 부총재와 YS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물론 박 부총재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박종웅 의원이 먼저 보자고 연락해 만났을 뿐이며, 나에게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닌 만큼 YS든 누구든 못 만나겠냐는 생각에 YS를 만나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차기와 관련한 정치적 해석 등 너무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박종웅 의원쪽 설명은 다르다. 박 의원은 “박 부총재가 먼저 언론사 인터뷰 등을 통해 김영삼 전 대통령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쳐 진의를 타진했던 것”이라며 “최근 이회창 총재로부터 박 부총재가 당하는 고초 등 동병상련을 이야기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나는 만난 사실을 숨기려 했는데, 기자들이 먼저 알고 묻더라”며 박 부총재쪽에서 의도를 가지고 언론에 흘렸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박 부총재쪽에서 YS와의 만남에 더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상도동의 한 핵심 관계자는 더 의미있는 말을 전했다. “YS는 이미 이회창 총재로는 안 된다며, 차기 대권을 위한 여러 대안을 찾고 있는 중이다. 박 부총재쪽에서도 당연히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의 당내 입지 강화는 물론 다음 대선까지 고려해 우리쪽과 만나려는 것은 정치의 기본 아니겠냐.” 이 관계자는 특히 “전자(당내 입지 강화)든 후자(대선전략)든 YS와의 관계개선은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면서 “YS가 아직 지원할 사람을 정한 것은 아니지만, 박 부총재라고 대상에 제외될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대중적 인기는 높지만 당내 입지가 취약해 더 큰 야심을 실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박 부총재가 이 총재에게 가장 위협적인 YS와 손잡을 경우 양쪽 모두 손해볼 게 없다는 것이다. 잘 풀리면 차기 대선에서 공동의 활로를 모색해볼 수 있고, 일이 잘 안 돼도 박 부총재의 한나라당 내 입지가 강화된다는 진단인 것이다.

YS는 박 부총재를 이 총재의 대안으로 생각하나

(사진/박근혜 부총재의 정치적 야망과 YS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질것인가.곧 있을 두 사람의 만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결국 이런 전후사정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박 부총재가 말을 아끼고 있지만, 차분하고 냉철한 계산 속에 ‘영남 대권 후보론’의 틈새를 공략하며 대권을 향한 야심을 펼칠 기회를 잡기 위해 일련의 행보를 진행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총재의 한 측근 의원은 박 부총재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박 부총재를 단지 아버지의 후광에 기댄 ‘공주’로 폄하하고 간단하게 봐서는 안 된다. 그는 박 대통령 밑에서 사실상 10여년간 정식 지도자 수업을 받은 인물이다. 누구보다 냉철하게 정치적 흐름을 분석하고 자신의 꿈을 키울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결국 박 부총재의 최근 움직임은 한나라당 내에서 비주류 행보를 계속해 이 총재의 대안적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한편 YS나 김윤환 대표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인물들과 연대를 통해 몸값을 최대한 높이며 결단의 기회와 시기를 엿보는 나름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실제 YS나 허주 등 차기 구도를 구상중인 영남권 정치 거물들과 끊임없이 연계하는 것은 정치인 '외톨이'인 박 부총재에게 그야말로 든든한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나라당 부산 민주계 한 의원은 “설사 대권 도전까지는 못 가더라도 이 총재가 아닌 다른 영남권 주자를 내세워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YS와 허주를 만남으로써 이 총재로부터 상당한 정치적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 부총재에게 군침을 흘리는 세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박 부총재를 한나라당에 붙잡아두기 위한 이 총재의 양보와 배려도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 그동안 박 부총재의 ‘등원론’ 주장과 대구집회 불참 등에 대해 강한 불만을 터뜨렸던 이 총재쪽 핵심 인사들의 태도가 최근 급격히 바뀌고 있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이 총재의 핵심 참모들은 박 부총재와 설전을 벌였던 김기배 총장 등을 겨냥해 “총재 주변에 포진한 주류인사들이 박 부총재나 대구·경북 유권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정서를 무시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 박 부총재를 달랠 수 있는 방안 마련에 고심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맹형규(당 기획위원장), 이원창(이회창 총재 언론특보) 의원 등 이 총재의 최측근 의원들은 “이 총재가 그동안 박 부총재를 자주 만나지 못하는 등 서운하게 한 측면이 있다”며 “곧 박 부총재가 당에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만간 마땅한 자리가 마련될 것인 만큼 참고 행동을 자제해달라는 것이다. 그동안 당내 일부 인사들이 ‘박 부총재=제2의 이인제’라는 소문까지 퍼뜨려왔던 점에 비춰보면 상당히 달라진 태도다.

이와 관련해 이 총재의 한 핵심 참모는 “몰락한 구여권세력(허주나 YS) 등 박 부총재를 부추기는 집단과 박 부총재가 잘못 맞물릴 경우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면서 “박 부총재는 우리 당에서 지역 등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가 큰 인물인 만큼 반드시 대선 때까지 다독이면서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속사정을 이야기했다. 결국 박 부총재는 최근 일련의 차별화 행보를 통해 자신의 당내 정치적 입지를 한층 강화하는 등 나름의 이득을 챙기고 있는 셈이다.

이런 단기적 이익뿐이 아니다. 정치권에서는 박 부총재가 YS나 김윤환 대표 등과 접촉을 계속하면서 대권 판도가 어떻게 짜이느냐를 살피면서 이 총재와 한배를 계속 탈 것인지 다른 선택을 할 것인지를 조망할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박 부총재의 한 측근 인사도 “이 총재만 카드를 쥐고 있는 게 아니다. 계속 우리를 견제하고 억누르면 우리도 나름의 카드가 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배려와 정치판 전체 구도를 보면서 확실한 지분을 보장받는다면 이회창 총재를 지지하며 당내에 머물겠지만, 그렇지 않고 자꾸 성장을 억누를 경우 YS든 김 대표든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멍석’을 깔아주는 쪽과 함께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치력, 누가 멍석을 깔아줄 건가

물론 박 부총재의 이런 정치적 노림수를 가로막는 요소들도 많다. 이 총재가 언제까지 양보를 계속 할지가 우선 의문이다. 적절히 달래기는 하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충성을 강요할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다. 박 부총재가 급격히 성장할 경우 강재섭 의원 등 당내 수많은 경쟁자들과의 관계 설정도 문제가 된다. 또 현재 박 부총재의 몸값을 잔뜩 올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김 대표나 YS가 박 부총재를 실제 얼마나 중요한 ‘카드’로 사용할지도 의문이다. 보잘것없는 처지인 김 대표는 어쨌든 박 부총재에게 상당한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YS는 상황이 좀 다르다. 박 부총재는 최근 상도동 문턱을 드나들며 지지를 호소하는 수많은 대권주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영남 대권 후보’로 꼭 박 부총재를 밀어줄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셈이다. 상도동 한 핵심 인사는 “박 부총재도 원 오브 뎀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언제든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박 부총재의 정치력이다. 이런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해가며 야심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할 수 있느냐는 여전히 박 부총재의 몫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신승근 기자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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