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방조’논란 빚고 있는 ‘성골공안’김원치 검사… 공안부 존치 여부도 갈림길에
‘1980년 서울지검 남부지청-85년 서울지검 공안부-88년 대검 공안3과장(학원·외사 관련 공안사건 지휘·감독), … -96~97년 서울지검 1차장(공안1·2부 총괄)’.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된 ‘김원치 검사’(사시13회·현 대검 형사부장)의 화려한 이력 가운데 일부다. 김 검사의 한 후배검사는 여기에 명쾌한 설명을 곁들였다. “김 검사장을 지칭하는 데는 ‘정통 공안’이라는 말로는 부족할지 모른다. ‘성골 공안’ 정도는 돼야겠지.” 건강상 이유로 거르고 지나친 서울지검 공안부장 자리를 빼고, 공안 라인의 ‘적통’을 잇는 모든 자리를 섭렵한데다 남다른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80년대 굵직한 공안사건을 섭렵하다
다소 늦은 나이인 32살(1975년)에 임관한 그가, 5년차 검사이던 80년 세 번째 임지로 옮겨간 곳은 서울대·중앙대 등 주요 대학들을 관할하는 서울지검 남부지청 공안부.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던 당시, 그는 이곳에서 공안검사의 ‘명성’을 착실히 쌓아갔다. 81년 학내시위를 주동했다 그에게 조사받은 유기홍 전 민화협 사무처장의 기억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81년 4월 말인가 5월 초쯤으로, 두 차례에 걸쳐 광주학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인 전두환의 퇴진을 요구하는 학내시위 주동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다. 포승줄에 꽁꽁 묶여 이른바 검취(검사 취조)를 받기 위해 끌려들어간 검사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대면하자마자 서슬퍼렇게 ‘네가 작성한 유인물 내용이 북한 삐라에 인용됐으니 이는 중대한 이적행위’라며 겁을 주었다. …결국 그는 내게 법정에서 4년을 구형했다. 나는 지금도 내게 엄벌을 가하도록 촉구한 김원치 검사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하얗고 무표정한, 마치 저승사자와도 같던 그의 얼굴을….”(<오마이뉴스>) 김 검사가 사건을 따라다녔는지, 아니면 사건이 그를 따라다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80년대 굵직한 공안사건치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다. △깃발-민추위 사건(85년) △민청련 김근태 의장 구속(85년 8월) △삼민투·민민투 사건(85년) △서울대 구학련-자민투 사건(86년) △1525명 연행·1287명 구속 ‘기록’을 세운 건국대 사건(86년 10월)과 서울지검 1차장 때인 96년 8월 연세대 한총련 사태까지. 이번에 불거진 ‘고문방조’ 논란도 당시 일련의 시국사건 처리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는 자신의 과거 행적을 두고 검찰 통신망에 띄운 글에 “이 땅에서 공산주의를 막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려 노력했다”고 적고 있다. 또 최근 <조선일보>(3월16일치)에 기고한 글에서는 “목수가 집을 짓는 사람이듯 검찰은 오로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검찰 정신은 정의를 향한 열정이며 선과 악에 대한 분별심”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지검 1차장 때인 지난 96년 ‘12·12 및 5·18 사건’ 수사본부장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 등 관련자들에 사형 등 중형을 구형한 그가, 정작 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한 학생·사회 운동가들을 실정법의 이름으로 단죄한 행위는 정의의 실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김원치의 재기, 신공안의 좌절
김대중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는 최근 그의 기고문을 두고 논란이 일자 이런 말을 내뱉었다. “지난 정권 초기 인사에서 정리해야 했는데….” 그 아쉬움의 배경엔 98년 초를 장식한 이른바 북풍(北風)사건이 있다. 안기부가 한 재미교포에게 공작금을 주고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북한과 커넥션을 맺고 있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도록 사주했다는 내용.
당시 김원치 검사의 보직은 사시 13회 가운데 검사장 승진 2순위로 꼽히는 서울지검 남부지청장. 북풍사건 수사지휘를 맡고 있던 김 지청장은 수사과정에서 권영해 전 안기부장의 자해라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지만 곧이어 단행된 인사에서 검사장 자리에 올랐다.
그의 승진은 이른바 ‘정통 공안’으로 분류되거나,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 등에서 DJ와 악연을 맺은 안강민(사시 8회)·최병국(9회)·주선회(10회) 검사장, 이상형(20회)·함귀용(23회) 검사 등이 좌천성 전보를 당한 것과는 뚜렷이 대비됐다. 유명한 공안검사면서, 한편으론 호남인맥도 아닌 그의 승진을 검찰 안에선 ‘DJ식 논공행상’으로 받아들였다.
김원치의 재기는 김대중 정권이 내세운 ‘신공안’의 좌절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98년 4월 박상천 당시 법무장관은 ‘질서와 인권의 조화’를 신공안의 핵심개념으로 삼고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 △인권보장의 조화 △정치적 중립성 보장 등을 3대 정책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후 5년간 공안검찰의 속성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게 검찰 안팎의 지배적 평가다.
왜일까. “문제는 신공안 개념이 꼭 말장난으로 들릴 만큼 모호한데다, 무엇보다 조직을 손대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서울지검 한 부장검사) 김대중 정권은 과거 군사독재를 거치며 비대해진 공안부 조직을 거의 그대로 방치했고 국가보안법도 손보지 않았다.
48년 건국 이후 한동안 정보부로 존재하던 공안 기능이 공안부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5·16 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인 64년. 이어 ‘공안 수요’가 폭증한 5공 때는 대검에 4개 공안과(현재는 3개과)가 신설되고, 서울지검 공안부가 1·2부로 확대 개편됐다. 한때 공안부 ‘전담’의 수가 전국 검사의 10%를 넘은 적도 있었다.
이들이 수행하는 일은 △국정원·경찰 등에 대한 수사지휘와 송치사건의 처리 △공소유지 △정보보고 등인데, 김대중 정권 들어 노사정위원회가 구성되고 학생운동이 쇠락하면서 일반업무의 수요는 크게 줄었다. 점차 검찰 본연의 일보다 동향파악과 정보보고, ‘공안합수회의’ 등을 통한 정부 유관기관 간 업무조정쪽으로 역할중심을 옮겨갔고, 그 정점에서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99년 6월)이 터졌다.
공안기능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미 마음속으로 사표를 쓴 지 오래”라는 김원치 검사장은 사실상 택일만을 남겨놓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미 저물고 있는 구공안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 관심사는 개혁을 부르짖는 노무현 정권이 검찰의 공안기능을 어떻게 바꾸느냐는 데 있다.
검찰 안팎에선 공안부 축소 또는 폐지론이 다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공안 성격의 사건이더라도 형사부에 맡겨 통상 사건으로 처리하자는 주장이다. 특히 형사사건 처리에 허리가 휘는 검찰 내부에선 조직과 인력의 효율적 운용면에서도 공감대가 넓다. 공안부 근무경험이 있는 한 일선 부장검사는 “현재 공안부 기능은 형사부로 옮겨가도 아무 문제가 없다. 파업을 하든 불법시위를 하든 화염병을 던지든 통상적인 사건처리 절차에 따라 하면 된다”고 말했다.
공안부의 존치인가 폐지인가. 5년 만에 다시,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정권이 건너지 못한 루비콘 강의 기슭에 서 있다.
강희철 기자/ 한겨레 편집2부 hckang@hani.co.kr

사진/ 서울지검 남부지청장 당시 기자들에게 북풍사건의 수사결과를 설명하는 김원치 검사. 권영해 전 안기부장의 자해에도 곧이어 단행된 인사에서 검사장 자리에 올랐다. (한겨레 윤운식)
다소 늦은 나이인 32살(1975년)에 임관한 그가, 5년차 검사이던 80년 세 번째 임지로 옮겨간 곳은 서울대·중앙대 등 주요 대학들을 관할하는 서울지검 남부지청 공안부.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던 당시, 그는 이곳에서 공안검사의 ‘명성’을 착실히 쌓아갔다. 81년 학내시위를 주동했다 그에게 조사받은 유기홍 전 민화협 사무처장의 기억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81년 4월 말인가 5월 초쯤으로, 두 차례에 걸쳐 광주학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인 전두환의 퇴진을 요구하는 학내시위 주동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다. 포승줄에 꽁꽁 묶여 이른바 검취(검사 취조)를 받기 위해 끌려들어간 검사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대면하자마자 서슬퍼렇게 ‘네가 작성한 유인물 내용이 북한 삐라에 인용됐으니 이는 중대한 이적행위’라며 겁을 주었다. …결국 그는 내게 법정에서 4년을 구형했다. 나는 지금도 내게 엄벌을 가하도록 촉구한 김원치 검사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하얗고 무표정한, 마치 저승사자와도 같던 그의 얼굴을….”(<오마이뉴스>) 김 검사가 사건을 따라다녔는지, 아니면 사건이 그를 따라다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80년대 굵직한 공안사건치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다. △깃발-민추위 사건(85년) △민청련 김근태 의장 구속(85년 8월) △삼민투·민민투 사건(85년) △서울대 구학련-자민투 사건(86년) △1525명 연행·1287명 구속 ‘기록’을 세운 건국대 사건(86년 10월)과 서울지검 1차장 때인 96년 8월 연세대 한총련 사태까지. 이번에 불거진 ‘고문방조’ 논란도 당시 일련의 시국사건 처리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는 자신의 과거 행적을 두고 검찰 통신망에 띄운 글에 “이 땅에서 공산주의를 막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려 노력했다”고 적고 있다. 또 최근 <조선일보>(3월16일치)에 기고한 글에서는 “목수가 집을 짓는 사람이듯 검찰은 오로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검찰 정신은 정의를 향한 열정이며 선과 악에 대한 분별심”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지검 1차장 때인 지난 96년 ‘12·12 및 5·18 사건’ 수사본부장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 등 관련자들에 사형 등 중형을 구형한 그가, 정작 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한 학생·사회 운동가들을 실정법의 이름으로 단죄한 행위는 정의의 실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김원치의 재기, 신공안의 좌절

사진/ 지난 94년 공안통치 종식과 학문의 자유 침해 중단을 촉구하며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경남지역 각계인사들. 97년 김대중 정부의 신공안 선언에도 공안통치는 종식되지 않았다. (강재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