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민정계와 민주 동교동계의 권력분점 개헌 합창… 정계개편 최대 변수로 떠올라
연초 정국에 내각제 개헌론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새 대통령 취임식도 하기 전에 대통령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은 어색하다는 반론에 따라 일단 잠잠해졌지만 개헌론의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 개혁특위도 내각제 논의 중단의 시한을 ‘새 대통령 취임 때까지’로 못박았다. 새 정부 출범 이후엔 언제든 다시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왜 마음이 변했나
이번 내각제 개헌론은 여러모로 예사롭지 않다. 우선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 등 주요 3개 정당에서 일제히 제기됐다. 지난 1월3일 한나라당 이규택 총무가 “2004년 총선 때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함께 실시하자”고 주장했을 때만 해도 돌출발언 정도로 취급됐다. 그러나 13일, 이번엔 민주당 한화갑 대표가 “이제 내각제를 거론할 때가 됐다”며 꺼져가던 불씨를 되살렸다. 다음날엔 한나라당 개혁특위 정강정책 분과위원장인 이강두 의원이 “당론으로 내각제를 채택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풀무질을 했다. 내각제를 기치로 내걸고 탄생한 자민련이 두 손 들고 환영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한나라당이 내각제 개헌론을 들고 나온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김대중 정권은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한 DJP연합에 의해 창출됐다. 때문에 자민련은 줄기차게 내각제 개헌을 요구했다. 그때마다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으로 끝난 것은 제1당인 한나라당이 내각제의 ‘내’자만 나와도 고개를 모로 저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한나라당이 이번엔 먼저 내각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권력구조를 내각제로 개편하려면 헌법개정이 필요하다. 헌법개정을 위해선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137석), 또는 대통령의 제안이 있어야 한다. 국회의원 3분의 2(182석) 이상의 찬성도 필수적이다. 여기에 유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헌법개정이 확정된다. 그동안의 내각제 주장이 공허했던 것은 한나라당이 개헌을 완강히 반대해 헌법개정 정족수 확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나라당이 마음을 고쳐먹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나라당 의석(151석)에 자민련 의석(12석)을 더하면 163석. 여기에 민주당과 군소정당 등에서 20석만 더하면 개헌 정족수인 182석을 확보할 수 있다. 내각제에 우호적인 민주당 후단협 소속 의원들은 20명선을 넘는다. 과거의 내각제 개헌론이 기껏해야 연기밖에 피울 수 없었지만 이제 화톳불처럼 활활 타오를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이다. 내각제를 그토록 금기시했던 한나라당이 느닷없이 내각제 개헌론을 주장하는 것은 뜬금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나라당은 지난 대선 때까지만 해도 대통령제를 뼈대로 하는 개헌안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권오을 의원은 “대선에서 패배하자마자 곧바로 내각제 개헌론을 꺼내는 것은 치사하게 비친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속보이는 주장인 줄 알면서도 내각제 개헌론에 집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각제의 본질은 입법부가 행정부를 구성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국회의원을 배출한 여러 세력들이 권력을 골고루 나눠갖는 제도가 내각제다. 좋게 표현하면 권력의 균점이요, 나쁘게 말하면 권력 나눠먹기다. 이번 내각제 논의의 출발지점은 바로 여기다. ‘올 오어 나싱’(all or nothing) 새 정부의 진용이 짜이는 요즘 한나라당 의원들은 대선에서 이긴 쪽이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는 대통령제도의 속성을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병석 의원은 “집권에 대한 희망과 기대 속에 5년을 참았지만 이젠 더 못 기다리겠다는 의원들이 많다. 무슨 낙으로 정치를 하느냐는 얘기도 나온다”고 경북지역 의원들의 기류를 전했다. 집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던 한나라당 의원들로선 허탈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패기만만한 차기 주자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다음을 기약하기도 막막하다. 그러니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권력의 열매를 나눠먹는 내각제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미래연대 등 개혁파는 결사반대
민주당의 한화갑 대표가 내각제를 들고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선거과정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해 신주류의 퇴진 압력을 받고 있다. 대선에서 이긴 정당의 대표를 맡고 있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점에선 한나라당 의원들과 다를 게 없다.
내각제 개헌론은 17대 총선에 대한 이해관계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나라당의 영남권 의원들은 내각제를 하면 인구와 의석 수가 많은 영남권 정당이 제1당을 차지할 것으로 판단한다. 민주당 구주류인 호남권 의원들의 계산도 이와 비슷하다. 1당은 못 될지언정 2당은 가능할 테고, 그러면 충청권의 자민련 등 여타 세력과 연정을 모색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는 것이다. 충청권의 자민련은 내각제만이 권력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결론을 이미 오래전에 내렸다. 지역을 기준으로 형성된 현재의 정당구조 아래에서는 이처럼 내각제가 지역주의를 제도적으로 고착화하면서 더욱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내각제를 선호하는 세력이 지역에 강한 뿌리를 내린 다선의 중진의원들이라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다. 지난 6일 한나라당 경북지역 의원 16명 가운데 14명이 한자리에 모여 논의한 결과 내각제에 대한 의원들의 의견분포는 9(찬성) 대 5(반대)였다. 영남권 의원들의 내각제 선호도가 높다는 얘기도 되지만 거꾸로 한나라당 내부에서 내각제 개헌을 당론으로 모으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나라당의 개혁파 의원들은 내각제에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미래연대는 15일 성명을 통해 “패배주의의 발로이며 고착된 지역주의에 따른 정치적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고 확대하려는 의도”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가까운 민주당 신주류의 반대는 말할 것도 없다. 한화갑 대표가 개헌론을 끄집어내자 신주류 일부 의원들이 “새 대통령이 취임도 하기 전에 이럴 수 있는 것이냐”며 공개적인 반박을 준비했다. 그러자 당선자의 정치고문격인 김원기 의원이 “당의 분란을 키운다”며 만류했다. 이렇게 해서 민주당에선 이 문제가 조용히 넘어갔다.
내각제론자들은 임시국회 대정부질문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개헌론의 연기를 모락모락 피울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해도 개헌론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려면 시간이 좀 흘러야 할 것 같다. 한나라당 안택수 의원은 “지금 내각제 개헌을 꺼내면 권력에 환장한 사람들로 비치게 돼 있다”며 “총선이 다가오는 올해 하반기에 접어들면 논의가 무르익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나라당이 내각제 논의를 본격화하는 순간 정국은 요동치게 돼 있다. 한나라당은 찬반논쟁에 휩싸이면서 거친 소용돌이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민주당 일부 세력의 이탈 가능성도 있다. 결국 이는 정치판 전체를 새로운 틀로 재편하는 힘으로 작동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내각제 개헌론이 한나라당이 그토록 경계해 마지않는 정계개편의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정당개혁 물타기용인가
내각제 문제에 천착해온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내각제 개헌론의 이중적 측면을 이렇게 설명한다. “내각제 선호세력과 대통령제 유지세력의 대립은 국민들에게 ‘낡은 정치 대 새로운 정치’, ‘구세력 대 신세력’의 대립으로 비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총선에서 내각제 세력이 궤멸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한나라당은 내각제의 칼집만 잡은 형국이다. 한나라당이 칼집을 벗기면서 내각제 개헌을 공론화하는 순간 칼자루는 노무현 당선자와 민주당 신주류쪽으로 넘어간다.”
‘국민속으로’ 소속 한 의원의 지적도 신랄하다. “개헌은 어느 세력이 어떤 명분으로 추진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내각제 개헌을 말하는 세력은 퇴출압력을 받고 있는 영남의 민정계와 호남의 동교동계가 주축이다. 각 당에서 추진되고 있는 정당개혁에 대한 물타기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학자들은 신문에 개헌론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정치적 변동기가 닥쳤음을 예감한다고 한다. 정치적 변동기마다 권력구조의 변경문제가 논의됐기 때문이다. 권력의 구조를 논의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국민의 뜻을 담아내는 방향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의 유불리를 따지는 쪽으로 논의될 경우 추악한 권력욕에 사로잡힌 천박한 이전투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사진/ 이규택 한나라당·정균환 민주당 원내총무가 국회운영을 논의하고 있다. 이 총무는 최근 개헌론 불씨를 지폈고 정 총무는 오래전부터 내각제를 옹호해왔다. (이용호 기자)
한나라당이 내각제 개헌론을 들고 나온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김대중 정권은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한 DJP연합에 의해 창출됐다. 때문에 자민련은 줄기차게 내각제 개헌을 요구했다. 그때마다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으로 끝난 것은 제1당인 한나라당이 내각제의 ‘내’자만 나와도 고개를 모로 저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한나라당이 이번엔 먼저 내각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권력구조를 내각제로 개편하려면 헌법개정이 필요하다. 헌법개정을 위해선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137석), 또는 대통령의 제안이 있어야 한다. 국회의원 3분의 2(182석) 이상의 찬성도 필수적이다. 여기에 유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헌법개정이 확정된다. 그동안의 내각제 주장이 공허했던 것은 한나라당이 개헌을 완강히 반대해 헌법개정 정족수 확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나라당이 마음을 고쳐먹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나라당 의석(151석)에 자민련 의석(12석)을 더하면 163석. 여기에 민주당과 군소정당 등에서 20석만 더하면 개헌 정족수인 182석을 확보할 수 있다. 내각제에 우호적인 민주당 후단협 소속 의원들은 20명선을 넘는다. 과거의 내각제 개헌론이 기껏해야 연기밖에 피울 수 없었지만 이제 화톳불처럼 활활 타오를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이다. 내각제를 그토록 금기시했던 한나라당이 느닷없이 내각제 개헌론을 주장하는 것은 뜬금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나라당은 지난 대선 때까지만 해도 대통령제를 뼈대로 하는 개헌안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권오을 의원은 “대선에서 패배하자마자 곧바로 내각제 개헌론을 꺼내는 것은 치사하게 비친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속보이는 주장인 줄 알면서도 내각제 개헌론에 집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각제의 본질은 입법부가 행정부를 구성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국회의원을 배출한 여러 세력들이 권력을 골고루 나눠갖는 제도가 내각제다. 좋게 표현하면 권력의 균점이요, 나쁘게 말하면 권력 나눠먹기다. 이번 내각제 논의의 출발지점은 바로 여기다. ‘올 오어 나싱’(all or nothing) 새 정부의 진용이 짜이는 요즘 한나라당 의원들은 대선에서 이긴 쪽이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는 대통령제도의 속성을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병석 의원은 “집권에 대한 희망과 기대 속에 5년을 참았지만 이젠 더 못 기다리겠다는 의원들이 많다. 무슨 낙으로 정치를 하느냐는 얘기도 나온다”고 경북지역 의원들의 기류를 전했다. 집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던 한나라당 의원들로선 허탈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패기만만한 차기 주자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다음을 기약하기도 막막하다. 그러니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권력의 열매를 나눠먹는 내각제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미래연대 등 개혁파는 결사반대

사진/ 한나라당 개혁파(왼쪽)는 내각제에 반대한다. 한화갑 민주당 대표는 최근 내각제로 선회한 듯하다. (이용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