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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스타는 ‘생쇼’를 마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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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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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식의 노무현 읽기]

대중 관심을 폭발시키는 독특한 정치 커뮤니케이션… 퍼포먼스적 요소를 적절히 구사

노무현 대통령이 잇따라 새로운 정치실험을 선뵈고 있다.과거 3김식 정치에 익숙한 국민에게는 분명 낯선 ‘장르’다. 은유와 복선, 때로는 암수가 깔려 있는 정치에 길들여진 일반인들에게는 투박하게 직접 부딪쳐오는 노무현의 정치가 때로는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청와대를 출입하는 <한겨레> 정치부의 박창식 기자가 노무현 정치의 현장을 뜯어본다. 편집자

사진/ 대통령과 평검사와의 토론은 검사들의 판정패로 끝났다. 노무현은 진검승부로 검찰의 쿠데타를 간단히 진압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청와대 기자실(청와대 담벼락 구석에 붙어 있으며 춘추관이라고 부른다)에는 요즘 200여명의 기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그전까진 신문사가 1명, 방송사가 2명씩으로 각 언론사 출입기자를 합쳐 40~50명 정도이던 게 네댓배 늘어났다. 신문사들은 한곳에 3~4명씩 기자를 보내고 있다. 그렇게 여러 명의 기자가 함께 일해도 요령 피울 새가 없을 정도로 청와대는 많은 기삿거리를 쏟아내고 있다. 그래서 청와대 춘추관은 ‘노가다판’이라는 자조섞인 이야기들도 나온다.

정권 출범 초기에 새 대통령의 행보가 관심을 끄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요즘처럼 대통령에 대한 언론 보도량이 많고, 대통령의 행동과 발언이 화제와 논쟁의 중심이 되는 경우는 과거에 없었다.


춘추관은 노가다판?

최근의 흐름은 2002년 봄 민주당 광주 경선 무렵 ‘노무현 바람’이 일어나던 때와 비슷하다. 환호를 보내든 아니면 씹어대든, 그때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이야기하였는데, 지금 그와 비슷한 현상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노무현이 논쟁과 화제의 중심이 되는 일차적 원인은 그가 새로운 실험들을 많이 한다는 점에 있다. 첫 내각을 인선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국민 공모를 받거나 대통령이 야당 당사를 찾는 등으로 그는 끊임없이 뉴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관심 폭발 현상은 노무현의 독특한 정치 커뮤니케이션에서 비롯되는 측면 또한 큰 것 같다.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가장 큰 특징은 대통령이 텔레비전을 통해 국민 대중 앞에 나서는 방식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노무현은 검찰 인사파동이 일어나자 평검사들과의 토론을 자청했다. 평검사들은 이에 전국 대표 10명을 뽑아 나름대로 칼을 갈고 나왔다. 그러나 청중들이 내린 승부는 검사들의 판정패였다. 노무현은 ‘검찰의 쿠데타’를 간단히 진압했다.

평검사들과의 토론은 김대중 대통령 때의 ‘국민과의 대화’와 비교가 됐다. 국민과의 대화는 잘 짜인 각본을 토대로 한 연극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선했지만, 청중들은 이내 식상했다. 텔레비전을 통해 대통령의 철학을 전달한다는 의도도 효과가 반감됐다. 게다가 방송을 정권홍보에 이용한다는 비난이 일어나면서 ‘국민과의 대화’는 몇 차례 잇지 못하고 중단됐다.

노무현의 평검사들과의 토론은 각본 없는 ‘생쇼’였다. 검사들은 “노무현 대통령도 당선 이전에 검찰에 청탁전화를 한 적이 있지 않느냐”, “대통령의 형(건평씨)이 정부 고위직 인사를 두고 물의가 될 만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며 도발적 질문을 퍼부었다. 이에 노무현은 “이쯤 하면 막 하자는 것이죠”라며 물러섬 없이 진검승부를 시도했다. ‘생쇼’와 연극 가운데 어느 쪽이 흥미로운지는 다들 안다.

노무현은 2월25일 대통령 취임 뒤 3월14일까지 20일 동안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기자회견도 두 차례나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을 포함해 1년에 두세 차례 정도 기자회견을 했던 데 비하면 우선 횟수가 많다. 청와대는 또한 “앞으로도 국민적 관심사와, 대통령이 직접 의견을 밝히지 않으면 혼선이 올 만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이 직접 회견에 나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자주 하는 것은 미국에선 이미 일반화된 일이다. 미국 대통령은 평균 한달에 한번꼴로 기자회견을 한다.

기자회견 방식도 완전히 달라져

사진/ 노무현은 대중이 지지하고 환호하려면 “뭘 알아야 한다”는 공개주의와 투명성의 장점을 진작부터 이해했다. 국민경선 당시 열광하는 노사모 회원들. (이용호 기자)

기자회견 형식도 차이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기자회견에 나설 10명 정도의 질문자를 사전 선정했다. 출입기자들이 서로 질문권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기자 총회에서 추첨해 A, B, C조를 편성했으며, 이번에 A조가 하면 다음에는 B조 식으로 순서를 돌렸다. 선정된 기자 10명은 미리 회의를 해서 질문 내용을 조정했다. 제한된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 중복을 피하자는 취지이므로 나쁘게 볼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청와대 관리가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박지원 공보수석 같은 이가 기자들의 질문 조정내용을 미리 입수해 대통령에게 전달했으며, 대통령은 사전 정보를 토대로 답변을 준비했다. 한마디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던 셈이다.

노무현의 청와대에서도 출입기자들끼리 5명 정도로 질문자를 미리 선정한다. 지금은 언론사 명칭의 가나다 순서로 질문자를 뽑는다. 그러나 질문자들은 자기들끼리도 내용을 조정하지 않는다. 청와대 관리들도 특별히 누가 무엇을 물을지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아마 대통령이 미리 정보 파악을 주문했으면 수하의 관리들이 탐문에 열을 올리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대통령이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모양이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잦은 기자회견과 텔레비전 이벤트를 두고 “국민 앞에 대통령의 견해를 가감 없이 전달하고 국민의 참여와 협력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국민참여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책 설득 방법이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사실 정치 지도자의 본래 임무는 국민의 의사를 결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때로는 참여의 열정이 끓어오르게 해야 하며, 때로는 국민적 분노를 촉발시켜 외부의 적에게 과녁을 돌리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쇼와 퍼포먼스적 요소가 종종 구사될 수밖에 없고, 현대정치에 들어서 이런 측면이 좀더 강조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노무현은 과거의 대통령들에 비해 좀더 세련된 정치 퍼포먼스를 실행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노무현은 사실 대선 과정에서부터 정치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볼 때 경쟁자들에 비해 좀더 유능했다. 그는 노사모라는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을 확보했는데, 그 비결은 대중 앞에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각종 비공개 회동과 계보 정치를 토대로 한 세규합에 서투른 반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관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 “솔직한 게 탈이다”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꽤 열광적인 지지자들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대중이 지지하고 환호하려면 “뭘 알아야” 한다는 공개주의와 투명성의 장점을 그는 진작부터 이해했다.

노무현은 대중문화의 스타 시스템도 잘 연구해온 것 같다. 그는 당선된 지 얼마 뒤 민주당 당직자들과의 모임에선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이제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가겠지만, 정치권에선 또 다른 스타들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치는 불가피하게 스타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최근 노무현의 행보를 보면 “정치에 스타가 필요하다”에서 더 나아가 “대통령도 스타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는 생각도 하는 것 같다. 대통령이 된 만큼 인기에만 영합하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되겠지만, 후보 시절에 재미를 본 ‘대중 앞에 많은 것을 드러내고 참여와 지지를 호소하는’ 방식은 버릴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다. 노무현은 평검사들과의 토론 며칠 뒤 한나라당 지도부와의 오찬에서 “검찰은 이번에 꽉 쥐었는데… 검사들이 (토론회에서) 작전을 잘못 짜 기회를 놓친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내가 덕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참여민주주의에는 스타가 필요하다

어쨌든 노무현은 이런 방식으로 국민 여론조사에서 80% 이상의 지지율을 구가하고 있다(정부 출범 초기의 프리미엄이 물론 있겠지만). 반면 정적들로부터는 “노무현은 통치가 아니라 대통령이 되어서도 여전히 정치를 하는 것”, “선거 캠페인하듯 국정을 운영하는 거냐”, “포퓰리즘의 위험이 있다”는 등의 비난도 받고 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확인된 시대정신이 변화에 대한 욕구였다면, 당분간 그런 욕구를 앞장서 충족시키겠다는 젊은 대통령을 가져보는 게 썩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히딩크 감독이라는 스타가 국민을 광장으로 끌어냈듯, 참여민주주의에는 참여를 촉발할 스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창식 기자/ 한겨레 정치부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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