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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오, 필승! 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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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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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 재·보궐 선거 여야 총력전 그 뒤… 정국 주도권 잡기 안간힘 속에 완승 부담설도

임기 1년도 안 되는 국회의원을 뽑는 4·24 재·보궐 선거는 그 자체로는 정치적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새 정부 출범 2개월 만에 치러지는 첫 선거이고, 여야 모두 지도부 구성을 앞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미묘한 상황이어서 정치적 의미가 잔뜩 부여됐다. 이에 따라 이번 재보선은 앞으로 전개될 정국의 흐름을 가늠해볼 수 있는 풍향계로 의미가 격상됐다. 여야가 당력을 기울여 총력전을 펼친 것도 승리하는 쪽이 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4·24 재·보궐 선거 결과가 정치권 전반에 끼칠 영향을 짚어본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공천과정을 보면 3곳 모두 지구당 당원들의 상향식 공천을 거쳤다기보다는 사실상 지도부의 하향 낙점형식이었다. 어느 쪽이든 선거에서 패한 쪽은 지도부가 선거 패배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게 돼 있는 것이다.

민주당 덕양갑이 관건… 신·구주류 충돌


사진/ 4·24 재·보궐 선거 결과는 정치권 전반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20일 빗속에서 열린 고양 덕양갑 후보 연설회.(박승화 기자)
민주당으로선 다 이겨야 본전이다. 재보선 지역 3곳 모두 원래 민주당 의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2곳을 이기면 민주당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양천과 의정부에서 패하더라도 개혁정당과의 연합공천을 통해 유시민씨를 공천한 고양 덕양갑에서 이기면 신주류쪽은 할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덕양갑을 포함한 2곳 이상에서 지면 선거 패배의 후폭풍에 따른 격랑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재보선 완패는 민주당 신주류에게 악몽의 시나리오다. 먼저 지도부 인책론이 제기되면서 정대철 대표와 이상수 사무총장이 구석에 몰리게 된다. 선거 패배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불거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 대표가 광주를 방문해 ‘호남소외론’을 진화하려 안간힘을 쏟은 것도 이런 상황을 염려해서였다.

개혁정당과의 연합공천을 주장하며 신주류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천정배·신기남 의원도 흙탕물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고양 덕양갑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현장을 누빈 정동영 의원도 ‘약발’의 한계를 노출하면서 차세대 주자로서 스타일을 구기게 된다. 대선 이후 정치적인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던 정 의원은 재보선 선거지원에 뛰어들면서 ‘적극적인 역할’을 다짐하며 의욕적 행보를 보였다. 당내 일부에선 정 의원이 당권에 뜻이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신주류가 정치권 새판짜기를 염두에 두고 그려놓은 밑그림도 전면적 재검토가 불가피할 것이다. 신주류의 주축을 형성하는 수도권 의원들이 내년 총선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정치적 결단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신주류 관계자는 “재보선에서 완패하면 신당추진론은 완전히 동력을 상실하거나 적어도 상당기간은 탄력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개혁정당과의 연합공천에 반대했던 구주류쪽은 선거책임론을 제기하며 신주류쪽을 몰아붙일 것이다. 동교동계의 이훈평 의원은 신주류쪽이 잇따라 신당창당을 거론하자 “뜨거운 국에 혀를 한번 데어봐야 그 다음에 국물을 마실 때 조심하는 법”이라고 싸늘한 냉소를 보인 바 있다. 구주류는 지도부를 서둘러 구성하자며 조기전당대회론을 밀어붙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대의원 구조 아래 조기전당대회를 치르면 당권을 확실하게 장악해 지구당위원장직 폐지나 기간당원화 등 신주류의 당 개혁안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신주류쪽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현재의 민주당 대의원 분포상 당권을 놓고 구주류와 대결해 승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신주류 일각에선 재보선 승리를 전제로 구주류와 전면적인 당권투쟁에 돌입하자는 의견이 불거지기도 했다. 신주류쪽 한 관계자는 “정동영 의원을 내세워 구주류쪽과 당권투쟁을 벌이자는 방안도 일부에서 검토됐다. 재보선에서 2곳 이상 이기면 이 방안이 추진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재보선에서 승리할 경우 그 여세를 몰면 당권투쟁에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다는 얘기다.

노무현 대통령에 치명타 안길 수도

사진/ 여야 지도부는 당내 입지를 위해 재보선에 총력을 기울였다. 후보 연설회장을 찾은 민주당 정대철 대표(왼쪽)(한겨레 김봉규 기자)와 한나라당 지도부(이용호 기자).
민주당이 패배하면 노무현 대통령도 고민에 빠지게 된다. 내년 총선승리를 정치적 화두로 삼아온 그로선 재보선의 결과를 놓고 자신의 취임 이후 2개월을 되짚어볼 것이다. 국가 중요 기관장에 대한 인사와 대북송금특검법 수용, 이라크 전쟁 파병결정 등이 취임 이후 그가 내린 주요 정치적 결정이다. 하지만 인사에선 이른바 ‘호남소외론’이 불거져 재보선 쟁점으로 번졌고, 특검법 수용도 호남정서와 관련해 논란이 됐다. 정치권에선 노 대통령이 재보선 직전인 4월2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데 대해서도 호남정서와 연관지어 해석했다. 재보선 패배가 현실화될 경우 노 대통령은 큰 틀의 정국구상에 대한 근본적 고민에 부닥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이 2곳 이상에서 이기거나 적어도 유시민씨가 고양 덕양갑에서 승리할 경우 신주류는 개혁세력 연대의 효과를 내세우면서 개혁신당 추진의 가속페달을 밟을 수 있다. 천정배 의원은 “연합공천이 이뤄진 고양 덕양갑 선거 결과에 따라 여러 정치세력 간 합종연횡을 부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구주류는 발언권이 현저히 약화되면서 신주류쪽과 일정한 타협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당이 승리하면 보수파와 노장파의 목소리가 커지는 대신, 개혁파와 소장파의 목소리는 더욱 잦아들 수밖에 없다. 개혁파는 당이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당이 크게 바뀌지 않고도 선거에서 이겼다면 개혁을 요구하는 근거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개혁파는 당분간 보수파 의원들과 적절한 타협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김덕룡·이부영 의원 등 개혁파 중진들의 당내 입지는 한층 좁아지게 된다. 이들이 지도부에서 배제되면 내년 총선에서 공천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가 막히게 된다. 이 경우 이들은 당 외부의 개혁세력과 연합해 새로운 정치적 역할을 모색하려 할 수도 있다.

한나라당이 패배하면 지도부 인책론과 함께 대대적인 물갈이론이 불거지게 된다. 개혁파들은 이전보다 수위 높은 발언을 쏟아내면서 보수파와 노장파를 압박할 것이고 수도권은 물론, 영남권 의원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어날 수 있다. 한나라당 개혁파와 민주당 신주류쪽의 힘이 동시에 강화되므로 정치권 새판짜기의 현실성도 높아진다.

재보선 결과는 한나라당 지도부 경선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재보선에서 승리하면 서청원 전 대표가 좀더 이득을 볼 것이라는 게 당내 대체적 분석이다. 서 전 대표는 어쨌든 대선 이후의 혼란상태를 수습했다. 재보선을 치른 현 임시지도부도 서 전 대표의 ‘법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박희태 대표권한대행이 최근 서 전 대표를 지원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병렬 의원쪽도 득을 봤으면 봤지 손해볼 일은 없다. 반면 한나라당이 패배하면 강재섭 의원과 김덕룡 의원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당 지도부의 색깔을 바꿔 당을 일신해보자는 분위기가 일면서 50대임을 내세워 세대교체를 주장하는 강 의원이나 개혁파와 가까운 김 의원의 입지가 강화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지도부 경선 맞물려 의견 분분

한나라당의 재보선 승리가 단기적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경계론도 당 일각에선 나온다. 윤여준 의원은 “재보선에서 이기는 것은 좋지만 상황을 안이하게 판단하게 만들까 우려된다. 재보선에서 이겼다고 당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소홀히 한다면 지난해 지방선거와 재보선에 압승해놓고도 정작 대선에서 패한 것처럼, 재보선에 이기고 내년 총선에서 질 수가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재보선 참패가 위기의식을 높여 당의 변화를 촉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기대 섞인 분석도 일부에서 나온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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