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언론 도마에 오르는 노 당선자의 386 참모들… 과거 3김식의 측근 냄새는 나지 않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386 참모들이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조선일보> 등 거대언론들은 이들을 ‘젊은 실세’라고 표현하며, 벌써부터 측근정치의 부활을 걱정해주고 있다. 민주당 안에서도 훈계조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호웅 의원은 1월6일 노 당선자와 민주당 선대위 간부들이 만난 자리에서 “노 당선자가 인수위 인선을 하면서 386세대 젊은 사람들과 얘기했다는데 이래선 안 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비슷한 또래의 일반 당직자들 사이에서도 “노무현 정부의 최규선이 될 수 있다”는 등의 부러움과 우려가 뒤섞인 경계성 발언들이 들린다. 그러나 노 당선자와 386 참모들 사이에는 독특한 문화양식이 있어, 과거 3김 시대에 나타났던 ‘주군과 가신’ 관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토론 때는 다리 꼬고 맞담배도 노 당선자는 지난해 12월26일 민주당 선대위 당직자 연수모임에서 “그 사람들은 저 개인에 대한 존경심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존경심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자신의 참모론을 피력했다. 언젠가는 노 당선자가 고분고분하지 않은 참모들에게 “너희들은 운동의 연장선상에 나를 선택해 찾아온 것이지, 내가 너희들을 고용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지”라고 볼멘소리를 한 적도 있다. 안희정씨의 경우 상당히 조숙한 운동권 학생이었다.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 대학생 형들과 광주 민주항쟁을 얘기하고 서클을 결성하려다가 계엄사에 끌려가고 퇴학을 당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생운동을 주도해 2차례나 투옥된다. 93년 한때 돈을 벌기 위해 무협지 찍는 출판사의 영업부장으로 전국을 돌며 수금을 한 적이 있는데, 한 낯선 도시의 여관방에서 “역시 행복한 삶이란 사회변화를 위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노 당선자에게 돌아온다. 복속된 관계가 아니니, 노 당선자와 참모들 사이에는 평등한 문화가 형성돼 있다. 토론 때면 서로 다리를 꼬고 맞담배를 피우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노 당선자는 승용차에 탈 때 자신의 수행비서를 조수석인 앞좌석에 앉히지 않는다. 뒷좌석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는다. 수행비서가 전화를 바꿔주거나 보고할 때 돌아앉는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흩어지고 모이는 것이 자유로운 것도 특징이다. 돈 잘 버는 변호사였던 노 당선자를 재야운동에 뛰어들게 한 부림사건의 주인공 이호철씨는 “선거 때마다 조용히 노 당선자 캠프를 찾아 선거운동을 하다가 선거가 끝나면 또 홀연히 사라지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들의 드나듦이 잦은 이유는 근본적으로 노 당선자의 ‘무능’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선거 때마다 떨어지니 국회의원 보좌관이나 비서관으로 데리고 있을 수 없었고, 돈 만드는 재주가 신통치 못하니 가난한 집 자식들이 한입이라도 덜기 위해 일찍 집을 떠나듯, 386 참모들은 필요할 때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헤쳐모여’를 반복했다. 황이수씨의 경우 96년 총선 때까지 노 당선자를 돕다가 선거에서 실패하자 먹고살기 위해 김홍신 의원 보좌관으로 취직한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는 다시 노 당선자에게 돌아갔으나 또 떨어지자 다시 김홍신 의원 방에서 일을 하게 된다. “나는 노무현 사람이다. 언제든지 돌아가게 해달라”는 게 황씨의 취직 조건이었고, 그는 그 말대로 2001년 초 노무현 캠프에 다시 합류한다.
노 당선자의 캠프는 거의 후원회비로 운영됐다. 노 당선자가 ‘얼굴’이니 당연 노 당선자의 몫이 제일 크지만, 참모들의 역할도 적잖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94, 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학교를 차린 일이다. “정치 지망생들을 상대로 입학금을 받자”는 사업 아이디어를 내고, 정치 기획과 홍보를 해 짭짤한 수익을 올린 것은 전적으로 참모들의 역할이었다. 심지어는 참모들의 사재가 출연된 경우도 있었다. 이광재씨와 서갑원씨는 한때 종로 청진동에서 ‘소꿉동무와 불알친구들’이라는 카페를 경영한 적이 있는데, 노 당선자가 다시 종로에 출마할 것에 대비해 근거지를 마련해두기 위한 것이었다. 386과의 동지적 믿음 이러다 보니 노 당선자도 캠프에서 일일이 영수증 처리해가며 돈을 타쓰는 처지였다고 한다. 노 당선자가 자신의 참모들을 ‘동업자’라는 상업적 용어로 부르는 데는 이런 속사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참모들은 “왜 노 당선자는 386하고 가까울까”라는 주제로 가볍게 한담을 나눈 적이 있다. 결론은 “노 당선자가 80년대 초반 사회의식에 눈을 떠, 386과 함께 세계관과 문화적 정서를 키워왔기 때문”으로 모아졌다. 거꾸로 보면 386 참모들은 80년대 자신들이 추구한 가치를 노 당선자에게서 찾았고, 노 당선자가 그 꿈을 실현해줄 수 있으리라는 ‘동지적 믿음’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백원우씨는 “내가 20살 때 가졌던 꿈을 노무현이라면 이뤄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고 표현했고, 윤태영씨는 “여의도 바닥을 떠나려고 했다. 그저 마지막으로 노 당선자와 원없이 일하고 싶었다. 대통령이 될 거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새로운 정치시대에 걸맞게 전혀 다른 유형의 참모상을 창출해낼지, 아니면 마약과도 같은 권력의 맛에 길들여질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노 당선자와 함께해온 지난 10여년에서 과거 3김식의 측근 냄새는 나지 않는다. 미래에 벌어질지 모를 우려에 대해서는 일단 미래에 맡겨볼 일이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사진/ 노무현 캠프의 파워맨들. 이광재, 배기찬, 서갑원, 윤태영 (왼쪽부터).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386 참모들이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조선일보> 등 거대언론들은 이들을 ‘젊은 실세’라고 표현하며, 벌써부터 측근정치의 부활을 걱정해주고 있다. 민주당 안에서도 훈계조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호웅 의원은 1월6일 노 당선자와 민주당 선대위 간부들이 만난 자리에서 “노 당선자가 인수위 인선을 하면서 386세대 젊은 사람들과 얘기했다는데 이래선 안 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비슷한 또래의 일반 당직자들 사이에서도 “노무현 정부의 최규선이 될 수 있다”는 등의 부러움과 우려가 뒤섞인 경계성 발언들이 들린다. 그러나 노 당선자와 386 참모들 사이에는 독특한 문화양식이 있어, 과거 3김 시대에 나타났던 ‘주군과 가신’ 관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토론 때는 다리 꼬고 맞담배도 노 당선자는 지난해 12월26일 민주당 선대위 당직자 연수모임에서 “그 사람들은 저 개인에 대한 존경심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존경심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자신의 참모론을 피력했다. 언젠가는 노 당선자가 고분고분하지 않은 참모들에게 “너희들은 운동의 연장선상에 나를 선택해 찾아온 것이지, 내가 너희들을 고용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지”라고 볼멘소리를 한 적도 있다. 안희정씨의 경우 상당히 조숙한 운동권 학생이었다.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 대학생 형들과 광주 민주항쟁을 얘기하고 서클을 결성하려다가 계엄사에 끌려가고 퇴학을 당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생운동을 주도해 2차례나 투옥된다. 93년 한때 돈을 벌기 위해 무협지 찍는 출판사의 영업부장으로 전국을 돌며 수금을 한 적이 있는데, 한 낯선 도시의 여관방에서 “역시 행복한 삶이란 사회변화를 위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노 당선자에게 돌아온다. 복속된 관계가 아니니, 노 당선자와 참모들 사이에는 평등한 문화가 형성돼 있다. 토론 때면 서로 다리를 꼬고 맞담배를 피우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노 당선자는 승용차에 탈 때 자신의 수행비서를 조수석인 앞좌석에 앉히지 않는다. 뒷좌석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는다. 수행비서가 전화를 바꿔주거나 보고할 때 돌아앉는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흩어지고 모이는 것이 자유로운 것도 특징이다. 돈 잘 버는 변호사였던 노 당선자를 재야운동에 뛰어들게 한 부림사건의 주인공 이호철씨는 “선거 때마다 조용히 노 당선자 캠프를 찾아 선거운동을 하다가 선거가 끝나면 또 홀연히 사라지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들의 드나듦이 잦은 이유는 근본적으로 노 당선자의 ‘무능’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선거 때마다 떨어지니 국회의원 보좌관이나 비서관으로 데리고 있을 수 없었고, 돈 만드는 재주가 신통치 못하니 가난한 집 자식들이 한입이라도 덜기 위해 일찍 집을 떠나듯, 386 참모들은 필요할 때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헤쳐모여’를 반복했다. 황이수씨의 경우 96년 총선 때까지 노 당선자를 돕다가 선거에서 실패하자 먹고살기 위해 김홍신 의원 보좌관으로 취직한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는 다시 노 당선자에게 돌아갔으나 또 떨어지자 다시 김홍신 의원 방에서 일을 하게 된다. “나는 노무현 사람이다. 언제든지 돌아가게 해달라”는 게 황씨의 취직 조건이었고, 그는 그 말대로 2001년 초 노무현 캠프에 다시 합류한다.

사진/ 천호선, 황이수, 김만수씨(왼쪽부터).
노 당선자의 캠프는 거의 후원회비로 운영됐다. 노 당선자가 ‘얼굴’이니 당연 노 당선자의 몫이 제일 크지만, 참모들의 역할도 적잖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94, 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학교를 차린 일이다. “정치 지망생들을 상대로 입학금을 받자”는 사업 아이디어를 내고, 정치 기획과 홍보를 해 짭짤한 수익을 올린 것은 전적으로 참모들의 역할이었다. 심지어는 참모들의 사재가 출연된 경우도 있었다. 이광재씨와 서갑원씨는 한때 종로 청진동에서 ‘소꿉동무와 불알친구들’이라는 카페를 경영한 적이 있는데, 노 당선자가 다시 종로에 출마할 것에 대비해 근거지를 마련해두기 위한 것이었다. 386과의 동지적 믿음 이러다 보니 노 당선자도 캠프에서 일일이 영수증 처리해가며 돈을 타쓰는 처지였다고 한다. 노 당선자가 자신의 참모들을 ‘동업자’라는 상업적 용어로 부르는 데는 이런 속사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참모들은 “왜 노 당선자는 386하고 가까울까”라는 주제로 가볍게 한담을 나눈 적이 있다. 결론은 “노 당선자가 80년대 초반 사회의식에 눈을 떠, 386과 함께 세계관과 문화적 정서를 키워왔기 때문”으로 모아졌다. 거꾸로 보면 386 참모들은 80년대 자신들이 추구한 가치를 노 당선자에게서 찾았고, 노 당선자가 그 꿈을 실현해줄 수 있으리라는 ‘동지적 믿음’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백원우씨는 “내가 20살 때 가졌던 꿈을 노무현이라면 이뤄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고 표현했고, 윤태영씨는 “여의도 바닥을 떠나려고 했다. 그저 마지막으로 노 당선자와 원없이 일하고 싶었다. 대통령이 될 거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새로운 정치시대에 걸맞게 전혀 다른 유형의 참모상을 창출해낼지, 아니면 마약과도 같은 권력의 맛에 길들여질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노 당선자와 함께해온 지난 10여년에서 과거 3김식의 측근 냄새는 나지 않는다. 미래에 벌어질지 모를 우려에 대해서는 일단 미래에 맡겨볼 일이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