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인사보좌관에 내정된 ‘시골사람’ 정찬용씨… “흙 속에 묻혀 있는 옥을 발굴하겠다”
청와대 인사보좌관에 내정된 정찬용(53)씨는 전남 영암 사람으로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 말투도 굵고 느릿느릿해 사투리의 질박감이 더하다. 그는 그 말로 경상도 땅에서 17년을 살았다. “전라도 말을 써야 매력 있다”라는 주위의 추임새도 있었지만, 지역감정의 벽에 정면으로 도전하겠다는 오기에서다.
옥살이한 뒤 대안학교로
그가 경남 거창의 한 농가에 들렀을 때다. 평소 일도 해주고 밥도 얻어먹어 잘 아는 할머니가 전라도 욕을 질펀하게 늘어놓았다. 주위 사람들이 민망해하며 “이 사람이 전라도 사람”이라고 하자, 할머니는 오히려 “거짓말하지 마라, 내가 아는 전라도 사람은 이런 사람이 절대 아니다”고 역정을 냈다. 뿌리 깊은 편견과 이를 부추기는 정치인의 이간질을 지켜보며 그의 전라도 사투리는 더욱 짙어져 간다.
그리고 그는 그 말씨로 시민운동의 불모지인 거창에서 모범적인 시민단체를 키워내고 “지역화합에 앞장서온 실천적 지식인”이라는 평을 받게 된다.
정 내정자는 앞으로 문재인 민정수석 비서관 내정자와 함께 새 정부의 고위직 인선작업에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정 내정자가 사람을 골라 추천을 하면, 문 내정자가 요모조모 뜯어보며 검증하는 기능을 나눠 맡았다. 문 내정자가 경남 거제 출신이니, 영호남의 절묘한 조합인 셈이다.
조선조로 따지자면 이들 자리는 관리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정랑에 해당한다. 선조 때 당파싸움이 벌어져 동인과 서인이 갈리는 계기도 이조정랑 자리를 놓고서 벌어진 다툼이다.
그때의 분열보다 결코 심각성이 떨어지지 않는 현재의 지역대결 구도에서도 ‘자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런 점에서 ‘변방’을 돌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온 정 내정자의 뚝심에 거는 기대가 가볍지 않다.
정 내정자는 광주제일고(14회)를 나와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대학교수가 꿈이었다. 2학년 여름방학 때까지만 해도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괜찮았다. 그러다 “세상이 이토록 더러운데 나 혼자 잘먹고 잘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운동에 뛰어들었다. 대학원 1학년 때인 1974년에는 ‘긴급조치 4호를 반박한다’는 내용의 유인물 5천장을 등사기로 밀어 뿌렸다. 결국 이 유인물 때문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고, 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선고받은 뒤 1년 정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소 뒤 친구들은 모두 서울에 남아 활로를 찾았는데 그는 우연찮은 기회에 거창으로 내려갔고, 이후 그의 비주류 인생역정이 본격화된다.
대학원 1학년 때 성대 국문과 학생이던 부인 임미경(52)씨를 만났으나 딱 5번 데이트를 하고 구속됐다. 인연이 아닌가 보다 했는데, 임씨가 옥바라지를 했고 이후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임씨가 75년 대안학교로 유명한 경남 거창고 국어과 교사로 부임하자, 당시 전영창 교장이 “민청학련사건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 정찬용씨 보고 한번 내려오라고 해라”고 말을 건넸다.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갔다가 전 교장의 권유로 교단에 서게 됐다. 79년까지 5년 동안 국어·영어·독어 등을 두루두루 가르쳤다. 부인과는 내려간 지 1년 만인 76년 결혼식을 올린다.
하지만 그는 교사자격증이 없는 무자격 강사였다. 문제가 되자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평소 관심대로 거창 YMCA 창립에 주력했으며, 이후 12년 동안 교육·농민·시민 운동에 정력적으로 뛰어들었다.
거창에 있으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 윤한봉씨 미국 밀항에 결정적 도움을 준 일이다. 윤씨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주도한 뒤 ‘마지막 5·18 수배자’로 불리며 힘든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정 내정자는 외항선 1등 항해사인 동생을 불러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며 도움을 요청했고, 동생은 기관사인 친구까지 끌어들여 성공적으로 윤씨 밀항을 성사시켰다. 80년대 초 살벌한 분위기라 세 사람 다 “들키면 죽을 각오를 했다”고 한다.
지역주의 타파가 그의 종교
정 내정자는 92년부터 활동무대를 광주 YMCA로 옮겼다. “남의 동네에서 그만큼 봉사했으면 됐으니 이젠 고향에 와서 봉사해달라”는 광주 시민사회 원로들의 부름을 받아서다.
광주에서도 그는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결성을 주도하고, 시민운동 영역을 환경·교육 등으로 확장시키는 데 주력한다. “지역주의 타파를 종교처럼 신봉한다”는 주변의 평가가 나올 정도로, 지역구도 해소를 위한 노력도 빠뜨리지 않았다. 2000년 4·13 총선 때 낙선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며 “민주당도 광주에서는 기득권”이라고 매섭게 몰아붙였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총선에서 낙선하자 광주 YMCA로 초청해 ‘바보 노무현’이라는 강연을 열도록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정 내정자는 스스로를 ‘촌닭’이라고 표현한다. 진짜 시골사람답게 전남 담양군 창평면에서 광주로 출퇴근하며 텃밭에서 푸성귀를 직접 길러 먹는다. 또 권부의 핵심요직에 기용됐는데도 “서울은 집값과 물가가 비싸서 생활비가 많이 들겠다. 조그만 아파트라도 세들어 살려면 빚을 내야겠다”는 걱정부터 한다.
이 때문에 “인사를 관장하는 자리엔 고도의 행정조직 원리와 인사기법에 능통한 프로페셔널이 요구되는데, 아마추어가 뭘 하겠느냐”는 비아냥거림도 들린다.
이에 대해 정 내정자는 “아름다운 꽃은 누구나 보면 알아볼 수 있다. 건강한 눈만 있으면 된다. 세상에는 흙 속에 묻혀 있는 옥이 많이 있다. 저는 일단 그것을 발굴하겠다. 진짜 옥인지 여부는 전문가들과 함께 검증하면 된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