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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김근태의 봄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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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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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힘의 균형추로 입지 확대 기회 맞아…구주류 방패막이 지적에도 홀로서기 행보

“판단 유보지만 비판받아야 한다.”

민주당 김근태 의원에 대한 ‘살생부’의 평가다.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데 대한 원망이 짙게 배어 있다. 그렇다고 ‘반노파’들과 함께 싸잡아 내칠 수도 없다. 대선 승리를 위한 김 의원의 고심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의원은 대선 직후 호되게 몸살을 앓았다. 경선 직전 돈얘기를 고백성사해 당내에서 왕따당했고, 경선에서는 힘 한번 못 쓰고 주저앉았으며, 대선 때는 노무현 대통령과 긴장관계로 최소한의 존립기반마저 흔들린 일련의 가슴앓이가 한꺼번에 휘몰아친 것이다.

가슴앓이 끝내고 당권 도전 거듭 밝혀


사진/ 대선 직후 동면에 들어갔던 김근태 의원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김 의원은 신·구주류의 대립을 완화하는 균형추 구실을 하고 있다. (이용호 기자)

생채기가 난 김 의원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김 의원은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숨기지 않겠다”며 당권에 도전할 뜻을 밝혔다. 폭격 맞은 바그다드 같던 그의 한반도재단 사무실에도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5년 뒤는 김근태”라고 입을 모은다.

김 의원이 재기를 시도할 수 있는 바탕은 민주당 내 절묘한 ‘힘의 균형’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김 의원 우군이래야 김영환·이창복·심재권 의원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민주당이 당 개혁안을 둘러싸고 ‘혼돈’에 빠져들면서 군웅이 할거하는 형세가 이뤄져 ‘균형추 김근태’가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대선 직후 일거에 당을 장악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신주류는 갈래갈래 찢어지며 힘이 빠졌다.

정대철 대표와 김원기 고문은 당 개혁안이 표류하면서 매끄럽게 역할을 나눠맡지 못하는 분위기다. 오히려 각개약진하며 구주류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중앙위의장을 노리는 정 대표는 최근 박상천 최고위원을 두세번 만나 원내대표를 제의하며 협조를 요청했고, 박 위원은 이에 화답해 조만간 조기 전당대회론을 들고나와 정 대표의 중앙위의장 ‘무혈입성’을 도와줄 것으로 알려졌다. 김 고문도 한때 자신의 계보원이던 정균환 원내총무와 부쩍 가깝게 지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위원이나 정 총무 모두 ‘반노파’로 분류되지만, 신주류가 분화하면서 연대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신주류 주력부대 사이에서도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다. 이명박 서울시장의 낙마를 예상하고 추미애·신기남·신계륜 의원과 이상수 사무총장 등이 고지 선점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 당내 일반적 관측이다. 정동채 의원이 조정을 시도해보았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주류의 결속력이 약화되면서 김 의원이 자신의 고유 영토를 개척할 공간이 열린 셈이다. 특히 정대철 대표는 박상천 최고위원과 함께 김 의원을 유력한 러닝메이트로 상정하고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정치연구회가 두 사람을 잇는 공통기반이 되고 있다. 정 대표가 이 연구회 이사장을 맡은 이후 김학민·최민화·고영하 등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학번의 재야출신들이 모여들며 ‘정대철-김근태 연대’의 예비군을 형성해나가고 있다.

구주류 사이에서도 김 의원 몸값이 오르고 있다. 한화갑 전 대표는 사석에서 김 의원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한 대표로서는 대선기간 후보단일화 노선을 함께 걸어온 김 의원에 대한 정치적 신뢰가 쌓여 있기에, 당 개혁 속도를 조절해낼 적임자로 김 의원을 염두에 둘 만하다. 한 대표 핵심측근은 “한 대표는 내년 총선 전까지는 당내 문제에 일절 개입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라 누구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과도기에 여러 세력을 묶어낼 수 있는 조정자로는 김 의원이 가장 적합하다”고 말해 지지 가능성을 우회적으로 시사했다.

전통적 지지층 껴안고 정치 폭 넓혀

사진/ 김근태 의원은 청와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지난해 2월 당내 경선을 앞두고 노무현, 김근태, 한화갑 후보가 함께 앉아 있다. (이용호 기자)

김 의원과 동교동 구파는 악연이 깊다. 97년 전당대회 때부터 감정이 쌓여온데다 김 의원이 공개적으로 동교동 해체를 주장한 적도 있다. 그러나 3월13일 김 의원이 이라크 사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사발통문을 돌리자 김옥두·최재승·전갑길 의원 등이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나서, 새로운 관계의 싹이 트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치판에서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음이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다.

결국 김 의원은 새로 들어오는 신진세력이나 물러나는 훈구세력 둘 다 상대방을 압도할 힘이 없는 과도기적 특수상황에서 의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김 의원은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점에서 성공적인 외줄타기를 해내느냐, 아니면 두 세력 사이에 끼어 압살당하느냐는 기로에 놓여 있다.

그래도 문제는 다시 노무현 대통령과 관계 설정으로 되돌아간다. 김 의원은 요즘 가끔씩 노 대통령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는다. 과거 개혁연대를 주장하는 노무현 후보에 맞서 “정치 폭을 좁힌다”며 열린 연대를 주창한 철학의 차이가 되살아나는데다, 당내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중도에 말뚝을 박은 김 의원으로서는 청와대와 일정한 거리두기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여기에 노무현 정부가 지지기반을 옮기려 한다는 상황판단이 더해진다. 호남 지지층의 일부 이탈을 감수하고라도 영남에서 세를 얻으려 하고 있으며, 개혁·평화 세력보다 보수적 현실주의에 기대려는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김 의원은 동요하고 이탈하는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을 지켜내는 것을 자신의 정치적 과제로 여기는 듯하다. 김 의원이 동료 의원 8명과 함께 노 대통령에게 특검법을 거부하라고 촉구한 데 이어, 이라크 파병 국회동의안을 저지하기 위해 ‘우보전술’까지 감행할 예정인 것이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청와대와 충돌하는 듯한 양상에 대해 김 의원의 한 측근은 “노 대통령도 과거 김중권 대표에게 ‘기회주의자’라고 공격해 임명권자인 김대중 대통령에 부담을 안겼다. 당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청와대 몫이지 우리가 고려할 사안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이처럼 청와대와 각을 세우는 데는 현실적 힘을 고려한 측면도 엿보인다. “김 의원이 당에서 ‘홀로서기’에 성공하지 않는 한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 도와주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것이 김 의원 진영 생각이다. 이에 따라 노 대통령의 ‘은전’을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영역을 확보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김 의원 참모들 생각이다. 또 지금처럼 세력 간 균형이 이뤄지며 활동공간이 열리는 기회가 다시 오기 어려운 만큼, 현 시점에서 성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절박감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 의원이 단기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내년 총선 때문이다. 김 의원 핵심측근은 “이인제 대세론이 맹위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권노갑 고문의 지지말고 이인제 의원이 총선에서 구체적으로 얻어낸 전리품 때문이다. 이 의원의 찬조연설 덕을 본 국회의원들은 이 의원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지지세력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5년 뒤 대선후보 경쟁구도도 내년 총선에서 어느 정도 성적표를 거두느냐에 따라 판가름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총선에서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는 당장 다가온 당권경쟁에서 이겨 현실적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논리다.

5년 뒤로 이어지는 고난도 곡예

사진/ 지난 13일 미국의 공격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김 의원. (연합뉴스)

그래도 김 의원으로서는 조심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장 “동교동계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김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 퇴임 직후 동교동 집을 찾아가려고 약속까지 잡았다 미루고 있다. 노 대통령과의 대립이 지나치게 확대 해석되는 것도 경계하고 있다. 어차피 큰 틀에서는 노 대통령과 지지기반이 겹치는데 혼란만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김 의원은 이를 두고 “노무현 대통령이 성공해야 김근태에게도 정치적으로 재기할 길이 열린다”고 말했다.

이래저래 김 의원은 어려운 곡예를 하고 있다. 당내에서는 대립되는 이해의 공통분모를 찾아내야 한다. 대중적으로는 자신과 노 대통령의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점”을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김 의원은 힘을 돋워줄 청중의 박수소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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