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정부의 지속적 압박에 위기 가속화… 경제제재 여파로 남북관계도 블랙홀 진입
“사진/ 부시 정부는 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의 즉각적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멕시코 로스카보스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한·미·일 정상은 지난 10월26일 열린 3자회담에서 북핵 위기 해소를 위한 공조방안을 논의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북한이 가까스로 오랜 고립과 어둠의 터널을 벗어날 즈음 불거진 핵문제는 분명히 북한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집행이사회는 11월14일 12월치 중유공급 중단은 물론, 경수로 제공 재검토라는 초강수를 뒀다. 전문가들은 미국 주도의 이런 조처가 거의 도박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한반도 전문가인 미국 노틸러스연구소의 피터 헤이스는 16일 “KEDO가 중유공급 중단을 결정한 것은 전술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나 전략적으로는 멍청한 짓”이라고 혹평했다. 미국 주도의 중유중단 조처는 머지않아 북한이 백기를 들고 나올 것이라는 다소 낙관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헤이스는 이번 KEDO 결정은 북한이 중유와 경수로를 포기하는 대신, 그간 묶어두었던 흑연감속로를 돌려 플루토늄 재처리를 시작하고, 장거리미사일 실험을 재개해도 막을 명분과 수단이 없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북한의 대응 여부에 따라 위기 정도가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핵 개발을 고수하든, 아니면 포기를 선언하든 상관없이 위기의 늪에서 빠져나오기는 힘들 전망이다. 핵 고수는 곧 북한의 고립과 미국의 더욱 강한 응징을 불러오기 쉽다. 과거 90년 초반과는 달리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의 공세를 끝까지 막아줄 여력도 없어 보인다. 정권 말기에 접어든 남쪽 정부가 쓸 카드도 거의 소진한 상태다. 문제는 북한이 백번 양보해 핵 개발 포기를 선언해도 불안요소는 남는다는 점이다. 부시 정권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엄격한 사찰과 검증을 받아야 한다. 전문가들은 이 단계가 곧 북한 정권의 항복을 뜻한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부시 정권은 핵만 건드릴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부시 정부의 속셈은 내친 김에 미사일, 생화학무기, 인권문제까지 끄집어낼 게 뻔하다. 물론 북한이 핵문제 해결단계에서 최대한 성의를 보여 부시 정권에 신뢰감을 확고히 심어준다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전문가들은 핵 사찰이나 검증절차가 워낙 까다롭고 복잡하기 때문에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이 이 기간 동안 대북지원이나 경제협력을 병행한다면 그마나 다행이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태도는 요지부동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부터 북한 내 핵이 없다는 최종 통보를 받기 전까지는 어떤 유화조처도 취하지 않을 작정이다. 물론 남쪽 정부나 일본 등 국제사회는 이런 부시의 지나치게 뻣뻣한 정책이 못내 야속하다. 북한의 핵 포기선언을 유도하려면 미국도 최소한의 신뢰는 보여줘야 한다는 목소리다. “침공 의사 없지만 우려사항 해소하라”
부시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 정부의 불편한 심기를 헤아린 듯 15일 성명을 냈다. 지난 2월 도라산 전망대 방문 때 처럼 북한을 침공할 의도가 없으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짤막한 성명으로 북한을 안심시키리라고 보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북한은 부시 대통령의 말이 진심이라면 그간 요구해온 두 나라 사이의 불가침협정에 서명하지 못할 까닭이 뭐냐고 불평한다. 더구나 부시는 이 성명에서 북한과의 ‘포괄적 대화’ 제의를 다시 내세우며 미국의 다른 우려 사항 즉 핵뿐만 아니라 미사일, 생화학무기, 인권문제도 어떤 식으로든 다뤄져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 중 핵 개발 프로그램은 ‘즉각적이고도 가시적으로’ 해결하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부시 행정부의 속셈은 북한이 켈리 특사 방북 때 핵뿐만 아니라 생화학무기 개발도 시인했다는 식으로 일본 언론에 흘린 데서도 읽히는 대목이다.
이뿐이 아니다. 부시는 성명에서 북한 주민과 지도부를 분리해서 정책을 펴겠다는 뜻을 다시 내비치고 있다. 부시는 “북한 주민들과 우호적으로 지내기를 원한다”라든지, “북한 주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중요한 조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부시의 발언이 김 위원장 등 북한 지도부에 대한 여전한 불신감을 보여주는 한편, 일반 주민들에 대한 지원 의사를 비침으로써 은근한 심리전을 펴고 있다고 풀이한다. 북한은 이미 지난 2월 부시 방문 때도 부시의 발언에 대해 내부 이간전략이라고 거세게 반발한 바 있다. 어쨌든 북한은 핵 고수정책 못지않게 핵 포기선언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꼴이 됐다.
북한의 김 위원장 못지않게 남쪽의 DJ정부도 기로에 서 있다. 최근 사태가 남쪽의 실책이라기보다는 북한의 비밀 핵 개발 시인이라는 폭탄발언으로 촉발된 게 그나마 위안이 될지 모른다.
미국의 밀어붙이기에 DJ 속수무책
하지만 미국의 강경정책을 바라보는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말로만 남쪽 정부와 공조를 내세웠지, 실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미리 다 정해놓고 밀어붙이고 있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정세현 통일부 장관이 외부 강연에 잇달아 나가 “중유 11월분은 공급돼야 한다”라든지, “북핵 포기를 위한 압박수단은 필요 없다”고 공공연하게 밝힌 데서도 정부의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읽힌다. 정 장관이 악역을 맡으면서 보수층의 뭇매를 맞고 있지만 그가 미국을 겨냥해 공개적으로 밝힌 소신들은 정부의 답답함을 잘 보여준다. 한-미 간에는 근본적으로 좁히기 힘든 핵문제 해법에 대한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남쪽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 핵문제는 짧은 시간 내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교류협력과 병행하면서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북한이 더는 핵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안심할 정도로 교류협력을 상당한 수준에 올려놓는 게 최선의 해법이라는 논리다. 그나마 교류협력을 위해 가동되고 있는 남북대화 채널이 닫히면 위기국면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부시 정권은 남쪽 당국의 이런 해법에 적잖이 언짢아한다. 이제는 드러내놓고 DJ정부의 채찍 없는 당근 정책이 북한의 핵 개발을 부추겼다는 의구심을 드러낸다. 지금은 교류협력 중단이라는 압박카드를 쓸 때라고 은근히 DJ의 등을 떠밀고 있다. 얼마 전 한국에 온 미 국방부 차관이나 유엔사의 모자를 쓴 주한미군 당국이 경의선 도로·철도 연결에 따른 지뢰제거나 개성공단 건설 등 남북 경협사업에 은근히 딴죽을 거는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다. 북한 핵은 부시와 DJ를 결정적으로 갈라놓고 있는 셈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중유에 이어 경수로 건설 중단 결정이 난다면 이는 그야말로 두 정권이 루비콘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하긴 이제 DJ정권 임기가 석달이 채 안 남았으니 서로가 등을 돌려도 부시 정부로서는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터다. “석달이 뭐냐. DJ 임기는 한달밖에 안 남은 셈이다. 12월17일 차기 대통령이 결정나는 순간 주요 대북사업은 재검토가 불가피하다. 일일이 정권인수팀과 협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수팀이 반대하는데도 DJ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다.”
대규모 경협 부담감… 그래도 대화채널 가동
그렇다. 이제 남북관계는 블랙홀로 빠져들어갈 가능성이 한층 더 커졌다. 정부는 장관급회담이나 11월 초 평양에서 열린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 3차회의 등을 통해 올 12월에 경의선 철도·동해선 임시도로를 잇고, 개성공단 조성 공사를 시작하기로 뜻을 모았다. 금강산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이산가족 상설면회소도 세우기로 했다. 다들 남북 교류사에 한획을 긋는 뜻깊은 사업들이다. 하지만 정부 및 재계 소식통들의 말을 모아보면 이들 가운데 연내 가시화가 될 사업은 금강산 관광길로 활용될 동해선 임시도로뿐이다. 다른 사업들은 핵문제와 상관없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이들 소식통들의 공통된 견해다. 자세한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시간도 부족하고, 남북 모두가 좀더 검토할 내용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남북이 정치적 변수들을 감안하지 않고 바짝 서두른다면 일정이 빨라질 수도 있다. 이는 남북 양쪽 당국이 남한의 정치일정이나 핵 변수를 제쳐놓고 걸음을 내칠 경우다.
중유중단도 막지 못한 정부가 대규모 경협을 추진하기에는 아무래도 버거워 보인다. 통일부는 공식적으로 남북관계는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 당국자는 16일 “향후 남북관계 일정과 관련, 미국·일본·유럽연합(EU)과 협의한 것은 없으며 북측이 KEDO 결정을 이유로 일정 중단을 요구해오지 않는다면 11, 12월 일정은 계획대로 진행한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지난 15일에도 판문점 연락관 전화통화를 통해 오는 18일부터 20일까지 금강산에서 ‘1차 해운협력실무접촉’과 ‘2차 남북 철도·도로 연결실무접촉’를 열기로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남북 교류협력사업의 동력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당장 북한이 정권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핵문제를 그냥 놔두고 다른 곳에 한눈을 팔 겨를이 있겠느냐는 얘기다. 다만 남쪽과의 대화채널은 계속 열어놓은 채 다음 대응책을 모색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남쪽과의 경협이 핵 걸림돌을 넘은 근본적인 해법은 아니더라도 미국의 섣부른 군사적 대응은 피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남쪽 정부의 인식과 비슷하다. 대화채널마저 끊기에는 아무래도 불안한 탓이다. 이는 오히려 북한 정권에 불리한 위기를 부추길 우려가 있다. 남이나 북이나 서로 간 대화채널 유지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위기의 전환, 그 실마리를 찾을 건가
지금은 남한 당국이 먼저 나서기가 쉽지 않다. 레임덕 정권의 한계에다 부시 행정부를 움직일 지렛대가 마땅치 않다. 남쪽 당국은 핵문제와 상관없이 교류협력사업을 이어갈 수 있는 명분을 북한이 던져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당장 핵과 관련된 전향적인 조처를 취하기 어렵더라도 남북한이 기존에 합의된 교류협력사업들만이라도 더 박차를 가해주기를 바란다. 북한이 지난 6월29일 서해교전이라는 악수를 둔 뒤 극적으로 정책을 전환해 곧바로 사과성명을 내놓고, 본격적인 개혁·개방 정책에 시동을 거는 한편, 남한 및 일본 관계에 박차를 가했듯이 이번에도 이런 발상의 전환을 기대하고 있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남북한은 참으로 운이 없는 민족이야.”
정부의 한 핵심 통일정책 담당자가 내쉬는 한숨소리는 길고도 깊었다. “북한은 지난 수년간 산소호흡기를 달고 다닌 중환자나 같아요. 아등바등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환자의 산소호흡기를 미국이 떼려고 하니…. 더 서글픈 것은 우리(남한)도 북한 목조르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죠.” 아니나 다를까 북한도 섭섭한 심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남쪽 당국이 외세와 공조해 민족을 공멸로 끌고 간다는 볼멘소리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하소연을 늘어놓을 짬을 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심하게 말하면 북한은 죽느냐 사느냐는 생사의 갈림길에 접어든 탓이다. 대북 중유중단에 경수로 제공 재검토북한이 가까스로 오랜 고립과 어둠의 터널을 벗어날 즈음 불거진 핵문제는 분명히 북한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집행이사회는 11월14일 12월치 중유공급 중단은 물론, 경수로 제공 재검토라는 초강수를 뒀다. 전문가들은 미국 주도의 이런 조처가 거의 도박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한반도 전문가인 미국 노틸러스연구소의 피터 헤이스는 16일 “KEDO가 중유공급 중단을 결정한 것은 전술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나 전략적으로는 멍청한 짓”이라고 혹평했다. 미국 주도의 중유중단 조처는 머지않아 북한이 백기를 들고 나올 것이라는 다소 낙관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헤이스는 이번 KEDO 결정은 북한이 중유와 경수로를 포기하는 대신, 그간 묶어두었던 흑연감속로를 돌려 플루토늄 재처리를 시작하고, 장거리미사일 실험을 재개해도 막을 명분과 수단이 없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북한의 대응 여부에 따라 위기 정도가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핵 개발을 고수하든, 아니면 포기를 선언하든 상관없이 위기의 늪에서 빠져나오기는 힘들 전망이다. 핵 고수는 곧 북한의 고립과 미국의 더욱 강한 응징을 불러오기 쉽다. 과거 90년 초반과는 달리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의 공세를 끝까지 막아줄 여력도 없어 보인다. 정권 말기에 접어든 남쪽 정부가 쓸 카드도 거의 소진한 상태다. 문제는 북한이 백번 양보해 핵 개발 포기를 선언해도 불안요소는 남는다는 점이다. 부시 정권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엄격한 사찰과 검증을 받아야 한다. 전문가들은 이 단계가 곧 북한 정권의 항복을 뜻한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부시 정권은 핵만 건드릴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부시 정부의 속셈은 내친 김에 미사일, 생화학무기, 인권문제까지 끄집어낼 게 뻔하다. 물론 북한이 핵문제 해결단계에서 최대한 성의를 보여 부시 정권에 신뢰감을 확고히 심어준다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전문가들은 핵 사찰이나 검증절차가 워낙 까다롭고 복잡하기 때문에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이 이 기간 동안 대북지원이나 경제협력을 병행한다면 그마나 다행이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태도는 요지부동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부터 북한 내 핵이 없다는 최종 통보를 받기 전까지는 어떤 유화조처도 취하지 않을 작정이다. 물론 남쪽 정부나 일본 등 국제사회는 이런 부시의 지나치게 뻣뻣한 정책이 못내 야속하다. 북한의 핵 포기선언을 유도하려면 미국도 최소한의 신뢰는 보여줘야 한다는 목소리다. “침공 의사 없지만 우려사항 해소하라”

사진/ 대북 중유제공 중단은 미국의 경제제재 신호탄인가. 미국과 북한의 힘겨루기가 계속되면서 경의선 철도연결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공동취재단)

사진/ 북한 핵 개발 여파에도 남북경협은 지속될 것인다. 지난 11월 6일부터 평양에서 열린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남북 대표가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사진/ DJ는 핵 문제와 상관없이 교류협력사업이 지속되길 바라고 있다. 지난 10월23일 청와대에서 북한 핵 관련 대선후보 간담회가 열렸다. (청와대사진기자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