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부시의 초강수 맞불작전 점입가경… 위험한 도박은 정녕 파멸을 부를 것인가
미국 부시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기싸움’이 불붙기 시작한 걸까. 김 위원장을 ‘혐오한다’는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끝내 무시하고 있다. 김 위원장도 벼르고 있었다는 듯 부시 대통령의 가뜩이나 넉넉지 못한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 북한은 워싱턴을 겨냥해 줄곧 강조해온 ‘전쟁에는 전쟁, 대화에는 대화’ 주장이 빈말이 아님을 증명이나 하듯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10월 초 미국 제임스 켈리 특사의 핵개발 증거 제시와 이에 대응한 북한의 핵프로그램 시인, 미국의 중유공급 중단 결정과 미사일 선박 나포, 이에 발끈한 북한의 핵동결 해제 수순밟기 등 장군멍군식 주고받기는 양쪽의 한치 양보 없는 신경전을 그대로 보여준다.
장군멍군식 신경전… 성격·리더십 차이
북-미 관계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최근 사태를 부시와 김정일 사이의 진흙탕 싸움의 본게임이 시작된 것으로 평가한다. 부시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못지않게 김 위원장을 사악한 지도자로 생각한다. 어차피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맞붙어 싸울 수밖에 없는 사이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꺾이지 않는 한 날카로운 대치관계는 쉽게 해소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부시는 <워싱턴포스트>의 봅 우드워드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 위원장한테 본능적인 반감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북한 주민들을 굶주리게 하고 있고, 북한 주민들의 가족을 붕괴시키고 고문하는 데 쓰이는 거대한 정치수용소를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김 위원장도 이런 부시 대통령을 상종 못할 인물로 간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의 근본적인 성격과 리더십 차이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북한이 핵시설을 재가동하겠다고 나섬으로써 이제 부시가 뭔가 보여줄 차례가 됐다. 북한은 미국의 잇단 선제공격 독트린 발표 등 섬뜩한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동지역에 스커드 미사일 수출을 단행했고, 핵동결 해제라는 맞공세를 취하고 있다. 미국도 미사일 수출에 대해서는 미사일을 실은 선박을 나포하는 등 준전시행위나 다름없는 해상봉쇄를 감행했다. 하지만 수입국인 예멘의 요구로 하룻밤 만에 선박을 돌려줘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보기 좋게 한방 먹은 꼴이다. 이제 관심사는 북한의 핵시설 재가동 선언에 대해 미국이 어떤 대응수를 던지느냐에 쏠려 있다.
지금까지 나온 미국의 반응은 뜻밖에 밋밋하다. 부시 대통령은 “나는 외교적 압박과 우리의 공조가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기 개발 희망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수 있길 바란다”고 12월13일 < ABC >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백악관 대변인은 이와 별도로 낸 성명서에서 “미국은 위협이나 깨진 약속에 응하여 대화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며, 또 우리는 북한이 서명한 조약이나 합의를 지키도록 하기 위해 협상을 하거나 유인책을 제시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겉보기로 평상심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따라서 당분간은 우방과의 공조를 통한 정치·외교적 압박을 가하는 것이 유일한 수단일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은 이라크와의 전쟁에 총력을 집중할 때라 북한 문제에 한눈을 팔 여력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북한의 저돌적 공세가 계속될 경우에도 외교적 해법만 추구할지 전문가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북한의 잇단 초강수가 부시 정부를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라는 데 이의를 다는 이는 거의 없다. “북한이 아무리 많은 핵과 미사일을 갖고 있어도 그 자체로는 생계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쌀이나 경제로 바꿔야 쓸모가 있게 되는 셈이다. 핵과 미사일은 북한 정권에게는 어디까지나 밥이요 경제다. 체제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물건인 셈이다. 부시 정권이 이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들은 북한 핵과 미사일을 애써 살상무기로만 파악하려 든다.” 90년대 초반부터 북핵 문제를 지켜봐온 통일부 관계자는 미국의 처사가 못마땅하다. 그에게도 최근의 사태는 부시와 김정일의 자존심 싸움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양국 정상의 자존심 대결 갈수록 태산
하지만 그는 부시가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다고 비아냥거린다. “부시가 주먹은 더 셀지 모르지만, 머리로는 아마 그(김정일)를 이기기가 녹록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김 위원장은 이미 현 부시 정권 못지않게 북한을 호전적으로 대했던 과거의 여러 정권들을 겪어왔다. 판문점 포플러 사건을 필두로 94년의 핵, 98년의 미사일 위기 등 전쟁 코앞까지 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결국 미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혔다. 각종 제재의 효과가 외부 세계와의 의존도가 낮은 북한에는 잘 먹히지 않는데다, 한반도의 독특한 지정학적 특징으로 미국이 섣불리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노린 벼랑 끝 외교의 결과다.
일각에서는 북한도 너무 위험한 도박을 벌이는 게 아니냐는 시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얘기라고 일침을 놓는다. 북-미 관계의 지난 역사를 들춰보면 미 행정부는 북한이 고분고분하게 나올 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는 것말고 다른 정치·경제적 관계개선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94년의 핵개발 시도나, 98년의 장거리 미사일 실험발사, 정전협정을 무력화하기 위한 판문점 무력시위 등이 발생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북한과 협상에 나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핵개발 포기선언을 하지 않을 바에는 정면돌파만이 살길이라고 본다는 얘기다. 미국의 잇단 경고에도 중동 예멘에 미사일 수출을 강행한 점이나, 이번에 핵동결을 풀겠다고 선언한 점 등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조처다. 그래서 북한 지도부의 속성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부시 정부가 그래도 무시하면 실제로 핵시설을 재가동할 뿐 아니라 더한 강경책을 들고 나오리라고 본다. “북한은 부시가 북한을 침공하지 않겠다느니,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겠다느니 하는 말들이 다. 이라크전을 겨냥한 시간벌기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북한은 미국 대통령이나 정치인, 관료들의 말을 절대 믿지 않는다. 이는 지난 10여년간도 그렇게 속아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임 부시나 클린턴 정권에서 북한과 협상을 할 때마다, 핵공격이나 위협을 안 하겠다느니, 북한의 주권을 인정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10여 차례 했음에도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불평하고 있다. 미국이 북한 체제를 불신하는 것 못지않게 북한도 미국 정부를 믿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최근 미사일 선박 나포 사건을 통해서도 입증되는 대목이다. 일반적으로 해상봉쇄의 하나인 외국 선박의 강제 나포는 준전시행위로 간주된다. 부시가 입만 열면 북한 핵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겠다고 해놓고서 해상봉쇄를 감행한 사실은 북한의 불신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부시 정권의 대응 논리나 입장이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합의 저버려 불신… 출구 없는 압박
부시 정권은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놓지 않고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상대에게 명분 있게 빠져나갈 출구를 마련해주고 협상해야 한다는 위기관리의 기본원칙도 내팽개쳐버린 셈이다. 미국의 요구대로라면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농축 우라늄에 의한 비밀 핵개발 계획을 포기하는 길뿐이다. 북한은 이를 “미국이 힘으로 우리를 무장해제시켜 우리 제도를 없애버리려는 기도’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사태 전개를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북한은 차례차례 순서대로 다음 조처들을 취할 것이다.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 등 핵시설 재가동→플루토늄 추출→핵무기 제조 등 이른바 ‘핵연료 사이클’을 밟으리라 짐작된다. 물론 북한은 가급적 뜸을 들이며 미국의 태도변화를 기다릴 것이다. “우리가 핵시설을 다시 동결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미국에 달려 있다”고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12일 밝힌 데서도 잘 드러난다. 핵무기를 당장 수중에 넣는 것보다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핵을 매개로 한 확고한 체제안전 보장을 원하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특히 북한의 초강수를 이라크 다음 공격 대상이 아니라는 보장을 얻어내려는 절박한 몸부림으로 본다. 따라서 지금 북한이 잇달아 취하는 대담한 조처들은 이라크전에 전력을 집중한 미국이 당장은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약점을 알기 때문에 나온 고도의 노림수라고 분석한다. 미국과의 대화나 협상채널이 단절된 상태에서의 이라크전 종결은 그야말로 북한에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보인다. 따라서 지금 북한으로서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게 초미의 과제인 셈이다.
물론 부시 정권은 마냥 두고만 보지는 않으리라 짐작된다. 핵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의 비확산을 절체절명의 정권 과제로 삼고 있는 부시 정권이다. 부시는 11일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과거의 적대국가와도 손잡을 수 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부시 정부의 대응 태도는 사태를 다소 안이하게 보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조지프 리버먼 상원의원은 15일 < ABC >와 회견에서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계획을 둘러싼 위기상황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며 “북한과 직접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북한에 군사행동 위협을 가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지만, 기다려가며 강력한 외교를 사용할 만한 여유도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차기 상원 외교위원장으로 내정된 리처드 루가 의원도 “북한이 한국과 일본 및 인접 국가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북한을 오판해서는 안 된다”며 “한번에 한 가지씩 처리한다는 것은 이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미 외교정책에 만만치 않은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뉴욕타임스>도 사설을 통해 부시 행정부는 북한 핵문제에 대해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며 지금은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가능한 최대의 도움을 이끌어내는 등 총력 외교전을 펼칠 때라고 촉구했다.
북한 무시전략에 부시가 당할 수도
따라서 부시 정권이 북한 무시전략을 고집하면서 시간끌기에만 매달린다면 진퇴양난에 빠질 수 있는 쪽은 부시 대통령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테러와의 전쟁에 막대한 차질을 빚을 수 있고, 언젠가는 국제사회 여론도 부시 정권에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국제사회는 9·11 테러의 상처를 안고 있는 부시 행정부의 입장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이라크·이란·북한의 위협을 크게 부풀려 무리한 군사행동을 감행하려는 속셈에 눈쌀을 찌푸리고 있다. 마침 악의 축 국가의 하나인 이란도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부시 정부의 대테러 전선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부시가 지목한 이른바 ‘악의 축’ 세 나라가 한꺼번에 준동하고 있는 셈이다. 부시 정부는 대량살상무기 위협 국가들의 기를 사전에 꺾기 위해 무시무시한 선제공격 독트린의 날을 세워왔지만, 정작 악의 축 국가들은 더 기고만장하는 형국이다. 부시 정부가 이들을 한꺼번에 해결하기에는 아무래도 힘이 크게 부쳐 보인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사진/ 부시 대통령의 북한 해법은 무엇일까. 부시 정권은 북한 무시전략을 고집해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 (GAMMA)

사진/ ‘전쟁에는 전쟁, 대화에는 대화’. 지난 12월12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안남도의 토지정리사업 현장지도를 하고 있다. (연합)

사진/ 미국은 예멘행 미사일을 실은 북한 화물선을 공해상에서 나포했다가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양국 관계는 초강경 대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AFP연합)

사진/ 미국 매파의 선봉인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12월12일 카타르 도하 인근에서 모의전쟁 훈련 ‘인터널룩’을 벌이는 미·영 병력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FP연합)

사진/ 북한의 핵동결 해제선언 해법은 협상뿐이라는 지적이다. IAEA 봉인 감시대상 핵시설이 있는 평안북도 영변 모습. (AP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