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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박창식의 노무현 읽기] 더 솔직하게, 더 직설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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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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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곤욕 치른 사실화법… 이중성 거부하는 결기는 좋지만 말실수와 꼼수는 줄여야

노무현 대통령의 솔직한 직설화법이 또다시 탈을 냈다.

노 대통령은 4월2일 첫 국회 국정연설에서 이라크전 파병 문제를 특유의 화법으로 자세하게 설명했다. 몇 대목을 옮겨보자.

“…많은 의원님들과 국민들이 파병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번 전쟁이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번 전쟁에 우리가 파병을 할 경우 장차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려 할 때 이를 반대할 명분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명분론을 전제로 한 현실론입니다. …명분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명분이 아니라 현실의 힘이 국제정치를 좌우하고 있습니다….”

일부 신문들은 이 발언을 비판했다. 한 신문은 “이라크전에 명분이 없지만 현실적 필요 때문에 파병한다고 대놓고 이야기하면 미국이 한국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겠느냐”며 “노 대통령의 발언에는 외교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좀더 많은 외교 전문가들의 견해를 모아보면 노 대통령의 발언이 미국을 기분 상하게 할 정도로 외교적 문제점을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솔직한 화법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킨 것만은 분명했다.


참모들의 탄식 “굳이 그렇게까지…”

사진/ 직설화법이 또 문제가 됐던 국회 본회의장 국정연설. 역대 대통령들은 노 대통령과는 달리 전통적인 추상어법과 에두르는 선문답을 즐겼다.(이용호 기자)
노 대통령은 같은 연설에서 언론 문제도 자세히 언급했다.

“…언론은 또 하나의 권력입니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입니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위험합니다. 더욱이 몇몇 언론사가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동안 대통령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던 언론의 편파적 보도에 대해서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사정권이 끝난 뒤에도 몇몇 족벌언론은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를 끊임없이 박해했습니다….”

이 발언은 신문시장의 75%가량을 과점한 조선·중앙·동아일보(흔히 조·중·동이라고 부름)를 겨냥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연히 해당 신문들은 “대통령의 언론관에 문제가 있다”, “대통령이 언론에 적대감을 드러냈다”며 노 대통령을 비판했다. 이 대목에는 노 대통령의 참모들 가운데서도 탄식의 목소리들이 나왔다. 한 참모는 사석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해서 평지풍파를 일으킬 필요가 있느냐”며 회의론을 폈다.

노 대통령은 사실 화법과 말실수 때문에 숱하게 곤욕을 치렀다. 후보 시절 한 유세에서는 “남북관계만 잘되면 다른 것은 깽판쳐도 된다”고 말했다가 ‘깽판’ 용어의 부적절성을 집중 공격받았다. 심지어 대선 하루 전 유세에서 “속도위반하지 말라. (정몽준 대표가 차차기에 후보로 나서려면) 추미애·정동영 의원과 경쟁해야 한다”고 연설했다가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의 공조가 깨지는 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때와 장소를 잘못 선택했다는 의미에서의 말실수는 잘못된 것이며, 따라서 되풀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지난번 국회 국정연설 말미에 원고에도 없이 즉석에서 한국방송 사장 임명 문제를 자세히 이야기한 것 따위가 이런 범주의 ‘때와 장소’가 의문스러웠던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소소한 말실수 문제와 달리 노 대통령의 직설화법은 나름의 독특한 문화적·정치적 코드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근본적으로 볼 때 노 대통령의 직설화법은 “솔직한 게 왜 문제인가”라는 반문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즉, 솔직한 게 문제라면 에둘러서 선문답을 하라는 이야기냐,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오기가 그의 화법에 묻어난다는 것이다.

에두르기가 최고는 아니다

일본 문화를 논할 때 흔히 혼네(本音·본심)와 다테마에(建前·바깥으로 내놓는 명분)가 다른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 사회도 그 점에선 일본과 비슷하다. 좋은 일이 생기면 기쁨을 표현하기보다는 “표정 관리하라”는 조언이 나오고, 속이 상해도 “꾹 참으라”고 하지 않는가.

노 대통령의 직설화법은 이러한 이중성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기(結氣·성이 나 과단성 있게 내어지르는 기상) 비슷한 것으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왜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는가, 내가 표현할 터이니 너도 표현해라. 그리고 생각이 다르다면 맞붙어 토론해보자고 하는 식이다. 내놓고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담합해 뒤통수를 때리는 일은 하지 말자는 것이 노 대통령식 코드로 보인다는 이야기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지적대로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은 노 대통령처럼 말하지 않았다. 또한 대부분의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들도 노 대통령처럼 말하지 않았으며, 대신 전통적인 추상 어법과 에두르는 선문답을 즐겼다. 그러나 그러한 에두르기가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효과를 발휘해 성공한 대통령들을 연속 배출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남들이 그렇게 했으니까”를 노 대통령에게 들이댈 이유는 없는 셈이다.

노 대통령의 직설화법은 그의 정치적 성장과정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태생적으로 비주류 인생이던 그는 비주류적 패러다임(그는 80년대 변호사 시절에 운동권 학생들로부터 의식화 학습을 처음 받았다)을 익혔으며, 그 패러다임을 대체로 굽히지 않은 채 대통령 자리를 거머쥐기에 이르렀다. 대다수의 비주류 출신 인생들이 주류 반열에 오르기 위해 출신성분에 물을 타거나 주류 가치관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모습과 그는 달랐다.

그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애초의 소신대로 국정을 바꿔보겠다는 믿음이 굳은 편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이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 기준으로 볼 때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척하면 통하는’ 지배 이데올로기 상품들과 그의 비전이 좀 다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최대한 자세하게, 그리고 좀더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들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클 수밖에 없다.

서동구 사장 임명 어물쩍 하려다 들통

사진/ 후보시절 광주의 한 시장을 방문한 모습. 그의 화법은 태생적인 그의 비주류 인생과 무관하지 않다.(이용호 기자)
특히 언론 문제에서 이런 필요성은 더 커지는 것 같다. 족벌언론의 폐해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노 대통령은 자신의 ‘부대원’들에게도 같은 생각을 전파해 교육시켜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공개적으로 발언하지 않고, 고위 공무원들에게 ‘밀지’를 내린다면 문제는 더 커질 수 있다. 족벌언론의 공격을 감수하면서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데는 이런 사정도 읽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 대통령에게 어떤 화법을 주문하는 것이 좋을까. 국정 현안을 에둘러서 추상적으로 말해달라, 그러면 ‘알아먹을 사람은 알아먹고 모르는 사람은 할 수 없고’로 갈 것인가. 아니면 ‘더욱더 솔직하게 말하고 밝혀라, 당신이 털어놓은 내용을 놓고 우리가 심판을 보겠다’고 할 것인가.

나 같으면 후자의 편에 서고 싶다. 노 대통령이 직설화법을 구사하다가 실수를 하든 말든, 국정의 내막을 국민들이 하나라도 더 알아두는 게 좀더 이득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직설화법과 ‘솔직 상표’에도 수상쩍은 구석이 있음을 지나쳐선 안 될 것 같다. 노 대통령은 최근에 대선후보 시절 언론정책고문을 지낸 서동구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어물쩍 한국방송 사장에 임명하려다가 들통이 났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왜 당신은 이런 구석에선 솔직하지 않고 꼼수를 동원했느냐”며 ‘솔직의 일관성 상실’을 사정없이 질책해야 할 것 같다.

한겨레 정치부 박창식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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