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내 신주류에서 무르익은 새집짓기… 4·24 선거결과와 한나라당 흐름이 변수
민주당을 수리해서 쓰는 게 옳습니까, 아니면 새집을 지어야 합니까
=고쳐쓸 수만 있다면 고쳐써야지요. 잘 안 고쳐지니까 답답한 노릇이지.
새집을 지으면 되지 않습니까
=글쎄요, 그게 그렇게 쉽지 않으니….
민주당 임채정 의원과 기자 사이에 오간 문답이다. 임 의원의 말 속엔 당 개혁안이 지리멸렬해지면서 개조냐 새집짓기냐의 기로에 선 민주당 신주류의 고민이 묻어난다. 고쳐쓰자니 반발이 거세고, 새집을 짓자니 말처럼 쉽지 않은 현실을 반영한다. 신주류 인사들의 릴레이 발언
신주류는 일단 신당쪽으로 기운 듯하다. 허황된 얘기처럼 조심스럽게 오가던 신당추진론이 이제 공개적으로 거론된다. 노무현 대통령과 가까운 신주류쪽 인사들이 릴레이식으로 ‘신당 불가피론’을 쏟아내 속도가 붙었다. 현실성에 의문을 나타내던 의원들도 “신당이 불가피해진 것 같다”는 쪽으로 돌아서는 분위기다.
정동영·신기남·천정배 의원 등 민주당 쇄신운동을 주도한 바른정치모임 소속 의원들은 신당론을 화두로 삼아 접촉의 빈도를 늘려가고 있다. 이들 의원의 보좌진들도 나름의 논의구조를 마련하는 등 신당추진과 관련한 구체적 실행 움직임도 감지된다. 청와대 정무쪽 참모들도 이 문제를 놓고 활발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정치권에선 신당론이 추상적 검토단계를 넘어 구체적 프로그램 마련단계로 진입한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신당론이 올해 하반기쯤이나 돼서 구체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시기가 앞당겨졌다. 이쯤 되면 신당을 해도 좋다는 국민의 OK 사인이 떨어질 것이다. 이제 신당을 공론화할 명분은 충분히 쌓였다.” 지난해부터 줄기차게 신당창당을 주장해온 신기남 의원은 당내 신주류쪽 인식을 이렇게 전했다. 신당론이 논리의 차원을 넘어 대중적 설득력을 지닐 정도로 무르익었다는 얘기다.
신당론의 줄기는 대선 직후인 지난해 12월23일로 거슬러올라간다. 신기남·천정배 의원 등 의원 23명이 ‘민주당 발전적 해체론’을 주장한 것.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불가피한 흐름’임을 인정하면서도 속도와 절차의 조절을 주문했다. 우여곡절 끝에 신당창당론이 물밑으로 가라앉고 개조론이 힘을 얻으면서 민주당은 개혁특위를 가동한다. 지난 2월10일 개혁특위는 지구당위원장직 폐지를 핵심 뼈대로 하는 개혁안을 마련했다.
민주당 신주류의 생각은 ‘탈호남, 탈동교동’을 통해 전국적 지지기반을 갖추는 것이 민주당 개혁의 핵심이고, 이를 위해서는 새 인물의 수혈이 필수적이며, 지구당위원장직 폐지를 통해 이것을 이뤄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주류쪽은 이런 구상을 자신들의 목을 겨냥한 ‘물갈이 계획’으로 치부해 강하게 반발했다. 신주류 내부에서도 지구당위원장직 폐지의 위험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개혁안을 둘러싼 이견이 표출됐다. 개혁안은 1개월이 넘도록 당무회의를 통과하지 못한 채 표류했고, 민주당은 개혁안 암초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형국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3월24일 개혁안 마련을 주도해온 천정배 의원이 지구당위원장직을 전격 사퇴했다. 다음날 쇄신파 의원들이 주축이 된 바른정치모임은 개혁안 원안 사수를 다짐하는 성명서를 냈다. 이어 26일엔 가능하면 구주류를 끌고 가자고 주장해온 김원기 고문과 이상수 사무총장이 신당론을 설파했고, 염동연 전 정무특보도 이에 동조했다. 앞서 노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과 이강철 대통령 특보가 구주류를 공격하는 발언을 했다. 천 의원은 ‘대폭적인 물갈이’(25일), ‘비상한 결단’(27일) 등 연일 발언의 수위를 높였다.
한나라 개혁파에도 기대 걸어
상황이 신당론쪽으로 급반전한 직접적 계기는 천 의원의 지구당위원장직 사퇴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신주류 의원들이 다각적으로 접촉하며 깊숙한 얘기를 나눴고 “이대로 가면 당내 파벌싸움만 하다가 개혁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 신당창당이 외길수순이다”라는 대체적 공감대를 이뤘다는 것이다. 신주류쪽 기류에 밝은 한 인사는 “구주류를 끌어안고 민주당을 고쳐쓰자는 민주당 개조론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판단했다. 민주당 해체를 주장한 지난해 12월의 문제의식으로 되돌아가 신당창당론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천 의원이 3월13일 노 대통령을 만난 사실이 알려져 신당추진이 청와대쪽과 교감 아래 진행되고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영남, 특히 부산·경남의 민심이 바뀌고 있다는 자신감도 신당창당쪽으로 가닥을 잡게 한 요인으로 보인다. 영남 인사의 약진과 특검법 수용 등으로 영남에서 생각보다 일찍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나라당에서는 신당의 간판을 달고 나올 구체적인 인사들의 이름까지 거론되고 있다.
여기에 감정적 응어리도 작용한 것 같다. 최근 몇 차례 열린 의원총회와 당무회의에 참석한 정동영·임종석 의원 등은 구주류쪽의 거친 공세를 접하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심경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운동권 출신 386세대의 네트워크 작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진 안희정 부소장 움직임도 신당과 맥이 닿아 있다는 게 대체적 관측이다. 안씨는 얼마 전 386세대 정치 지망생들과 회동해 방향설정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대 학생회장 출신인 이인영 구로갑 위원장도 ‘젊은 피 수혈’의 창구역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접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명망가 몇몇을 영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난해 대선 때 표출된 새로운 흐름을 담아내는 그릇을 만들어내는 것이 신당창당의 핵심 내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주류는 한나라당 개혁파쪽에도 기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민주당쪽에서 신당이라는 여울을 만들어내면 한나라당쪽에서도 물줄기가 넘어오게 돼 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김영춘 의원은 “현재 마련된 개혁안조차 당무회의에서 거부당할 경우 일합이 겨뤄질 것이다. 대중들이 ‘차라리 찢어져라’고 얘기할 때가 올 것이며, 그때까지는 무수한 고개를 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당쪽으로 대체적 가닥은 잡혔지만 신주류 내부에서도 아직 이견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해찬 의원은 “일여다야(一與多野)는 있지만 다여일야(多與一野)는 없다”는 논리로 신당론을 조급한 생각이라고 일축한다. 임채정 의원은 “대중적 리더십과 자금, 기획력과 조직력, 뚜렷한 이념적 정체성 등이 신당의 필요조건이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는 게 문제”라고 현실적 어려움을 지적한다. 정대철 의원은 어떻게 해서든 구주류쪽 인사들을 끌어안고 가자는 쪽이다.
당무회의가 분수령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면 신주류 내부에서 신당론이 무르익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구체적 방향과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의견통일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백가쟁명식 의견이 분출되는 초반단계라는 얘기다. 그러나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면서 조만간 일정한 흐름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신기남 의원은 “다양한 접촉과 토론을 하겠지만 바른정치모임과 열린개혁포럼이 중심축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어쨌든 지구당위원장직 폐지안이 당무회의에서 관철되지 않는 한 신당론은 더욱 활발하게 논의될 것 같다. 당무회의가 신당창당의 분수령이 되는 셈이다. 3개 지역구로 늘어난 4·24 재·보궐 선거는 결과에 따라 신당론에 기름을 부을 수도 있다. 개혁안을 둘러싸고 진통을 겪고 있는 한나라당 흐름도 변수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민주당 임채정 의원과 기자 사이에 오간 문답이다. 임 의원의 말 속엔 당 개혁안이 지리멸렬해지면서 개조냐 새집짓기냐의 기로에 선 민주당 신주류의 고민이 묻어난다. 고쳐쓰자니 반발이 거세고, 새집을 짓자니 말처럼 쉽지 않은 현실을 반영한다. 신주류 인사들의 릴레이 발언

사진/ 지난해 12월23일 민주당 의원 23명의 민주당 해체 기자회견. 신당론은 당시의 문제의식으로 되돌아가자는 흐름이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사진/ 구주류를 공격하며 신당론을 역설한 민주당 인사들. 김원기 고문, 천정배 의원, 염동연 전 정무특보, 안희정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이강철 대통령 특보 (왼쪽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