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인적·정당쇄신 몸부림에 휩싸여… 권력투쟁 양상에도 낡은 정치틀 거부 한목소리
정치권에서 정당쇄신 요구가 용암처럼 솟구치고 있다. 이긴 민주당이나 진 한나라당 모두 흘러가는 모양새가 비슷하다. 양쪽 모두 요구의 주체는 수도권축의 초·재선, 소장, 개혁그룹이며, 현 지도부 등 지금껏 당의 주도권을 쥐어온 쪽의 전면 사퇴를 문제해결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현 지도부의 즉각적 사퇴가 좌절되자 비상특별기구 구성이라는 차선책을 통해 해법을 찾아가는 점도 닮은꼴이다. 인적쇄신 이외의 정당체질 개선방안에서는 한나라당쪽이 중앙당 폐지와 원내정당화를 강조하는 반면, 민주당쪽은 중앙당 기능축소와 당원과 대의원의 체질개선쪽에 무게가 있다.
총선 승리를 위해 대대적 수술 절실
쇄신의 물꼬를 튼 것은 선거 사흘 뒤 나온 민주당 의원 23명의 당 해체 요구 기자회견이었다. 선거에서 이긴 쪽에서 선수를 치고 나왔다. 한나라당에선 김영춘·김부겸·안영근 의원이 대통령 선거 당선자 무효소송 결정을 질타하며 지도부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냄으로써 촉발됐다.
복잡하게 얽혀 어지럽게 전개되는 당쇄신 논의의 큰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열쇠는 2003년 실시될 17대 총선 승리라는 두 당의 지상과제다. 지난 대선은 정치권이나 정치인이 시대적 흐름에서 뒤처지면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하는 쪽은 이 다음 선거에서도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 것이다. 두 당의 쇄신론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당 해체론을 들고 나온 민주당 의원들의 일성은 “민주당의 정권재창출이 아니라 국민의 승리”라는 말이었다. 두 당의 쇄신논란이 표면적으로는 주도권 다툼과 권력투쟁의 양상도 띠고 있지만 결국 낡은 정치를 거부한 국민의 뜻을 동력으로 삼아 ‘환골탈태’하기 위한 몸부림과 정당개혁 과정의 진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모두 변화와 개혁을 얘기하지만 흘러가는 모양새를 보면 그게 그렇게 간단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당을 주도해온 이들에겐 여기서 밀리면 주도권 상실은 물론 17대 총선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절박감이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다음 총선은 명실상부하게 3김의 영향력이 사라진 이후 치러지는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이고, 그런 만큼 변화의 폭을 가늠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3김의 우산 아래, 호남과 영남의 지역적 배경을 병풍삼아 비교적 손쉽게 금배지를 달아온 이들은 쇄신요구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먼저 민주당을 보자. 12월22일 당 해체를 촉구한 그룹의 주축은 정동영·신기남·추미애·천정배·정동채·정세균 의원 등 초선시절부터 푸른정치모임과 바른정치모임으로 이어지는 서클을 형성해온 재선그룹이다. 이들은 ‘거사’ 전후 빈번히 만나면서 나름의 쇄신 청사진을 토론한 것으로 전해졌다. 원래 이들이 추구한 최선의 방도는 즉각적인 당 해체와 신당 창당이었다. 하지만 당내 이견 등으로 여의치 않자 우선 당 지도부 교체를 통한 인적쇄신과 진성당원화, 대의원 물갈이 등 당의 체질과 구조개혁쪽으로 목표를 돌렸다. 이어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총선 이전까지 개혁국민정당과 외부의 개혁인사, 한나라당 내 개혁세력까지 아우르는 통합개혁신당을 만들고, 공천과정을 통해 ‘탈호남, 탈동교동’의 인적청산을 이루겠다는 장기구상이다. 이로써 총선을 승리로 이끌고 전국적인 기반을 갖춘 안정적 원내의석을 바탕으로 제도개혁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당내 지역구조 혁신… 대선 책임론 논란
노무현 당선자의 최근 발언을 되짚어보면 이들의 계획과 일면 맥이 닿는 부분이 있다. 26일 민주당 당직자 연수에서는 분권형 대통령제 운영과 개헌구상을 밝히면서 그 전제조건으로 지역구도 타파를 내걸었다. 이를 위해 중대선거구제를 꼭 실현하고 싶다는 의지도 피력했다. 그러나 실상 중대선거구제에 반대하는 현역 의원이 다수인 상황에서 이를 관철시키기는 어렵다. 선거구제 변경을 통한 지역구도 타파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우선 영·호남으로 양분된 현재의 지역정당구조의 틀을 뜯어고치는 게 불가피하다. 노 당선자가 “누가 막고 말리고 해서 될 상황이 아닌 것 같다”며 쇄신론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속도조절론을 얘기한 것은 쇄신의 진통과정에서 자칫 당이 둘로 나뉘는 최악의 상황을 염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노 당선자의 이런 어중간한 태도는 민주당 내부의 미묘한 역학관계를 반영하는 측면도 있다. 임채정·이해찬·이상수 의원 등 선거대책본부의 주축을 형성한 평민연 출신 재야파 의원들은 쇄신에 공감하면서도 방법론에서는 서명파 의원들과 약간의 편차가 있다. 정균환·박상천 최고위원 등 구주류쪽의 속내는 “선거에서 이긴 정당을 왜 해체하느냐”는 반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명분을 확보하지 못한 이들로선 민주당의 틀이 깨질 경우 17대 총선 생존마저 위태롭다. 사활이 걸린 만큼 격렬히 저항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당 대표 불출마를 선언한 한화갑 대표는 당내 여러 세력과 기류의 중간쯤에 걸쳐 있으면서 어느 쪽과도 협조할 수 있는 위치다. 서명파 의원들쪽에서도 한 대표와는 타협이 가능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선거 패배로 어수선한 한나라당 사정도 복잡하다. 김영춘·김부겸·안영근 의원은 ‘불가능했던 패배를 이뤄낸’ 지도부의 당선자 무효소송 제기결정을 ‘정치적 금치산자 선고’로 쏘아붙이며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켰고, 이는 연찬회를 통한 난상토론으로 이어졌다. 미래연대와 희망연대 등 초·재선 그룹의 공세에 밀려 대표직 사퇴를 선언했던 서청원 대표는 보수적인 영남지역 의원들의 지원사격을 받은 뒤 사퇴를 번복하는 해프닝을 연출했으나 결국 비상대책기구 구성을 통한 수습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물론 여러 계파가 고루 참여하는 비대위에서도 논란이 거듭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 내 논란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이회창’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을 상실한 당을 어느 세력이 주도하느냐를 둘러싼 다툼으로 비친다. 그러나 그 저류엔 이번 대선에서 표출된 민의를 어떻게 해석하고 당의 정체성을 어떻게 설정해서 다음 총선에서 재기할 것인가에 대한 하늘과 땅만큼의 시각차가 있다. “의원과 당이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국민의 이익을 위해 당이 깨질 각오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총선에서 대패한다”고 주장하는 김홍신 의원도 있지만, “민주당의 좌파적 개혁을 따라가선 안 된다. 우리는 민주당의 개혁과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김용갑 의원도 있다. 미래연대는 공식 성명을 통해 ‘미래지향적 중도개혁 정당으로 당의 정체성과 비전정립’을 강조했다. ‘개혁적 보수’, ‘합리적 보수’ 등의 수식어가 붙긴 했지만 한나라당의 이념적 주조는 ‘보수’였다. 그런데 이들은 개혁에 방점을 두면서 ‘보수’라는 글자를 아예 빼버린 것이다. 당권을 누가 거머쥐느냐의 문제를 떠나 17대 총선과 다음 대선 때까지 어떤 이념적 좌표로 당의 진로를 헤쳐갈지에 대한 인식의 골이 좁지 않음을 드러낸 셈이다.
누가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막으랴
좀더 근본적으로는 민정계, 민주계, 재야와 민중당 등 이질적인 집단이 혼재된 한나라당의 근본적 모순이 표출되는 측면도 있다. 김영춘 의원은 말한다. “한나라당의 다수 주류는 생각의 시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던 20년 전 과거에 머물러 있다. 당이 젊은 세대의 바람을 담아낸 혁신 프로그램을 완성해 민주당과 개혁을 경쟁하는 과정에서 전체 정치의 모습도 변모해갈 것이다.”
여야에서 분출되고 있는 쇄신요구가 정치권의 패러다임 자체를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탄력을 받을지는 아직 안갯속이다. 분명한 것은 어느 한쪽이 깨지면 다른 한쪽도 흔들리게 돼 있다는 것이다. 2001년 말 민주당이 선도한 국민경선제와 당정분리 등의 제도개혁은 박근혜 의원의 탈당 등 한나라당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전례가 있다.
두 당 모두 당권을 거머쥔 쪽의 격렬한 반발로 쇄신논의가 다시 한번 지지부진해지면서 정당개혁 논의가 용두사미로 흐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시대의 도도한 흐름이 확인된 이상 정치권이 이를 거스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5개월 남짓 남은 17대 총선은 이런 정치권 변화의 흐름을 총결산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사진/ "지금은 삼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민주당 개혁성향 의원들이 12월22일 당 해체 요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복잡하게 얽혀 어지럽게 전개되는 당쇄신 논의의 큰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열쇠는 2003년 실시될 17대 총선 승리라는 두 당의 지상과제다. 지난 대선은 정치권이나 정치인이 시대적 흐름에서 뒤처지면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하는 쪽은 이 다음 선거에서도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 것이다. 두 당의 쇄신론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당 해체론을 들고 나온 민주당 의원들의 일성은 “민주당의 정권재창출이 아니라 국민의 승리”라는 말이었다. 두 당의 쇄신논란이 표면적으로는 주도권 다툼과 권력투쟁의 양상도 띠고 있지만 결국 낡은 정치를 거부한 국민의 뜻을 동력으로 삼아 ‘환골탈태’하기 위한 몸부림과 정당개혁 과정의 진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 한화갑 대표는 차기 당권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겨레 이정우 기자)

사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라." 한나라당 국회의원·지구당위원장들이 12월26일 연찬회를 가졌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사진/ 12월26일 연찬회에서 서청원 대표는 사퇴의사를 번복했다. (류우종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