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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다시 문 앞에 선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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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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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길 후보 TV 토론 효과로 두 자릿수 득표율 노려…“이 후보 지지기반도 흔든다”

사진/ 민주노동당은 텔레비전 토론 이후 한나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저소득·저학력·고연령층 지지가 옮아오고 있다고 분석한다.
한국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진보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진보당’의 조봉암은 지난 1956년 5월15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총투표수 906만표 가운데 216만표(24%)를 얻었다. 한국전쟁 이후 남쪽의 좌파세력이 거의 ‘박멸’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이 지지율은 경이적인 것이었다. 장상환 교수(경상대·경제학)는 <진보정당을 말한다>(도서출판 책벌레)에서 “일제시대에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며, 정부 수립 뒤 농림부 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의 개인적 정치력과 (반북·반공주의에 기초한 평화통일론 등) 현실주의적 접근이 일정한 지지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58년 5월의 제4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진보당의 당세 확장을 두려워한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북한의 주장과 같다며 조봉암 위원장을 비롯해 박기출·김달호·윤길중 등 주요 간부 10여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진보당의 등록은 취소됐고, 조봉암은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후 30년 동안 국가보안법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른 군사정권 아래서 몇 차례 진보정당의 실험이 있었지만 번번이 좌절되기 일쑤였다. 한 가지 역설적인 것은 전두환 정권 시절인 81년 3월 총선에서 민주사회당이 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전두환 정권이 사회주의인터내셔널 가맹국과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해당 선거구에 여당 후보를 내지 않은 정책적 배려의 결과였다. 이를테면 ‘어용 진보정당’인 셈이다.

30년에 가까운 공백기를 거쳐 진보정당의 실험이 본격화한 것은 87년 6월항쟁 이후다. 당시 사회 전역에 불어닥친 민주화 열풍 속에 한겨레민주당, 민중의 당 등 진보정당이 탄생했지만 실제 선거에서의 성적은 비참한 수준이었다. 특히 대통령 선거에서는 더했다. 92년 14대 대선에 나선 백기완 후보는 23만8648표(1.0%), 97년 15대 대선에서 출마한 국민승리21 권영길 후보는 30만6026표(1.2%)를 받아 모두 1%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16대 대선은 어떨까

숙명적 과제 ‘사표의식’


사진/ 조봉암의 꿈은 이루어 질 것인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진보당 사건 관련자들.
민주노동당은 이번 대선에서 150만표 정도는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150만표는 투표율을 80%가량으로 봤을 때 5%에 해당하는 지지율이다. 상황이 좋으면 두 자릿수 지지율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런 낙관적 전망은 텔레비전 토론에서 비롯한다. 민주노동당은 올해 6·13 지방선거에서 134만표(8.1%)를 얻어 자민련을 제치고 명실상부한 제3당이 됨으로써, 대선 텔레비전 토론회 참가 자격을 따냈다.

막상 토론회 뚜껑이 열리자 이런 기대는 현실로 나타났다. 권영길 후보는 지난 12월3일 열린 첫 텔레비전 토론회의 최대 수혜자로 꼽힌다. 네거티브전을 펼치는 이회창·노무현 두 후보 틈바구니에서 참신한 공약 제시와 기존 정치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정치 냉소주의에 젖어 있는 국민에게 ‘후련하다’는 인상을 줬다. 지난 97년에 이어 두 번째 대선 출마지만, 권 후보에게는 이 토론이 정치적 데뷔 무대인 셈이었다. 이상현 민주노동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미디어대책위원장은 “언론에서 ‘권영길 신드롬’이라고까지 했을 정도로 텔레비전 토론 다음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입에 올린 사람이 권 후보다. 5년 전 군소후보로 참여했을 때와 견주면 혁명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사진/ 150만표를 향해. 지난 12월4일 권영길 후보가 경기도 광명시 기아자동차 공장 앞에서 출근하는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토론회 이후 실시한 몇몇 조사결과에서도 권 후보 지지율이 급등세를 보였다는 게 민주노동당의 전언이다. 특히 한나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저소득·저학력·고연령층 지지가 크게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신장식 기획위원장은 “이들은 선거 정보를 텔레비전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텔레비전에서 소외돼온 권 후보의 진면목을 처음 접하고, 이번 토론회에 크게 영향받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텔레비전 토론회 이후 지금까지 지지율이 1%도 안 된 50대 이상과 1~2%에 지나지 않는 대구·경북에서의 지지율이 의미 있는 수로 잡히고 있다. 대전·충청·강원·제주 등 반DJ-비창 또는 반창-비DJ 정서가 있는 지역에서도 ‘틈새 시장’이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민주노동당 지지기반은 울산, 부산으로 이어지는 노동자 밀집지역(블루칼라벨트), 수도권의 화이트칼라, 학생 등이었다. 지역으로 보면 영남, 계층은 노동자·학생, 세대로 보면 20·30대에 국한돼 있었다. 이론적으로라면 진작 주요 지지층이 됐어야 할 저소득·저학력층, 도시빈민, 농민, 여성에게 민주노동당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이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이겨내야 할 숙명적 과제는 이른바 ‘사표의식’이다. 특히 우리나라 대선은 결선투표 없이 한번의 선거로 승부를 가리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최악을 막기 위해 차선을 선택’하는 경향을 뚜렷이 보인다. 이에 따라 민주노동당은 개혁·진보적 성향이 일정부분 겹치는 노무현 후보와 차별성 부각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권 후보의 선전이 곧 노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낮추는 것은 아니라고 민주노동당은 주장한다. 20·30대의 경우 지지층이 어느 정도 겹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후보단일화를 거치며 어느 쪽으로든 거의 정리됐다고 본다. 신장식 위원장은 “현재 지지율 추이를 보면 노무현 지지자만이 아니라, 이회창 지지자들도 우리쪽으로 넘어오고 있다. 권 후보의 폭발력이 커질수록 이회창쪽이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이번 대선에서 권 후보의 선전은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폭넓은 염증과 그에 따른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갈망, 두 차례의 민간정권을 거치며 일반 민주주의적 권리와 인식이 넓어지면서 국민이 ‘진보’라는 가치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게 된 점, 민주노동당의 구체적이고 간명한 공약과 텔레비전 토론 등 다양한 동력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의 돼지저금통 모금에서 나타나듯, 사회·경제 개혁은 정치개혁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국민이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선 이후 정치개혁 이끌 것

민주노동당은 만약 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권 후보 지지율이 5%가 넘으면 둘 사이의 정치적 연대가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렇게 되면 중대선거구제나 정당명부제 전면실시 등의 정치개혁을 실행할 현실적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 총선에서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로 이어지며, 보수세력 일색인 정치판에 근본적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상현 위원장은 “이 후보가 당선되고 노 후보가 떨어지면 민주당은 붕괴하면서 개혁진보세력이 더욱 커다란 지각변동을 겪을 것”이라고 점쳤다. 민주당 내 보수세력이 떨어져나가면서, 민주노동당을 아우르는 강력한 진보야당의 필요성이 대두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조봉암의 역사적 실험이 16대 대선을 계기로 반세기 만에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재성 기자 firi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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