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참여정부’ 발등에 떨어진 핵

449
등록 : 2003-03-05 00:00 수정 :

크게 작게

원자로 재가동 등 미국의 ‘레드라인’ 넘어서는 북한… 새 정부 외교안보팀은 착잡하다

사진/ 노무현 대통령과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의 회담. 부시 정권은 북한이 폐연료봉을 재처리할 경우 절대 용납치 않겠다고 쐐기를 박아놓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한반도 정세가 다시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과 동시에 북-미 사이에 예측 불허의 긴장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청와대라는 선장실의 문턱을 넘자마자 거센 풍랑이 몰아치는 꼴이다. 북한은 취임식 전날인 2월24일 은근슬쩍 지대함미사일을 시험발사하더니, 영변의 5MWe급 흑연 원자로를 다시 가동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고, 급기야 폐연료봉 재처리에 돌입할 기세다. 미국이 그어놓은 넘어서는 안 될 선, 이른바 ‘레드라인’을 막 넘어서려는 셈이다. 미국 부시 정권은 북한이 폐연료봉을 재처리할 경우 몇 개월 안에 5∼6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며 이를 결코 용납치 않겠다고 쐐기를 박아놓았다.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과 방송들은 다시 미국 국방부가 북한 핵시설에 대한 ‘은밀하고도 무시무시한’ 군사공격을 준비 중이라고 크게 보도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우발적 군사충돌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이런 현상만 놓고 보면 1994년 핵전쟁 직전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북한과 미국은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돌진하고 있으나, 그 당시처럼 탈출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김정일, 노무현 속뜻 탐색 중


사진/ 2월21일 오전 개성공단 육로답사팀이 경의선으로 향하고 있다. 핵위기가 있음에도 남북경협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연합)
북한의 <평양방송>은 2월24일 “선군정치야말로 우리 민족만 아니라 주변나라 인민까지 전쟁에서 구원하는 평화수호의 정치”라면서 군사적 긴장의 수위를 낮추지 않을 자세다. 북한의 이런 공세는 노무현 새 정부를 초반부터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북한의 최근 조처들은 어떻게든 전쟁을 막고, 미국을 설득해보려는 남쪽 노 정권의 입장이나 처지를 전혀 고려치 않는 행동들”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북핵과 관련해 국제사회에서 남한 당국의 영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북한이 어느 정도 남쪽의 입장을 헤아려야 하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노 대통령의 취임식 직전 평양을 다녀온 한 인사가 전한 “북한 지도부의 대미 강경자세가 누그러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귀띔도 우려를 더하고 있다. 더구나 그가 만난 김정일 국방위원장 측근의 말은 짧고 단호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핵문제를 놓고 남쪽 당국과 더는 협의할 게 없다는 기존 자세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남북 간에 한창 진행되고 있는 철도·도로 연결이나 개성공단사업 등은 차질 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아산이나 정부쪽 관계자들의 말을 모아보면 핵문제로 남북경협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 북한은 이미 금강산 육로관광길과 경의선 임시도로를 개통한 데 이어 지금은 개성공단 착공식 날짜를 조율하고 있다. 경협사업에는 북한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오는 터라 남쪽 당국이 더 진땀을 흘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쪽은 개성공단 착공이 노무현 새 정부 들어 처음 가시화하는 협력사업이라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고 공을 들이고 있다. 그래서 북한 실무자들은 핵문제로 개성공단 착공식이 늦춰질까봐 가장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북한의 이런 이중적 태도를 지켜보는 새 정부 외교안보팀의 마음은 착잡하다. ‘핵문제 따로, 교류협력사업 따로’로 나오는 북한 태도는 앞으로의 가시밭길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아직 낙담할 때가 아니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노 정부가 출범한 지 며칠이 지났다고 벌써 한숨소리를 내는냐는 투다. “아직 북한 당국과 대화다운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한 상황에서 속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견해가 일리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조만간 뾰족한 수가 나올 것 같지도 않다. 다른 정부 소식통은 “북한은 노 대통령을 우호적으로 보는 것은 확실해보이지만, 그렇다고 김대중-임동원 라인 때처럼 속을 터놓고 화끈하게 나올지는 아직 미지수”라고 말한다. 노 대통령이 김대중 정권의 대북 포용정책을 계승·발전시키겠다고 발언한 점이나, 미국의 부시 정권더러 일방적인 전쟁 위협을 자제하라고 경고하는 태도 등에 큰 기대를 걸고 있으나, 아직은 북한 지도부 내에서 좀더 두고 보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라는 지적이다. 북한이 어느 정도의 탐색기간을 두려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국정원을 포함한 새 정부의 대북 협상라인도 채 갖춰지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지금은 노 대통령이 인사를 마무리하고, 남북한 핫라인이 재가동에 들어가야 서로의 진의 파악과 현안인 북한 핵문제 대처방안이 논의될 수 있을 것 같다.

정상회담, 너무 뜸들이면…

사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속내는 무엇일까. 북한 지도부는 당분간 교류협력사업을 이어나가며 노무현 대통령의 속뜻을 좀더 떠보려 할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AP연합)

물론 이때 논의될 핵심의제에는 남북정상회담도 포함될 것이다. 노 대통령 진영은 결국 북한 핵문제의 지름길은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 설득하는 것이라는 데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한번 만나서 안 되면 또 만나는 식으로 정상회담이 이어지다 보면 정례화되고, 이 과정에서 한반도 냉전이라는 높은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미국과 주변 나라들이 북한 체제안전을 보장하고 대규모 경제지원을 약속하는 일괄타결방식이 한반도문제 해결의 궁극적 처방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이는 상당부분 김 위원장의 의지와 결단에 달린 문제다.

북한이 남쪽의 정상회담 구애를 받아들일지는 불투명하다. 지난번 임동원 특사 방북 때 이종석 대통령직인수위원까지 따라붙어 정상회담에 대한 북쪽 지도부의 의중을 떠본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쪽의 답변은 신통치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새 정부의 10대 국정과제 가운데 꼭대기에 있는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과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핵문제 해결이 선행되고, 이보다 앞서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이 성사돼야 하는 부담이 노 대통령을 짓누르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쉽게 정상회담에 응하리라고 보지 않는다. 북한이 국내정치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핵의 포기를 노 대통령이 요구할 게 뻔한 상태에서는 만나봐야 실리가 없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그렇지만 북한이 핵위기로 더는 기대할 게 없는 벼랑 끝에 몰릴 경우 전격적으로 정상회담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또 다른 뇌관인 대북 비밀송금 처리문제도 변수다. 전문가들은 노무현 정부가 이 건을 매끄럽게 마무리하지 못하면 큰 후유증을 남겨 앞으로 남북관계에도 타격을 줄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북한 지도부는 당분간 교류협력사업을 이어가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속뜻을 좀더 떠보려 할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지금의 북-미 긴장상태를 감안하면 북한이 지나치게 뜸들이는 것은 현명치 않아 보인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