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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여의도 기사님이 납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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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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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과 운전기사들의 천태만상 풍속도… 기밀사항 속속들이 알아 정치생명 좌우할 수도

정치인과 운전기사. 숱한 사연과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것 같은 이들이 내밀한 관계까 최근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최근 민주당 이훈평 의원이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돼 면허정지를 당한 사건은 정치인과 운전기사 관계의 한 단면을 드러냈다. 국회의원이 음주운전을 한 점은 ‘신선한 충격’으로 미화될 일이 아니라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적발 현장의 방송사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았더라도 이 의원이 순순히 음주측정에 응하고 경찰조사를 받았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네티즌들도 있다. 다만 새벽이 되도록 운전기사를 붙잡아두는 정치인들의 나쁜 관행에 비춰보면 이 의원이 기사를 일찍 퇴근시킨 부분은 ‘미담사례’다. 또한 ‘최규선 게이트’의 주인공 최씨의 운전기사 백아무개씨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최씨가 함께 찍은 사진을 빼돌려 거액을 요구하며 ‘뒷거래’를 시도한 사건은, 역시 운전기사가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잘 나가던’ 최씨의 꼬리가 잡힌 것도 백씨 이전의 운전기사 천호영씨와의 불화 탓이었다.

별정직 공무원으로 비밀 파일 공유

사진/ “나는 당신이 한 일을 모두 알고 있다.” 국회의원 운전기사들은 정치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꿰뚫고 있다.
정치인과 운전기사는 많은 비밀의 파일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의 육체적 생명을 다루는 것은 기본이요, 치부나 감추고 싶은 내막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 정치생명까지 좌우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운전기사들이다.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특별하지만 외부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부분을 취재하기 위해 전·현직 국회의원들의 운전기사들을 만나봤다. 의원 운전기사는 국가의 녹을 받는 별정직 공무원 신분이다. 이들은 통상 6·7급의 대우를 받지만 의원의 배려에 따라 4·5급의 좋은 대우를 받거나 9급의 박대를 당하기도 한다. 이들이 전하는 의원과 기사들 사이의 풍속도는 천태만상이었다.

민주당 현직 초선의원에 대한 얘기다. 이 의원이 처음 국회에 입성했을 때 의원 운전기사들은 대놓고 고개를 돌려 외면하면서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 의원이 운전기사를 9급으로밖에 대우하지 않았는데, 힘들게 일하는 운전기사를 홀대하는 의원은 의원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감지한 이 의원은 운전기사를 해고하고 자신의 조카를 데려와서 그에겐 5급 대우를 해주고 있다. 민주당 중진급 의원들의 기사들은 5급 대우를 받는 경우가 제법 있다. 한나라당 한승수 의원의 운전기사도 4급이다. 한 의원 기사는 “운전기사에게 높은 직급을 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국회의원이 그만큼 숨겨야 할 비밀이 많기 때문일 것”이라는 색다른 해석을 내놨다. 중진급 의원의 기사들은 외부로 알려지면 곤란한 비밀을 많이 알게 마련이고, 의원들이 기사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좋은 대우를 해준다는 것이다.

기사들이 쏟아내는 가장 큰 불만은 ‘비인격적 대우’였다. “우리에게도 가정이 있고 생활이 있습니다. 상당수 의원들이 종처럼 막 부려먹습니다. 술마시면서 새벽까지 기다리게 해놓고도 ‘수고했어’라는 말 한마디 없으면 입이 튀어나오고 운전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새벽에 출근했다 새벽에 퇴근하는 경우가 다반사며, 일요일도 없는 고달픈 생활이지만 육체적 고통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인간적 모멸이나 배려의 부족이라는 것이다.

사진/ 정치인의 운전기사들은 ‘막 부려먹는’ 정치인에게 불만을 느낀다. 운전기사는 수행비서이자 차량관리인이기도 하다.

아주 특별한 커넥션… 비인격적 대우도

기사들 사이에선 악명을 떨친 몇몇 의원들의 사례가 회자되고 있다. 수도권의 한 초선의원은 고스톱판을 벌이느라 날밤을 새우면서도 기사를 대기시키는 ‘악습’으로 악명높았다. 수도권의 또 다른 초선의원은 자정이건 새벽이건 거절하지 못하고 약속을 잡아 운전기사가 무척 피곤해했다. 자민련의 한 의원은 설날과 추석 때까지 운전을 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민주당의 한 고위당직자도 지난 설 때 사적인 일을 시켜 빈축을 샀다. 어느 의원은 바둑판을 잡으면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기사를 대기시켜 동료 운전기사들이 항의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김아무개 의원은 부인과 가족의 운전을 자주 시켜 기사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14대 시절의 얘기지만 한 의원은 카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운전기사가 통화를 끝내고 문을 열어줄 때까지 차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아 기사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이전보다 많이 줄어들었지만 택시를 타면 될 일인데도, 2차, 3차로 이어지는 술자리 끝까지 기사를 대기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다.

기사들은 “운전기사가 자주 바뀌는 의원은 문제가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고 입을 모았다. 기사들이 배겨나지 못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것이다. 민주당 동교동계 한 의원은 운전기사가 하도 자주 바뀌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네는 왜 그렇게 기사를 자주 바꾸느냐”고 꾸지람을 했다고 한다. 이후 그 의원의 운전기사는 지금껏 붙박이가 되었다. 한 여성의원도 기사를 자주 바꾸는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자신의 생명을 다루는 운전기사와 호흡이 맞지 않으면 함께 일하기 어렵다. 김태식 국회부의장은 예전엔 기사를 자주 바꿨으나 지금의 기사는 ‘롱런’하고 있다. 의원과 기사의 관계도 궁합이 맞아야 된다는 얘기다.

국회의원 기사들 사이에선 운전기사를 호되게 대했다 봉변당한 의원들의 얘기가 전설처럼 이어져내려온다. 김아무개 전 의원(13~15대)의 운전기사는 박대당한 데 불만을 품고 한강다리 위에 차를 세운 뒤 “의원님, 여기서 같이 죽읍시다”라고 협박했다가 이튿날 해고됐다. 경기도 지역의 한 중진급 의원은 초선시절 운전기사들에게 모질게 대했다가 재선에 도전할 당시 전직 운전기사 2명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낙선운동을 펼치는 바람에 결국 떨어졌다. 변호사 출신인 서울의 이아무개 전 의원의 기사는 과로로 뇌출혈을 일으켜 쓰러졌는데도 별다른 보상 없이 해고당하자 차량 운행일지를 들고 노동청으로 찾아갔다. 이 의원은 결국 수백만원의 합의금을 지급해야 했다. 충청권 한 의원의 운전기사는 지난해 가을, 지구당 앞에서 오토바이와 접촉사고를 냈다가 자신이 사고처리와 보상을 떠맡게 되자 불만을 나타낸 뒤 그만뒀고, 얼마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의원은 상가에 발을 디디지도 못했다.

기사들을 인간적이고 신사적으로 대해 호평을 받는 의원들이 더러 있다. 민주당 의원들의 기사 상당수가 이훈평 의원을 최고로 꼽았다. 이 의원의 운전기사는 ‘민비협’(민주당 수행비서협의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정시 출퇴근이 가능해 시간이 많다는 것이었다. 정동채·임종석 의원도 좋은 평가를 얻었다. 홍기훈 전 의원도 기사를 한식구처럼 대해 다른 기사들이 높게 평가했다.

그래도 운전기사는 의원을 잘 만나야

운전기사들이 사고를 치는 경우도 많다. 민주당 고위당직자인 한 의원은 부친상 때 들어온 조문객들의 부조금 수천만원을 운전기사가 통째로 낚아채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끙끙 속앓이를 해야 했다. 민주당 의원들의 운전기사들이 노래방에서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며 파출소 경찰관까지 폭행한 사건도 있었다. 지난해 한나라당 권아무개 국회의원 집 3인조 강도사건은 운전기사가 빚을 갚기 위해 저지른 범행이었다. 운전기사들의 도박은 아직 단절되지 않았다고 한 기사가 전했다. 국회의원회관 지하 대기실이나 당사 대기실 등에서 도박판이 자주 벌어진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단순한 놀이 차원이 아니어서 4월 들어서도 한 의원의 운전기사가 2천만원을 잃은 것으로 전해졌다. 국회엔 자체 경비단이 있어 관할 영등포경찰서 경찰관들도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하기 때문에 도박판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경력이 10년 넘은 고참 운전기사들은 정치인의 돈에 관한 얘기를 물어보면 입을 꽉 다물었지만 “알고 있는 얘기들을 모으면 책 한권은 족히 나올 것”이라고 여운을 남겼다. 그러면서도 “의원들이 기사들을 대하는 게 이전보다는 나아졌다”고 입을 모았다. 의원과 운전기사의 관계도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일까.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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