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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적의 돈은 받지도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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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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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외국인 달러 유통을 전면 금지한 북한… 보복조처 또는 경제제재 대비한 포석

사진/ 북한 내에서의 달러 사용을 이적행위로 규정한 문건. 형사처벌까지 규정돼 있다.

북한의 호텔이나 외화상점, 외화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이 미국 달러화를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면 감옥까지 갈 각오를 해야 한다.

<한겨레21>이 최근 입수한 문건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내외국인의 달러 유통을 전면 금지하는 조처를 취하면서 북한 안에서의 달러 사용을 ‘이적행위’로 규정하고 형사책임까지 물을 방침이다. 이는 핵파문을 둘러싸고 북한이 미국에 품고 있는 반감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조처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달러 유통 금지가 외국과의 거래나 실리 확보에 별다른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파격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조처로 받아들인다.

미리 허리띠 졸라매기


통일부는 1월17일 ‘2002년 북한경제 종합평가와 전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국내 외화결제수단으로 달러 대신 유로화 사용을 결정한 것은 숨겨둔 외환관리 강화에 주력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으나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북한 당국이 외국인 호텔 등 관련기관에 내려보낸 통지서에 따르면 달러 사용은 곧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고 적시해 미국을 겨냥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에코 모스크바> 방송도 “북한은 미국이 핵개발 의혹을 부풀리고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려는 등 북한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킨 데 대해 보복조처로 북한 내 달러 사용을 금지했다”고 전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이번 조처가 미국의 경제제재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사전포석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핵문제가 순탄하게 풀리지 않아 미국이 제재를 가할 경우 달러 송금부터 막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북한이 미리 선수쳤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정보 당국의 한 관계자는 “달러벌이에 심혈을 쏟아온 북한이 달러 유통을 ‘기한도 없이’ 금지한 조처는 단순하게 볼 사안이 아닌 것 같다. 최근의 핵사태를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잘 입증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이번 조처는 핵사태에 임하는 북한의 장기전 대비 자세를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북한이 핵사태의 조기해결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미리부터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기에 나서면서, 미국으로부터 확실한 체제 안전보장을 받아내지 않는 한 갈 데까지 가보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북한 지도부는 최근 다시 고난의 행군 정신을 들먹이며 주민들의 결속과 인내를 부쩍 요구하고 있다.

환차손 위험 등 대비해야

북한은 지난해 12월 초부터 기본 결제수단으로 달러 대신 유럽연합(EU) 단일화폐인 유로를 쓰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건에 따르면 북한은 합영·합작 기업과 외국인 투자기업에게도 거래은행의 달러 계좌를 모두 없애고, 결제시에는 유로나 다른 나라 화폐로 바꿔 시행하라고 통지했다. 불가피하게 달러로 계약할 때는 건마다 내각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외국에서 북한으로 돈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로 유로나 다른 나라 화폐를 써야 한다. 남쪽 인사들을 비롯한 외국인 방문객들도 북한 안에서는 달러를 갖고 들어갈 수는 있으나 현지에서 사용할 때는 다른 나라 화폐로 바꿔야 한다.

얼마 전 북한을 다녀온 한 기업인은 “솔직히 달러를 번번이 유로로 바꿔쓰니까 계산도 두번해야 하는 등 꽤 불편했다”면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평양 내 외화교환소 환율표에 따르면 사는 기준으로 달러와 유로의 교환비율이 151 대 155로 유로가 조금 비싼 편이다. 앞으로 기업들은 북한과 거래시 환차손의 위험도 감안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달러 사용금지 조처가 나라 안팎으로 어떤 파장을 몰고올 것인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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