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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하늘의 절반을 내각의 절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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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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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사의 획기적 기용 보여준 노무현 대통령, 그의 여자들을 말한다

사진/ 노무현 정권에서 발탁된 4명의 여성장관. 여성계는 일제히 환영성명을 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무현 대통령은 한때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이었으며, 후배들에게 전근대적인 여성관을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부끄럽게 고백한 적이 있다. 1983년 부산의 운동권 청년들과 처음 접했을 때의 여성관도 덜하지 않았다. “그래도 남자한테는 여자가 서너명은 항상 있어야지. 한명은 가정용, 또 한명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뺑뺑이용, 그리고 또 한명은 인생과 예술을 논하는 오솔길용, 이 정도는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작은 거인’ 지은희

그런 그의 여성관이 바뀐 계기는 <하늘의 절반>이라는 책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고서였다. 이후 점차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책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하게 된다. 덕택에 아내를 존경할 줄 알고,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진출을 적극 옹호하게 됐다고 한다. 그의 여성관의 ‘진보’는 대통령이 된 이후 내각과 청와대의 주요 부서에 역대 어느 정권보다 여성을 많이 기용한 획기적인 인사로 구체화된다.


사실 여성계 일각에선 노 대통령의 여성관을 우려하는 시각이 있었다. 민주당 이미경 의원은 대선 때 노 대통령에게 여성정책에 대한 여성계의 우려를 꺼냈다. 하지만 노 후보는 적극적으로 반박하며 되레 역공을 폈다. “나는 사회분야에 대해 개혁적이듯이 여성에 대해서도 개혁적이다. 오히려 우리나라 여성운동은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데 반해 사회 일반의 문제에 대해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사진/ ‘특별한 신뢰’. 대선기간 중 노무현 후보의 거리 유세에 함께했던 추미애 의원. (한겨레21)
여성계는 내각의 명단이 발표되기 전까지 노 대통령의 여성관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교육문화수석실 아래 있던 여성정책비서관(2급) 직책이 폐지되자 “노 대통령쪽의 여성 관련 정책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떠돌았다. 취임사에서 “모든 종류의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고, 양성평등사회를 지향해나가겠다”고 강조했지만 여성계의 불만은 꺼지지 않았다. 2월27일 첫 내각 명단이 발표되자 여성계의 우려는 환영으로 돌변했다. 각료 19명 중 4명(21%). 헌정사상 최고비율이었다. 여성단체들은 일제히 환영 성명을 냈다.

노 대통령의 여성인맥이 두텁다고 할 수는 없다. 개인적인 인간관계보다 민주당 경선과 대선기간에 형성된 공식적 인맥이 대부분이다. 노 대통령의 여성인맥을 크게 나눠보면 내각과 청와대에 포진한 인물, 민주당 의원, 개혁국민정당 등 외곽 인사 세 그룹이다.

4명의 여성 장관 가운데 강금실(법무)·지은희(여성)·한명숙(환경) 장관은 한국여성단체연합과 깊은 인연이 있다. 강 장관은 이 단체의 법률자문을 맡은 적이 있고, 지 장관과 한 장관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이 단체가 노무현 정부 여성인력의 저수지가 된 셈이다.

지 장관은 노 대통령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다. 개혁적 여성인사 발탁 차원으로 보인다. 키 150cm인 그는 여성운동계에서 ‘작은 거인’으로 통한다.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으로 무려 6년 동안 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직을 역임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원래 운동권이 아니었다. 동양시멘트에 입사해 비서과장까지 지내다 여성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다름 아닌 매맞는 여동생 때문이었다. 남편으로부터 반복적으로 구타당하면서도 독립할 능력이 없던 터라 남편에게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동생을 보며 “한 개인의 힘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이효재 교수가 여성연구를 위해 이화여대에 설립한 한국여성자원개발연구소에서 일한다. 이후는 오직 한길이었다. 1990년엔 민중당 여성위원장으로 잠시 정당에 몸담았고, 2000년 총선시민연대 상임대표를 맡아 ‘낙선·낙천운동’을 이끌었으니 정치권과도 이런저런 인연이 깊다.

간호계 대모 김화중, 대선주자 떠오른 추미애

사진/ ‘특별한 신뢰’. 대선기간 중 노무현 후보의 거리 유세에 함께했던 허운나 의원. (한겨레 이종근 의원)

김화중 장관은 원래 동향(충남 논산)인 이인제 의원의 계보에 몸담기도 했고, 당내 경선 때 한화갑 전 대표를 지지했으나 대선과정에서 노무현 후보의 보건·의료특보로서 의사회·치과의사회·한의사회·약사회 등 보건의료 단체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동시에 정무2특보로서 후보 부인 권양숙씨 비서실장을 맡아 권씨가 가야 할 곳을 챙기고, 전국을 함께 누볐다. 선거 막바지에는 고속도로에 진입하다가 권씨와 함께 뒤차에 들이받혀 가벼운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입각에 권씨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일자 노 대통령은 이를 단호하게 부인하며 적극 변호했다. 남편이 고현성 곡성군수다. 서울대 간호학과와 법대를 다니던 두 사람은 ‘향토개척단’이라는 동아리에서 만나 가약을 맺는다. 7남매의 맏이이자 5대장손인 남편 집안에선 ‘당연히’ 아들 낳기를 고대했지만 김 장관은 내리 세 딸을 낳는다. 그 뒤 미국 컬럼비아대학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30대 중반을 넘겨 다시 한 차례 아들 낳기를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딸이었다. 위로 세 딸은 출가했고, 막내딸이 현재 이화여대 의대에 재학 중이다. 대학병원 간호사를 시작으로 서울대 보건학과 교수를 거쳐 대한간호협회회장 등 수많은 간호 관련 단체에서 폭넓은 활동을 펼쳐 ‘간호계의 대모’로 통한다. 간호계를 대표해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진출한 이후 친화력을 과시하며 강단 있게 일을 밀어붙이는 추진력도 보였다.

한명숙 장관은 2001년 초대 여성부 장관에 올라 무리 없이 이끌었다는 평을 얻었다. 유신 시절 한국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로 사회활동을 내딛자마자 2년 동안 투옥생활을 경험했다. 이후 한국여성민우회 회장,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방송개혁국민회의 공동대표 등을 거치며 국내 여성운동을 이끌었다.

청와대엔 박주현 국민참여 수석, 송경희 대변인, 김현미 국내1비서관, 최은순 국민제안비서관, 황덕남 법무비서관 등 여성인맥들이 포진해 있다.

민주당에서는 대구의 세탁소집 둘째딸로 태어난 추미애 의원이 첫손에 꼽힌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8일 대선 전날 종로 유세 때 정동영 의원과 추 의원을 차세대 대선주자로 치켜세운다. 이는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지지를 철회하는 빌미가 됐지만 결국엔 ‘전화위복’이 됐다. 노 대통령은 지난 1월 추 의원을 대미특사단에 포함시켜 신뢰를 보였다. 정치권에선 이를 두고 ‘지도자 수업쌓기’를 위한 배려로 해석했다. 인터넷에선 ‘노사모’를 본뜬 ‘추사모’(아름다운 사람 추미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www.choosamo.org)가 꾸려져 ‘여성 대통령’을 꿈꾸고 있다.

이미경 의원은 1983년 여성해방을 기치로 내건 진보적 여성조직인 여성평의회 창립 당시 지은희 장관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은 적이 있다. 1996년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할 당시 노 대통령과 통추 활동을 같이한 이후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선거기간 동안 선대위 대변인, 여성특보,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등 ‘1인3역’을 해냈다. 특히 대변인으로서 평소 친분이 두텁던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에게 맹공을 퍼부어 정 대표로부터 “왜 그렇게 저를 심하게 공격하십니까 부드럽게 하시죠”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여성특보와 문화예술위원장으로서 여성계와 문화예술계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가교 역할도 했다.

독립군의 딸 김희선, 인터넷 선거 주도한 허운나

사진/ 이미경, 김희선, 박주현, 박금자, 노혜경, 김정란(왼쪽부터).

‘독립군의 딸’ 김희선 의원은 선대위 여성본부장을 맡아 ‘희망어머니 유세단’을 이끌고 영남지역 곳곳을 누비며 밑바닥 표를 훑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시장 상인들이 돈을 걷어서 주는 등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김영배 의원이 ‘국민경선은 사기극’이라며 ‘노무현 흠집내기’에 나서자 반박 기자회견을 열어 ‘노무현 지킴이’ 역할을 자임했다. 할아버지(독립군 자금책), 작은할아버지(광복군 제3지대장)에 이어 아버지(한독당 비밀청년당원)까지 독립운동을 한 독립군 가문 출신답게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 회장으로서 지난해 해방 이후 최초로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 발표를 주도했다.

허운나 의원은 민주당 인터넷선거특별본부장으로 인터넷 선거운동을 진두지휘했다. 국민경선 도입 당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줄기차게 전자투표와 인터넷투표 도입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노풍’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개혁국민정당에도 노 대통령을 지원하는 여성인력이 탄탄하다. 이들은 노 대통령이 언제든 활용 가능한 인력풀이다. 대구 효성가톨릭대 교수인 이덕수 집행위원은 서울 여성의 전화 공동대표로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펼친 바 있다. 여성계 인사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숭실대 이삼열 교수가 남편이다.

서초갑 지구당위원장 고은광순씨는 이화여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뒤 대전대 한의학과를 졸업한 한의사다.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과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을 열성적으로 펼쳤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붙은 별명이 ‘잔다르크’다. 한의대 재학 시절이던 1987년 대선투표날 부정선거를 막겠다며 ‘나홀로 피케팅’을 펼치다 파출소 소장이 출동한 적도 있다.

전북대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전주시의회 의원을 지낸 오정례 집행위원은 16대 총선 때 전주 덕진구의 정동영 의원에게 도전장을 냈던 당찬 여성이다. 민주당 여성국의 서영교씨, 권양숙씨를 수행하던 이은희씨 등과 함께 대선 때 여성계 2002명 지지선언을 이끌어내는 데 앞장섰다.

개혁당 평당원인 시인 노혜경씨도 노 대통령의 여성인맥에서 빼놓을 수 없다. 노씨는 부산 노사모 초기 멤버이며, 선거 때도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안티조선 인터넷 사이트 ‘우리모두’에서 ‘빵아줌마’라는 필명으로 맹활약 중이다. 시인인 상지대 김정란 교수도 개혁당원으로 노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했다.

민주당 안팎에서 노 대통령 당선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수많은 여성들이 다 ‘노무현 여성인맥’에 속한다. 산부인과 의사로 이름을 날린 민주당 새정치여성연대 박금자 대표는 신낙균 전 의원이 국민통합21로 넘어가면서 생긴 공백을 훌륭히 메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수위에 참여했던 유승희 여성국장, 김은경 전 서울시의원, 유송화 전 노원구 의원, 홍미영 전 인천시의원 등도 노 대통령이 어려운 시절 여성정책 수립을 도왔다. 유 국장은 유종성 전 경실련 사무총장의 부인이며 유종근 전 전북도지사의 제수이자 노 대통령의 경제정책 수립에 기여한 유종일 한국개발원 교수의 형수이다.

인수위에 참여했던 이은영씨는 참여연대의 ‘맑은 사회만들기’ 본부장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역시 인수위 경제2분과에서 일했던 박기영씨는 경실련 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김병준 교수의 요청으로 노 대통령에게 환경과 과학기술 분야 정책에 관해 조언했다. 사회문화여성분과에서 일했던 정영애씨는 여성학 박사 1호를 기록한 이후 여성노동과 관련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충북도 여성정책관으로 5년째 일하고 있다.

양경숙·송미화·이경애씨 등 전국의 전·현직 여성의원들, ‘노사모’ 활동을 열성적으로 펼친 이은희(아름다운재단 근무)씨 등 드러나지 않았지만 누구 못지않게 노 대통령을 도운 전국의 수많은 여성들도 ‘노무현의 여성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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