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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검찰 호남인맥 우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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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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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 출신들 검찰총장 등 눈부신 약진… 청와대 “5년간의 책임추궁 정당하게 한 것일뿐”

“정권이 재창출됐다고 믿었는데 실은 교체된 것이었다. 방심하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검찰의 검사장급 이상 고위간부 인사가 발표된 3월11일 검찰 안의 호남인맥들은 경악했다.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검찰의 주요 요직을 장악하며 주류세력을 형성해온 호남인사들이 이번 인사에서 대거 몰락한 것이다. 사실 호남세력 퇴조는 서열파괴와 함께 이번 인사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힌다. 이른바 ‘잘나간다’던 간부들은 옷을 벗거나 좌천성 인사로 요직에서 밀려났고, 검찰의 별이라는 검사장 승진 대상에는 호남출신이 단 한명도 끼지 못했다.

영·호남 간부비율 16대 7로


사진/ 검찰 호남인맥의 대표주자였던 신승남 전 검찰총장. 최근까지 명맥을 이어온 검찰의 호남 주도시대는 마침표를 찍은 것으로 보인다. (김종수 기자)

반면 경남 마산출신인 송광수 대구고검장이 검찰총장에 내정된 것을 비롯해 이른바 PK(부산·경남)출신들의 약진은 눈부셨다. 검사장 승진자 6명 가운데 3명이 PK였다. 외형상으로는 5년 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검찰 안의 요직이 PK출신에서 호남출신으로 대거 물갈이된 것이 5년 만에 고스란히 원상복귀되는 듯한 모양새다. 호남출신들이 “정권이 교체됐다”고 경악하는 것이 전혀 일리가 없지만은 않은 것이다. 간부인사가 발표된 11일 만난 한 호남출신 간부는 “이번 인사는 세대교체를 빙자한 호남 몰아내기”라고 흥분했다.

실제로 이번 인사로 밀려난 간부들의 면면을 보면 유독 호남출신이 많다. 대검 차장을 거쳐 부산고검을 맡았던 김승규(사시 12회) 고검장과 현직 검사장으로는 마지막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내고 나와 대검 차장으로 있던 김학재(13회) 고검장 등 호남의 대표주자들이 모두 옷을 벗었다. 사시 13회인 송광수 고검장이 총장에 내정되면서 동기나 후배가 총장으로 오면 물러나는 관행에 따라 사표를 낸 것이다.

그 아래 고참간부들인 정충수(13회)·김규섭(15회)·박종렬(15회)·조규정(15회) 검사장은 모두 초임 검사장이 가는 자리로 좌천됐다. 수원지검장을 거쳐 대검 강력부장을 지낸 정 검사장은 사법연수원 부원장으로, 대검 강력부장을 거쳐 수원지검장을 지낸 김 검사장은 부산고검 차장으로, 대검 공안부장 등 요직을 거친 박 검사장은 대검 공판송무부장으로, 광주지검장을 지낸 조 검사장은 광주고검 차장으로 밀려났다. 김 검사장은 수모를 견딜 수 없다며 결국 사표를 냈다.

물론 전남 여천출신인 김종빈(15회) 검사장과 광주출신 임래현(16회) 검사장이 각각 고검장으로 승진해 대검 차장과 대구고검장에 임명되고, 목포출신 이기배(17회) 검사장이 요직인 대검 공안부장에 기용되는 등 호남 배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배려’ 수준이지 호남세력의 급격한 영향력 퇴조를 가릴 정도는 아니다. 전체적으로 봐도 DJ정부 시절 비슷한 수준이던 영·호남 간부비율이 이번 인사를 계기로 16 대 7로 다시 두배 이상 격차가 벌어졌다.

호남출신 간부들이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사실은 6명의 검사장 승진자 가운데 호남출신이 단 한명도 없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과거 TK(대구·경북지역)정권이나 PK정권에서도 구색을 위해 호남출신을 1~2명씩 승진대상에 포함시킨 것에 비춰볼 때 이례적인 것이다. 특히 관행상 검사장 승진 우선대상자로 꼽히는 서울지검 아래 동부·남부·북부·서부·의정부 지청 등 5개 지청장 가운데, 공교롭게도 호남출신인 신언용 동부지청장과 강충식 서부지청장만 탈락했다. 동부지청장은 큰 허물이 없는 한 최우선으로 승진이 보장되는 자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차장과 부장급 등 호남출신 중간간부들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달 말로 예정된 중간간부 인사에서도 검사장급 인사와 마찬가지로 호남세력이 요직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이다. “새 정부에서 검찰 인사권을 가지게 된 누군가가 호남세력을 싹쓸이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이를 주도하는 인물로 “부산출신 청와대 참모 누구” 또는 “이번에 요직에 기용된 누구” 하는 식으로 밑도 끝도 없는 얘기들이 돌고 있다. 호남출신의 한 부장검사는 “과거 일부 호남출신이 잘못한 게 있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중요한 자리에서 중요한 사건을 처리했다는 이유만으로 잘잘못을 분명히 가리지 않은 채 싸잡아서 문제인물이라고 낙인찍고 쫓아내는 것에는 승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PK출신들의 결과적인 행운”

사진/ 호남 출신의 정충수·김규섭·박종렬·조규정 검사장(왼쪽부터). 모두 초임 검사장이 가는 자리로 좌천됐다. (한국법조인대관)

그러나 이번 인사를 주도한 청와대나 법무부쪽은 “결코 호남 싹쓸이를 위한 인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번 인사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DJ정부에서 ‘옷로비’ 등 추문과 부실논란 등을 빚은 각종 게이트 수사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추상같이 사건을 처리하지 못해 결국 검찰은 물론 정권의 위기까지 몰고온 인물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주로 요직을 차지한 사람들이 호남쪽이어서 자연스럽게 호남세력 퇴조가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PK가 약진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PK출신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도 사람을 고르면서 ‘어 또 PK야’ 할 만큼 김영삼 정부 시절 대거 승진한 PK의 인력풀이 건재했고, 이들이 지난 5년간 요직에서 멀어져 있던 점도 결과적으로 행운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결코 일부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것처럼 특정인맥을 따라 좌지우지된 인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요직에서 밀려난 호남출신들이 따지고 나서면 딱히 뭘 어떻게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5년 동안 요직을 독점하며 서로 ‘형님’, ‘아우’ 하면서 조금씩 봐주고 묵인해 결국 검찰을 이 지경으로 만든 데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일종의 연대책임론으로 해석되는 이런 시각은 인사 직전 평검사들과의 공개토론에서 거듭 “현재의 검찰 상층부를 불신한다”고 공언한 노무현 대통령의 인식과도 맥이 닿는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역대 정권마다 정치권에 기댄 특정 인맥이 검찰 요직을 독점하고 당연히 정치권 눈치만 봐온 것이 검찰을 망친 근본원인이라고 본다. 결국 이번 인사에서 호남출신들이 대거 밀려난 것은 이런 잘못된 관행을 끊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확대 재생산해온 것에 대한 심판인 셈이다.

특정세력의 과거세력 대체로 끝날까

어쨌든 이번 인사를 계기로 김태정 전 법무장관과 신승남 전 검찰총장을 거쳐 최근까지 명맥을 이어온 검찰의 호남 주도시대는 마침표를 찍은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권력의 향배에 따라 주도세력이 바뀌어온 검찰의 고질적 병폐가 근원적으로 뿌리뽑힐 것인지 여부다. 일부의 우려처럼 이번 인사가 정권에 줄을 댄 특정세력이 과거세력을 대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악순환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검찰 안팎의 이런 우려를 의식해 청와대와 법무부는 앞으로 검사장급 인사에서는 지연이나 학연 등 특정세력에 편중된 인사를 바로잡는 것을 최우선과제로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과거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어 결과적으로 이렇게 됐지만, 책임 추궁은 이번에 한정한다. 요직에서 배제된 검사장들에게도 명예회복의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정광섭 기자/ 한겨레 사회2부 iguass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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