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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언론개혁 엔진이 헛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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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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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사장 선임 파동 과정 등서 잇단 파열음… 대언론 긴장 풀어지고 정책 주무부처 엇박자까지

사진/ 노무현 정부의 언론개혁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노 대통령은 지난 3월29일 청와대 연무관에서 열린 대통령 비서실 직원 워크숍에서 언론과의 긴장관계를 주문했다.(청와대 사진기자단)
김대중 정부에서 언론사 세무조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청와대 소식에 정통한 동교동계의 한 핵심 의원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언론개혁을 하려는 겁니까. 언론개혁의 프로그램은 있는 것이고, 이를 실행할 사령탑은 있는 겁니까.” 이에 대해 그는 “청와대 안에 ‘보이지 않는’ 사령탑이 존재한다. 세무조사와 더불어 곧 언론개혁 프로그램이 가동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사령탑 존재 자체에 의문이 들 정도로 김대중 정부는 무기력했다. 세무조사로 그저 일회성 타격을 가했을 뿐, 진정한 언론개혁에는 근접도 하지 못했다.

언론개혁이 언론장악 음모로 공격받아

사진/ 한국방송 사장 선임 파동은 노무현 정부 언론정책에 흠집을 남겼다. 노 대통령이 4월2일 국회 국정연설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도 똑같은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 정부의 언론대책을 둘러싸고 사회적 파열음이 커지면서 “언론개혁의 본질이 아닌 엉뚱한 문제로 힘을 소진하고 있다”는 등의 미숙함과 무능을 지적하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서동구 한국방송사장 선임 파동을 계기로 노무현 대통령의 진정성이 의심받는 상황으로까지 몰리게 됐다. “언론 바로세우기가 아니라 언론장악 음모”라고 공격받고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도 답답해하고 있다. 4월3일 오전 청와대에서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기에 앞서 긴 한숨을 내쉬듯 “취임 후 어제가 최악의 날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국회 국정연설에서는 “(사장 인선에) 개입한 적 없다고 했는데, 오늘 보니 거짓말한 것 같아 낯이 뜨겁다”는 등의 말로 사과의 뜻도 비쳤다. 청와대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을 넘어 격노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노 대통령의 일부 언론에 대한 ‘항전 의지’는 여전한 것 같다. 노 대통령은 3월29일 청와대 연무관에서 열린 대통령 비서실 직원 워크숍에서 “어렵게 대통령에 당선돼 한국 언론질서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는데 여러분 중 일부는 기자들과 술 마시고 헛소리하고 나가서는 안 되는 정보를 내보내고…. 정말 배신감을 느꼈다”고 토로하면서 청와대와 언론의 긴장관계를 주문했다. 노 대통령의 이런 언급은 비서실에서 미리 작성해준 원고문안에는 없던 것으로, 최근 일부 언론에 ‘청와대 비서진 월급인상을 위한 계약직 전환 검토’가 보도된 것이 직접적인 촉발 계기였다.

계약직 전환 문제는 노 대통령과 동고동락하거나 재야단체에서 활동해온 비서관·행정관들의 경력이 공무원법상 전혀 인정되지 않아 대부분 ‘1호봉’에 머물 수밖에 없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검토하던 것으로, 청와대 안에서도 그 내용을 알고 있던 사람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언론과의 일전을 앞두고 흐트러진 내부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긴장감을 불어넣을 필요성을 느꼈을 법하다. 그러나 자체 조사결과 누설된 곳이 청와대가 아니라 계약직 전환을 실무적으로 검토하던 행정자치부인 것으로 추정되자, 긴장시킬 대상은 공직사회 전반으로 넓어졌다.

노 대통령은 4월2일 국회 국정연설에서 “언론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므로 위험하다”는 인식을 재확인하고 “몇몇 언론사가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더욱 그렇다”고 일부 언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내비쳤다. 노 대통령은 연설문 작성 회의에 앞서 “코에서 단내가 나네요”라며 고단함을 표시하면서도 연설준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윤태영 연설담당비서관은 전했다.

그런 점에서 청와대 관계자는 “언론개혁의 총사령탑은 바로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라고 표현했다. 언론개혁 프로그램은 대선과정 등을 겪으면서 노 대통령 스스로가 가장 깊게 고민해왔고, 대통령의 의지가 가장 강한 추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해석이다.

언론개혁을 일선에서 집행할 진용도 어느 정도는 갖춰져 있는 상태다. 이해성 청와대 홍보수석,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 조영동 국정홍보처장,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등이다.

노 대통령 말고는 원군이 없네

사진/ 한국방송 노조원들이 서동구 전 사장의 출근을 가로막고 있다.
최근 이해성 홍보수석은 우선 현행 법제도 안에서 할 수 있는 ‘신문시장 정상화’와 관련된 방안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내용 중에는 △공정거래위원회를 통한 신문고시 준수 감독 △언론사 세무조사 정례화 △신문 판매시장 정상화를 위한 공동배달제 지원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창동 장관도 기자실 폐쇄, 사전 취재허가제를 발표하며 포문을 열었다. 강철규 위원장은 2001년 김대중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으면서 신문고시 부활을 주도한 인물이다. 강 위원장 인선은, 노 대통령이 인수위 시절 공정위의 언론사 과징금 유예 처분을 질책하며 감사원 감사가 이뤄지도록 한 것과 맥락이 닿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각 분야가 각개약진할 뿐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창동 장관의 ‘문광부 홍보업무 운영방안’도 공무원들에게 취재 대응 뒤 보고 의무를 지우는 등 몇몇 항목에서는 불필요한 파장을 일으킨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장관은 “이번 홍보안 작성은 공보실 직원들과 4일간의 토론을 거쳐 내가 한 것”이라고 ‘즉흥성’을 인정했다. 또 국정홍보처가 부처 공보관 회의를 통해 언론취재 시스템 개선방안을 확정짓는 과정에서 조영동 국정홍보처장과 이창동 장관 사이에 적잖은 시각차가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서동구 한국방송 사장 선임 파동은 노무현 정부의 도덕성에 큰 흠집을 냈다. 민주노동당은 “‘한국방송 사장 선임과 관련해 일체의 간섭이 없었다’는 노 대통령의 호언장담은 취임 후 최악의 거짓말”이라고 아픈 곳을 후벼팠다. 서동구씨 선임 과정을 되짚어보면, 투명한 인사 시스템을 역설해온 노 대통령이 스스로의 원칙을 무시함으로써 역풍을 자초한 측면을 부인하기 어려우나, 청와대쪽 또한 얼마나 느슨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노 대통령은 4월2일 김영삼 한국방송 노조위원장 등을 만나 “방송을 장악할 생각은 한 적도 없었고, 오히려 노조나 시민단체에서 환영받을 만하다고 생각해 선의로 서동구씨를 추천했을 뿐인데 정말 난감했다”고 순수성을 강조했을 뿐이다. ‘노심’의 전달통로로 알려진 이기명 문화언론특보는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다. 한번도 사욕을 부려본 적이 없는데, 순수성이 훼손돼 마음이 아프다. 15년 동안 노 대통령의 후원회장을 지내온 사람으로서 짊어져야 할 멍에로 생각한다”고 말했고, 정동채 의원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을 회피했다. 청와대에서는 서동구씨 선임을 둘러싸고 내부 논란이 있기는 했으나, 노조쪽의 반발을 “노조와 가까운 사람이 사장이 되지 못한 데 따른 것” 정도로 여기고 강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언론개혁은 장기과제일 뿐인가

서동구씨 사표 제출의 직접적 계기가 된 <조선일보> 보도 과정을 봐도 관계자들은 긴장이 풀린 상태였다. 청와대 한 수석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이 서동구씨를 모시려고 ‘사고초려’했다”고 천기를 누설했다. 서동구씨는 4월1일 지명관 <한국방송> 이사장 연구실로 찾아가 바로 옆방에 <조선일보> 기자가 있는 것도 모른 채 “노 대통령이 방송쪽을 맡아달라고 말했다”고 말해 스스로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당분간 노 대통령은 언론개혁의 속도를 조절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이 4일 “언론과 국민 스스로가 시대의 기운처럼 일어나야 할 문제이지 정책을 내놓고 깃발을 흔드는 것은 언론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언론개혁을 장기과제로 설정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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