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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단풍 재점화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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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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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 단일화 효과 소멸 위기서 기사회생… 선거공조 앙금 세력다툼으로 이어질 수도

사진/ 지난 12월8일 정몽준 대표가 울산의 한 교회에서 부인 김영명씨와 함께 기도하고 있다.(연합)
지난달 25일 여론조사에 의한 후보단일화에 승복하고도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의 회동에 소극적이었던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우여곡절 끝에 지난 12월13일 노 후보와 마침내 전격 회동했다. 그리고는 그의 말마따나 ‘사내답게’ 화끈하게 밀어주겠다며 대선 막바지까지 노 후보와의 공동유세뿐만 아니라 강원도와 충청도를 따로 돌며 지원유세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그동안 공동정부 지분 요구와 관련해 ‘몽니’를 부렸다는 의혹이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13일 회동에서 향후 5년간 국정을 공동으로 책임지고 운영하겠다는 데 합의했다. 두 사람 간에 팬 골은 외형상 어느 정도 메워진 것으로 보이지만, 양쪽 진영의 신경전은 아직 끝나지 않은 분위기다. 공동정부 운영과 관련한 명확한 언급을 당선 이후로 미뤄둔 상태기 때문이다. 이날 회동이 있기까지 양당 수뇌부들은 보이지 않는 끈을 잡고 엄청난 힘겨루기를 한 게 사실이다. 공식 채널인 양당 정책위의장 라인뿐만 아니라 공식, 비공식적으로 6~7개 접촉 창구에서 물밑협상을 계속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밑협상 과정서 엄청난 힘겨루기


사진/ 국민통합21은 후보단일화 이후 공동정부 지분을 요구하며 노 후보를 압박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정 대표의 의중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정 대표쪽의 한 고위 당직자는 지난 11일을 ‘마지노선’으로 정한 뒤 노 후보쪽의 대폭 ‘양보’를 요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공동정부 지분에 대한 노 후보의 전폭적인 배려가 없으면 합의를 깰 수도 있다는 배수진을 친 것이다. 심지어 문서를 통해 노 후보의 공식서명을 요구하며 공동정부 참여보장을 요구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재회동을 하루 앞둔 12일 낮 두 사람의 전화통화가 이뤄지기 1시간여 전까지도 정 대표쪽은 이른바 ‘최후통첩성’ 메시지를 던지는 등 강경 분위기로 일관했다. 이날 홍윤오 대변인은 ‘대선공조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까지 냈다. 선거와 정책공조, 정부운영의 공조는 서로 분리하여 해결할 수 없는 불가분의 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못박았다. 홍 대변인은 이어 “민주당이 정부 운영의 공조를 위한 양당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후보단일화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유감스럽다”는 경고 메시지도 곁들였다.

그러나 정 대표쪽의 이러한 강경기류는 통합21 내부에서도 엄청난 반발을 야기하는 등 부작용도 불러일으켰다. 11일 오전에는 민주당과의 2차 협상단장이었던 민창기 대표 정책특보가 “정 대표는 노 후보 지원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성명서를 던지고 탈당해 당내 분란 확산에 불쏘시개 구실을 했다. 이날 밤 긴급 소집된 확대당직자회의에서는 이른바 정 대표의 ‘복심’으로 불리는 일부 ‘왕당파’ 세력을 제외한 특보단과 대다수 당직자들이 노-정 회동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을 집단적으로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노-정 회동이 지연되면서 국민에게는 통합21이 자리 나눠먹기에 혈안이 된 것처럼 비치는 것은 좋지 않다”며 결단을 촉구한 데 대해 정 대표는 크게 역정까지 냈다는 후문이다. 핵심 측근인 민 특보의 항의성 탈당에 이어 대다수 당직자들의 집단 반발 등 당 안팎의 분위기가 악화되자 정 대표도 적잖이 당황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욱철 전 의원이 재회동 성사에 기여

12일 오전까지 이어진 당내 강경기류의 물꼬를 돌린 것은 통합21의 직능위원장인 최욱철 전 의원이다. 충북 제천에서 유세를 준비하던 노 후보가 이날 오전 11시37분께 통합21쪽 인사 가운데 자신과 가장 절친한 최 전 의원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정 대표와의 통화 주선을 요청한 것이다. 이 시각, 정 대표는 12층에서 자문교수 및 특보단 회의를 주재하면서 당 안팎의 기류를 보고받고 있었다. 연락을 받고 9층 대표실로 돌아온 정 대표는 곧바로 최 전 의원을 시켜 노 후보에게 전화를 다시 걸도록 했으며, 결국 다음날 9시 재회동을 공식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날 마침 중요한 점심 약속을 앞둔 정 대표는 이 통화가 곧바로 연결되지 않았더라면 노 후보와의 통화를 포기하고 당사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게다가 최 전 의원이 다시 노 후보 비서진에게 전화를 건 시각에 노 후보는 마침 유세 단상에 올라간 상황이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비서진의 답변에 최 전 의원은 “통합21 정 대표가 급히 통화를 원한다”는 메모를 단상에 전해달라고 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유세까지 중단한 노 후보가 단상 밑으로 급히 내려와 최 전 의원의 전화를 받음으로써 역사적인 화해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최 전 의원은 이와 관련해 “당시 두 사람 사이에서 전화로 오고간 20분은 정말로 피말리는 순간이었다”고 술회한다. 만약 정 대표가 약속을 이유로 전화통화를 포기하고 그때 당사를 떠났든지, 아니면 노 후보쪽 비서진이 연설을 빌미로 전화를 끝까지 바꿔주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의 공조유세는 좀더 지연되거나 물건너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노 후보와 정 대표 두 사람 간의 복잡하게 얽힌 감정의 실타래를 푸는 데 일조한 최 전 의원은 정 대표와는 학군단 선후배 사이다. 정 대표가 나이는 2살 위이며, 기수는 1기수 위다. 정 대표가 처음 통합21을 만들었을 때 강신옥 전 창당기획단장과 함께 1등 창당 공신으로 지목할 만큼 그는 핵심 측근 중에 측근으로 통한다. 지난 9월17일 정 대표가 대선출마를 공식선언할 때부터 지금까지 연고지인 강릉을 떠나 서울 여의도 당사 인근 호텔과 해군회관 장교숙소 등을 전전하며 자기 돈을 써가면서 정 대표를 보좌해왔다.

노 후보와는 지난 1993년 6·11 강원 명주·양양 보궐선거 때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진득하게 작용하고 있다. 당시 ‘꼬마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한 최 전 의원은 당선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지도부의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김명윤 후보와 벅찬 싸움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이때 홀연히 강원도에 나타나 6월 초부터 7박8일 동안 홀로 선거현장에서 최 전 의원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사람이 노 후보였다. 노 후보는 선거 막바지에 중앙당사로 철수하면서 최 전 의원에게 선거자금에 보태라며 지갑 속에 묻어둔 비상금 500만원을 그의 손에 쥐어주고 갔다. 두 사람의 역사적인 회동은 이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었던 최 전 의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노 후보가 당선되면 당장 정 대표의 향후 정치적 위상과 몸값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솟을 전망이다. 그러나 거꾸로 정치적 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당 안팎에서 심심찮게 들린다. 이미 ‘지분협상’ 과정에서 정책조율을 핑계로 선거공조에 미적거린 모습이 국민에게는 이미 상당부분 부정적으로 각인된 상황이다. 더욱이 일부 보도를 통해 정 대표가 차기 총리와 함께 외교·국방·안보 분야 및 ‘민감한 자리’까지 요구했다는 소리가 들리면서 그의 신선미도 약간 맛이 갔다는 혹평까지 흘러나온다.

노 후보 당선되면 정 대표가 총리될까

사진/ 노·정 단일화는 우여곡절 끝에 합동유세로 이어졌다. 지난 12월13일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대표가 서대전광장에서 처음으로 합동유세를 벌였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정치권에서는 노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정 대표가 첫 총리를 맡기는 힘들 것으로 내다본다. 내년 2월까지 정계개편이 대폭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한 정 대표가 한나라당의 반대로 총리 인준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리라는 예상 때문이다. 이럴 경우 자신이 천거하는 인물을 차기 총리와 주요 각료자리에 추천할 수도 있지만, 민주당 내부의 역학관계상 이것마저도 정 대표의 구상이 100%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이 때문에 통합21의 한 핵심 당직자는 “이런 정황을 감안할 때 오히려 노 후보가 당선된 뒤 연말부터 이른바 ‘범여권 1인자’ 자리를 놓고 민주당과 통합21 사이에서 엄청난 물밑싸움이 전개될 개연성이 아주 높다”고 우려했다.

최익림 기자/ 한겨레 정치부 choi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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