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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열린 땅길로 분단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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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2-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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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비밀송금 뚫고 금강산 육로관광 개막… 마음의 경계 허무는 화해의 기폭제 될 건가

사진/ 동강난 남북을 잇는 금강산 육로관광길. 남쪽 비무장지대로 들어서는 시범 관광버스. (김종수 기자)

마침내 땅길이 활짝 열렸다.
남쪽의 각계 인사 466명은 2월14일부터 사흘 동안의 첫 육로시범관광을 무사히 마쳤다. 바닷길, 하늘길에 이어 땅길이 이어짐으로써 겉보기에 남북한은 더는 완전히 동강난 나라가 아니다. 지난 50년간 남북을 비정하게 가르고 있던 비무장지대 철책이 걷히고 국토의 혈맥이 다시 이어진 것이다. 바야흐로 일반인이 육로를 통해 자유롭게 남북한을 오갈 수 있으면서 남북관계는 새 장을 열게 됐다. 당장은 인적 교류가 크게 늘어나리라 예상된다. 20일부터 북쪽 가족·친지들을 만나러 가는 남쪽 이산가족들이 육로를 통해 북쪽땅을 밟으며, 21일부터는 일반인들의 본격적인 관광이 시작된다. 곧 금강산에서 마라톤대회가 열리고, 각종 세미나도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뱃길보다 3시간 단축… 인적 교류 확대


사진/ 군사분계선을 넘는 버스행렬. (김종수 기자)
임시도로는 군사분계선(MDL)을 중심으로 남북방 한계선까지 합쳐 3km에 이른다. 이 거리에 남북한이 철조망과 지뢰를 걷어내고 흙길을 다져 임시도로를 만들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남쪽의 강원도 고성군 송현리에서 북쪽의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사이다. 정식도로 공사가 마무리되면 이곳에는 남북한을 잇는 또 다른 혈맥인 동해선 철로가 놓인다. 남쪽 임시출입관리사무소(CIQ)에서 북쪽 CIQ까지는 약 30Km 정도다. 시속 10km의 느린 속도로 운전하면 1시간 좀 넘게 걸린다. 뱃길에 견주면 금강산에 닿기까지 3시간 정도를 줄이는 셈이다.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기 전까지 이곳은 그야말로 남북 냉전의 상징적 장소였다. 1970년대 북한은 군사분계선을 불과 300m 앞둔 곳까지 다가와 철책선을 설치하는 바람에 50년 가까이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이 사라진 적이 없었다. 주변 산악지대와는 달리 꽤 넓게 펼쳐진 평지에 남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이 그어진 이곳에는 “먼저 보고, 먼저 쏘자”라는 섬뜩한 팻말이 암시하듯 심심찮게 남북한 군인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래서인지 남쪽 관광객을 처음 맞는 북한군 초병의 눈초리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군데군데 자리잡은 북한군 막사의 인공기 깃발이 나부끼는 생경한 모습도 관광객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런 생경한 느낌도 잠시다. 냉전의 기운이 빠지는 모습들이 금방 시야에 잡혔다. 동해선 철도·도로를 잇기 위한 공사가 여기저기서 한창 진행되고 있었고, 현대아산이 공사 편의를 돕기 위해 북쪽에 제공한 트럭·불도저·포클레인도 곳곳에 늘어서 있었다. 푸른색 윗옷에 흰색 치마를 입은 50여명 취주악단의 연주가 관광객을 비롯한 남북한 군인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데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북쪽 민통선에 사는 아이들의 순박한 웃음과 관광객을 향해 손흔드는 모습에서 남북한의 봄날이 가까이 다가옴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학사장교 출신으로 군생활을 이 부근에서 마쳤다는 시범관광객 유진선(40)씨는 “북한의 인민군 장성이 남쪽 관광버스를 안내하는 장면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느냐.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감격스러워했다. 방송 사회자로 잘 알려진 임백천씨는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육로 경계가 없어졌듯 하루빨리 마음속 경계도 허물어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북한도 적극적, 외국인 관광객 유치계획

사진/ 시범관광단에는 주한외교사절단과 외신기자단이 포함됐다. (사진공동취재단)
북쪽의 자세는 적극적이었다. 기자가 만난 몇몇 북쪽 인사들의 첫 물음은 언제나 “동해선 철도·도로를 잇는 남쪽 공사는 어떻게 돼가고 있슴메까. 잘 돼가고 있갔지요”였다. 또 있다. “핵문제로 관광객이 줄거나 관광사업이 중단되는 일은 없갔지요.” 1994년 때와는 달리 핵위기 등 외부환경이 남북한의 인적·물적 왕래를 방해할까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는 북쪽의 방종삼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 사장이 육로관광 기념식 축사에서 “이것(육로관광)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치면 어떤 외세의 방해책동이 있다 해도 못 해낼 일이 없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다”고 말한 데서도 잘 읽힌다. 방 사장의 발언은 핵위기로 가능성이 커진 미국 부시 정권의 군사적 공격위협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북쪽에게는 금강산 육로관광이 미국의 무모한 공세를 약화시킬 수 있는 쓸 만한 예방책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많은 남쪽 주민들이 군사분계선을 수시로 넘나들면 미군이 함부로 북한을 어쩌지 못할 것이리라는 절박한 심정이 묻어난다. 북한은 앞으로 외국인 관광객들도 더욱 적극적으로 유치할 계획을 세워놓았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뿐 아니라 개성공단 착공과 경의선 철도·도로 사업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마무리할 태세를 보였다. 남쪽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평양과 주변지역 관광사업도 곧 시작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북쪽의 한 고위 인사는 “노무현 정권이 정식 출범하고 나면 남북한 사이 단합을 과시하는 좋은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넌지시 귀띔해주었다.

그렇지만 북핵과 비밀송금 파문에 따른 어두운 그림자는 금강산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다들 한편으로는 육로관광 실현이라는 고비를 잘 넘겼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저런 걱정들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도 함께 살얼음 위를 걷고 있는 현대아산과 북쪽의 아태평화위원회 고위 관계자들은 틈만 나면 대북 비밀송금 파문을 가라앉히기 위한 묘책들을 짜느라 머리를 맞대는 모습을 비쳤다. 육로시범관광이 실시되던 날인 14일 남쪽 정부쪽에서 비밀송금 관련해명을 한 탓인지 현대아산이나 북쪽 관계자들 표정은 그리 밝아보이지 않았다. 당장 비밀송금 파문의 불똥만이라도 더는 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느껴졌다.

유엔사의 간섭·엄격한 통제 등 풀려야

사진/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북한 여성 취주악단. (사진공동취재단)
유엔사라는 두꺼운 벽을 넘는 것도 난제다. 북한 핵위기가 고조되자 정전협정 당사자임을 부쩍 내세워 간섭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로관광길이 어렵사리 열린 연유도 따지고 보면 유엔사쪽 양보보다는 북쪽에서 기존 입장을 크게 누그러뜨렸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현지 군관계자들의 목소리다. 유엔사는 지금도 매우 깐깐한 자세를 굽히지 않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번 시범관광객 가운데 일부가 1박2일에서 2박3일 일정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뜻을 알려와 유엔사의 협조를 구했으나 그들은 뒤늦게 알려왔다는 이유로 단박에 거절했다”고 밝혔다. 또 유엔사는 남쪽 관광객들의 군사분계선 통과 허용시간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가뜩이나 비좁은 도로사정과 겹쳐 하루에 금강산을 오갈 수 있는 관광객 수가 당분간 수백명 단위에 머물 전망이다.

지난 몇해 동안 헤쳐온 가시밭길 못지않게 남북한이 앞으로 나아갈 길도 험난해보인다. 이번 첫 육로관광길은 뱃길보다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음에도, 98년 11월 수많은 국민이 보여준 탄성과 환희 장면의 일부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금강산=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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