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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아니 벌써 “호남은 쉰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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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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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의 홀대론 유포로 정치권 긴장… 정치지형 변화 맞물려 호남민심 잡기 골몰

강금실 법무부 장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이 합심해 민주당 동교동계를 밀어준다 잘 믿기지 않는 얘기다. 하지만 논란이 되고 있는 ‘호남 홀대론’의 맥을 짚어가다 보면 형식논리적으로 이런 식의 결론에 이른다는 게 민주당 신주류 일각의 주장이다.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일까.

행정자치부는 4월4일 전남도청 기자실로 ‘호남 출신 소외인사 보도 관련 설명자료’라는 문서를 보냈다. <광주일보>와 <전남일보> 등 광주·전남 지역 지방신문들이 4월1일자 행자부 1급 인사를 두고 집중적으로 ‘호남소외론’을 제기하자 진화를 시도한 것이다. 지방신문들은 ‘호남홀대론 현실화 우려’, ‘호남소외 너무한 것 아니냐’, ‘호남, 또 다른 차별’, ‘광주·전남 한명도 없고, 영남 11명 절반 이상’ 따위의 제목을 달았다.

노무현의 야심작이 동교동계 밀어준다


사진/ 노무현 정권을 선택한 호남민심이 흔들리고 있는가. 지난해 3월16일 광주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노무현 후보가 지지자들 속에서 기뻐하고 있다.(이용호 기자)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호남소외론’이 처음 불거진 것은 지난 3월11일 검사장급 이상 검찰 고위간부 인사 때였다. ‘잘 나가던’ 호남출신 간부들이 줄줄이 옷을 벗고, 검사장 승진명단에 호남출신이 한명도 끼지 못하자 호남지역 여론주도층은 청와대와 내각에 영남 인사들이 눈에 띄게 진출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호남소외론’을 전파했다. 이어 3월14일, 노 대통령은 대북송금 특검법을 전격 수용했다. 호남민심은 또 한 차례 꿈틀댔다. 3월26일 이창동 장관은 <광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광주를 문화수도로 육성하는 것에 대해 아직 이야기해본 적이 없으며, 정부 차원의 문화수도 육성 계획안은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후보시절 광주를 문화수도로 육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광주·전남지역 언론들은 ‘호남소외론’과 연결지으며 대서특필했다. 현 정권과 불편한 관계인 <조선일보>도 이 무렵 “봄은 왔건만 광주엔 봄이 없었다”라고 시작하는 광주민심 르포기사를 실어 민심악화를 강조했다.

사진/ 광주·전남 지역 신문들이 행자부 간부급 인사 직후 ‘호남소외론’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호남민심이 흔들리는 기류가 감지되자 청와대의 정찬용 인사보좌관이 3월28일 광주를 찾아 민심동향을 살폈다. 정 보좌관은 당시 지역 언론인들과 만나 “호남소외론은 기득권층이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인사문제를 지역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정 보좌관이 전북지역을 방문하지 않고 호남민심을 얘기한 데 대해 전북쪽에선 “전북은 호남이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전북지역은 인사에 대해선 광주·전남쪽만큼 불만이 팽배한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민심의 흐름은 광주·전남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와중에 행자부 간부급 인사에 대한 지역언론의 대대적 보도는 사실관계를 떠나 그동안 쌓인 ‘호남소외론’을 폭발시키는 ‘뇌관’ 구실을 했다. 공무원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지역신문이 이들을 취재원으로 삼아 기사화하면서 일반여론으로 확산되는 메커니즘이었다. 전남대 정근식 교수(사회학)는 “호남홀대론이 기득권을 침해당하는 일부 이해관계층의 여론에서 서서히 바닥민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는 경계지점쯤에 와있는 것 같다. 앞으로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민심이 급격히 악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예측했다.

호남민심의 흐름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예상되는 정치권 새판짜기나 신당창당 등 정치지형의 변화와 민감하게 맞물려 있다. 민주당 신주류쪽의 큰 틀의 구상은 지구당위원장직을 폐지하고 국민공천제를 실시해 호남지역에 기반을 둔 구주류 인물들을 ‘물갈이’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신당을 창당해 구주류와 정면승부를 걸겠다는 것이다. 두 가지 계획 모두 “호남민심을 동교동계가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자신감과, “호남의 민심이 지역주의적 선택이 아니라 개혁적 선택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전제로 깔고 있다. 호남민심이 돌아선다면 이런 전략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특검 수용·인사 소외 등 앙금 깊어져

사진/ “노무현 정권의 인사를 지역적 관점에서 바라보지 말라.”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과 정찬용 인사보좌관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청와대 사진기자단)
지역에 따라 조금씩 편차가 있지만 수도권의 호남인구는 적지 않은 숫자다. 민주당 의원들에겐 조금만 이탈해도 당락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민주당 의원들은 지난해 6·13 지방선거 때 호남 유권자들이 대거 기권하는 바람에 수도권에서 궤멸당한 경험을 아직도 공포스럽게 떠올린다. 김태홍 의원은 “호남민심이 출렁이면서 수도권 개혁파 의원들의 입지가 차츰 약화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개혁파들이 결단을 내리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과 장관들이 동교동계를 지원한다’는 우스개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노 대통령의 특검법 수용, 강금실 법무부 장관의 검찰인사, 김두관 행자부 장관의 간부급 인사, 이창동 문광부 장관의 문화수도 육성계획 부인 등이 어쨌든 호남민심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고, 결과적으로 민주당 신주류의 힘을 약화시키는 대신 동교동과 구주류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신주류 의원들은 호남민심 악화를 얘기하면서 15대 총선 때 자민련의 경우를 예로 든다. 1995년 김종필 총재가 민자당에서 쫓겨날 당시 동조 의원이 5명에 불과했지만 충청민심이 악화되면서 이듬해 총선 때 자민련은 50석이 넘는 의석을 차지했다.

신주류의 핵심인 천정배 의원도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보였다. 천 의원은 검찰인사 이후 호남여론이 악화되자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을 찾아가 “호남민심을 어찌하려고 하느냐. 검찰에서 호남출신을 배제한 것은 부당하다”고 강하게 항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천 의원은 이후 기자들에게 “검찰인사에서 호남인사를 배제한 것은 정치적으로나 원칙적으로나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호남민심의 악화를 차단하기 위한 시도로 해석된다. 김두관 행자부 장관과 절친한 사이인 김태홍 의원도 행자부 간부급 인사 직후 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왜 지역안배를 하지 않았느냐”고 따진 것으로 전해졌다. 김 의원의 참모는 “집토끼를 방치한 채 산토끼만 잡으려다가 집토끼마저 다 놓친다”고 말했다.

호남민심의 실체는 뭘까. 실제로 호남민심이 노무현 정권에게서 마음을 거두고 있는 것일까. 지역신문이 일부 사실을 왜곡하거나 부풀리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이를테면 행자부 간부급 인사에 대한 행자부쪽의 설명은 다르다. 박승주 재정경제국장이 청와대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기획운영실장(1급)으로 승진하는 등 호남출신 승진대상자 3명이 모두 승진했는데도 지방지들이 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완섭 행자부 인사계장은 “승진대상 인물군에 호남의 인적자원이 부족했다. 사람이 없는데 어찌하겠느냐”고 하소연했다.

문제는 검찰인사 등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고, 지역언론의 대대적 보도가 이어지면서 어쨌든 바닥의 지역민심도 이런 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순천기독청년회 이학영 사무총장은 “호남소외론이 눈덩이처럼 커져 실제의 민심으로 둔갑할 가능성이 우려되는 대목”이라고 지적한다. 지역신문이 이런 식의 보도를 하는 까닭에 대해 지방지 기자출신인 민형배 연구원(전남대 언론홍보연구원)은 “검찰이나 행자부 고위간부의 인사는 보통 호남인의 삶과 직접적 관계가 없다. 지방언론이 지역 기득권층의 이해를 대변해 민심을 왜곡한다”고 설명한다. ‘지역 기득권층과 지역언론의 유착관계’가 실제의 민심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득권층의 반발인가, 바닥민심의 이반인가

사진/ 지난 3월7일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당시 김각영 검찰총장과 검찰 수뇌부 인사안을 협의한 뒤 악수를 하고 있다.(한겨레 이정용 기자)
지역언론의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호남소외론’을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한 네티즌이 “호남을 소외시켜야 경상도에서 표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제 ‘노통’에 대한 기대를 접자”고 주장하자 금세 반론이 나왔다. 토박이 광주시민이라고 밝힌 이는 “기득권층 몇명이 자신들의 이해를 총족시켜주지 않는다고 임기 1개월 만에 ‘홀대론’을 내뱉고 있다. 냄비근성을 버리자”고 공박했다. 이런 식의 논란은 호남출신 국회의원들의 홈페이지 게시판으로도 번지고 있다.

호남민심이 복잡한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으나 특검법 수용, 호남인사 소외 논란, 이라크 파병 등의 결정에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영남쪽에 손을 내밀어 전국정당화의 교두보를 마련하면서도 호남민심을 아울러야 하는 이중의 과제가 노무현 정권 앞에 놓인 셈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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