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도청자료’의 실체… 어느쪽으로 밝혀지든 대선 판도 바꿀 폭발력 있어
지난 9월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국정원의 도청과 관련한 경천동지할 자료들이 있다. 차근차근 밝히겠다”고 호언했다. 그의 약속을 김영일 사무총장이 대신 실행하는 것일까. 김 총장이 폭로한 이른바 ‘국정원 도청자료’가 대선정국을 뒤흔들고 있다.
내부 문서양식까지 공개한 국정원장
그동안 국정원의 도청 관련 의혹이 숱하게 제기됐지만 이번처럼 구체적인 자료까지 제시된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파문이 크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의문점은 많다. 국정원의 도청자료인가, 시중에 나돈 정보들을 짜깁기한 자료인가. 도청자료라면 주체는 국정원인가, 사설정보팀인가.
김 총장은 11월28일 폭로자료를 내놓으면서 “국정원 내부 고발자로부터 국정원 고위 간부에게 보고되는 도청자료 원본을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 자료의 형식이 국정원 자료 그대로인가라는 물음에도 “도청내용의 핵심을 정리해서 상부에 보고한 보고서”라고 강조했다. 바깥에서 가공한 2차자료가 아니라 국정원 직원이 간부들에게 보고하는 문서형식 그대로를 입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건 국정원장은 펄쩍 뛰었다. 신 원장은 11월29일 법원의 영장을 받아 합법적으로 감청한 문서를 기자들에게 보여주며 “한나라당 문건은 국정원에서 사용하는 문서형식과 전혀 다른 괴문서”라고 반박했다. 국정원 내부 문서는 모두 ‘아래아한글 바탕체’를 사용하는데 한나라당 문건은 ‘신명조체와 돋움체’로 작성됐다는 것이다. 국정원장이 직접 나서서 내부 문서양식까지 공개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한나라당 문건에 나오는 ‘○’이라는 표시는 국정원 내부문서에 사용되지 않고 있다. 무엇이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다른 표시를 쓰고 있다. 또 국정원 보고서에서 인명은 반드시 한자로 표기하는데 한나라당 문건은 이름도 한글로 표시됐다. 한나라당 문건에는 굵은 글씨로 강조한 부분이 있는데, 국정원 보고서에서는 그런 강조표시를 쓰지 않는다. 이런 것을 보면 적어도 국정원 내부문건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날마다 보고서를 작성해 상부에 올리는 국정원 관계자의 말이다. 신 원장의 해명으로 문건의 진위가 도마에 올랐지만 한나라당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일부 당직자들은 “국정원에서 직접 작성한 문서가 아니라 국정원 내부 관계자가 도청 녹취록 메모를 가지고 나온 것을 외부 인사가 보고서 형태로 재작성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되면 자료의 출처와 입수경위는 그런 대로 설명이 되지만 애초 김 총장의 설명과는 180도로 달라진다. 문건 자체가 국정원 내부자료가 아니며, 국정원 직원이 아닌 제3의 인물이 문서작성에 개입했음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에 문건의 선도도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 도청 녹취록은 인쇄 불가능
94년 안기부 정책연구관으로 근무했던 홍준표 의원이 전하는 얘기는 흥미롭다. “국정원에서는 통상 도청 녹취록을 ‘메모첩보’라고 부른다. 국정원 차장이 출근해서 제일 먼저 보고받는 게 바로 메모첩보다. 지금은 없어진 제8국(과학보안국)장이 보고한다. 읽는 데만 30분 이상 걸릴 정도로 방대한 분량이다. 감청부서 직원들은 24시간 3교대로 근무한다. 국제전화도 도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정원 도청 녹취록은 컴퓨터 화면에만 뜰 뿐이지 인쇄가 불가능하다. 파일복사도 안 된다. 도청의 근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녹음 테이프 폐기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애초부터 녹취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국정원의 한 간부도 “감청한 내용은 컴퓨터 자판에만 뜨므로 직원들이 필요한 핵심 내용만 손으로 적어서 상부에 보고한다”고 말했다. 전현직 국정원 간부가 전하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국정원의 도청의혹을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도·감청 녹취록이나 원본 테이프가 공개될 가능성은 적다. 한나라당이 문건을 건네받았다는 국정원 내부자를 공개하거나 검찰수사를 통해 조작된 자료임이 드러나지 않는 이상 국정원 도청 공방은 진위가 확실히 가려지지 않은 채 의혹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신 원장의 해명대로 국정원 자료가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두 가지다. 누군가 도청장비를 동원해 정치인과 기자들의 통화내용을 도청한 내용을 정리했거나, 아니면 정치권이나 사설 정보지에 떠도는 얘기, 언론사 정보보고 과정에서 새어나온 얘기들을 종합적으로 짜깁기했거나. 신 원장도 “사설정보팀이 도청했을 수도 있고, 정보지에 나오는 내용을 짜깁기한 내용일 수도 있다”며 한나라당 문건이 도청에 의해 작성됐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도청한 내용일 수도 있지만 도청의 주체는 국정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보기관이 아닌 사설정보팀에서 그토록 여러 사람을,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도청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또 문건의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해서 도청에 의하지 않고는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도 짜깁기 주장의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국정원장을 지낸 민주당 천용택 의원은 한나라당 문건의 작성주체로 ‘공작정치와 정보정치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의 지휘 아래 있는 사설공작대’를 지목했다. 이름만 대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정형근 의원을 꼽은 것이다. 천 의원의 추론이 나름의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정 의원의 ‘전과’ 때문이다. 지난 9월 정 의원은 국정원에서 입수한 도청자료라며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과 이귀남 대검 범죄정보기획관 사이의 전화통화 내역을 공개했다. 그러나 검찰은 “금감위를 담당하는 국정원 연락관이 이 위원장의 통화내역을 전해듣고 윗선에 올린 보고서가 정 의원쪽으로 유출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정 의원이 ‘상품가치’를 극대화하려고 국정원 내부 정보 보고서를 도청자료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정 의원에겐 비슷한 ‘전과’가 또 있다. 얼마 전 그는 중앙 일간지의 한 기자와 김원웅 의원의 통화내용을 흘리며 도청된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기자들 사이에선 이미 두 사람의 통화내용이 공개된 뒤였다.
김영일 사무총장의 어정쩡한 태도
김영일 사무총장의 어정쩡한 태도도 문건의 출처와 관련한 의혹을 부추긴다. 국정원 내부자료라며 자신만만했던 그는 30일 “설령 사설기관에서 도청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알고도 단속하지 않았다면 국정원의 업무를 포기한 것”이라고 물러섰다. 사설기관의 도청 가능성을 인정하는 듯한 모호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실체적 진실은 오리무중이다. 한나라당은 추가폭로를 예고하면서도 누구로부터 자료를 입수했는지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 선거운동 돌입 직후로 폭로시기를 조율한 듯한 한나라당의 정치적 의도를 따지는 것은 도청의혹이 지니는 폭발력에 비춰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국정원의 도청이 사실로 밝혀지거나, 아니면 과거 정권의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처럼 ‘선거특수’를 노린 기획으로 드러나거나, 어느 경우든 대선의 판도를 일거에 바꿔버릴 사안임은 분명하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사진/ 민주당은 한나라당 문건의 작성 주체로 '공작정치와 정보정치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의 지휘 아래 있는 사설공작대'를 지목했다. 사실상 정형근(오른족)의원을 꼽은 셈이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김 총장은 11월28일 폭로자료를 내놓으면서 “국정원 내부 고발자로부터 국정원 고위 간부에게 보고되는 도청자료 원본을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 자료의 형식이 국정원 자료 그대로인가라는 물음에도 “도청내용의 핵심을 정리해서 상부에 보고한 보고서”라고 강조했다. 바깥에서 가공한 2차자료가 아니라 국정원 직원이 간부들에게 보고하는 문서형식 그대로를 입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건 국정원장은 펄쩍 뛰었다. 신 원장은 11월29일 법원의 영장을 받아 합법적으로 감청한 문서를 기자들에게 보여주며 “한나라당 문건은 국정원에서 사용하는 문서형식과 전혀 다른 괴문서”라고 반박했다. 국정원 내부 문서는 모두 ‘아래아한글 바탕체’를 사용하는데 한나라당 문건은 ‘신명조체와 돋움체’로 작성됐다는 것이다. 국정원장이 직접 나서서 내부 문서양식까지 공개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한나라당 문건에 나오는 ‘○’이라는 표시는 국정원 내부문서에 사용되지 않고 있다. 무엇이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다른 표시를 쓰고 있다. 또 국정원 보고서에서 인명은 반드시 한자로 표기하는데 한나라당 문건은 이름도 한글로 표시됐다. 한나라당 문건에는 굵은 글씨로 강조한 부분이 있는데, 국정원 보고서에서는 그런 강조표시를 쓰지 않는다. 이런 것을 보면 적어도 국정원 내부문건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날마다 보고서를 작성해 상부에 올리는 국정원 관계자의 말이다. 신 원장의 해명으로 문건의 진위가 도마에 올랐지만 한나라당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일부 당직자들은 “국정원에서 직접 작성한 문서가 아니라 국정원 내부 관계자가 도청 녹취록 메모를 가지고 나온 것을 외부 인사가 보고서 형태로 재작성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되면 자료의 출처와 입수경위는 그런 대로 설명이 되지만 애초 김 총장의 설명과는 180도로 달라진다. 문건 자체가 국정원 내부자료가 아니며, 국정원 직원이 아닌 제3의 인물이 문서작성에 개입했음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에 문건의 선도도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 도청 녹취록은 인쇄 불가능

사진/ 이른바 '국정원 도청자료'를 폭로한 뒤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한나라당 김영일 사무총장. (연합)

사진/ 한나라당이 공개한 국정원 문서와 국정원이 직접 공개한 내부문서.(국정원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