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 찍듯 뻔한 대통령 후보 1인토론… 역동적 공동토론 보장할 제도를 만들자
1992년 클린턴과 맞붙은 조지 부시는 이런저런 핑계를 들이대며 TV토론을 거부했다. 그러나 결국 두 손 들고 토론에 응했다. 유세장에 겁쟁이를 상징하는 닭모양의 변장을 한 야유꾼들이 등장했던 까닭이다. ‘TV 대선시대’가 개막된 1997년 15대 대선 이후 한국에서도 이제 TV가 ‘킹메이커’로 등극했다. 그럴싸한 핑계를 들이대며 TV토론을 거부하는 후보도 속으론 비난여론에 가슴 졸인다. 대통령이 되려면 TV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유권자들의 반응이 미지근하다. 방송사들마다 앞다퉈 ‘대선후보 TV토론’을 열고 있지만 시청률은 한 자릿대를 헤매고 있다. 97년 26%까지 치솟았던 것에 비하면 관심이 현격히 낮아졌다.
1인토론은 지지층 결속의 결과만 낳아
이유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요즘 방송사에서 하는 TV토론에서 후보는 1명만 나온다. 링 위에 선수 1명만 올라오는 복싱게임이 재미있을 리 없다. 재미도 재미지만 이 방식으로는 후보들의 우열을 가려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떤 사안이나 정책에 대한 후보들의 견해를 비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형식은 ‘TV토론’이 아니라 대담에 불과하다. 방송사들이 <100분토론> <심야토론> <토론공방> 따위의 프로그램 간판을 내세워 억지로 ‘토론’이라는 이름을 갖다붙였을 뿐이다.
1인초청 ‘TV대담’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실체적 통계도 있다. 국민통합21쪽이 SBS와 YTN의 토론회 직후 여론조사를 해봤더니 정몽준 후보 지지자의 98%가 정 후보에 대한 이미지가 더욱 좋아졌다고 대답했다. 정 후보의 전체적인 지지율은 떨어지는 추세였는데도 지지층의 충성도만 높아진 것이다. 이회창 후보쪽도 마찬가지였다. 전체적인 지지율의 변화는 없이 지지층의 67%가 TV토론 직후 이 후보가 더 좋아졌다고 응답했다. TV토론이 유권자들의 선택 기준이 되어 지지후보를 변경하게 하기보다는 지지층 결속의 기제로만 작용한다는 얘기다.
어금버금한 형식의 토론들이 채널만 바뀌면서 되풀이되는 점도 시청자들의 눈길을 붙들지 못하는 요인이다. 공중파 방송은 물론 지역방송과 케이블TV 등이 경쟁적으로 ‘TV토론’을 하고 있지만 후보 1명과 사회자, 3~4명의 패널들이 나오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후보들도 ‘문제은행’ 형식의 출제 예상문제를 뽑아 달달 외우게 된다. 한 후보는 600여개의 예상질문을 비축해뒀고, 또 다른 후보는 200여개의 예상문제를 확보하고 있다. 시청자들 처지에선 ‘뻔한 질문에 뻔한 대답’을 거듭 보게 되는 셈이다. SBS <토론공방>의 제작을 맡았던 이은종 프로듀서는 “방송사 처지에선 TV토론을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면 다른 방송사와 중복이 불가피하다”며 “방송사의 자율경쟁에 맡겨선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이므로 정치권이 합의해 체계적인 개선방안을 선거법에 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TV토론의 형식도 문제지만 알맹이를 뜯어봐도 짚어볼 점이 한둘이 아니다. 우선 패널들이 적극적으로 추가·보충 질문에 나서지 않아 자칫 후보들에게 해명의 기회와 면죄부만 제공할 위험이 있다. SBS의 <토론공방>이 이런 지적을 많이 받았다. 한나라당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이 후보가 “건전한 보수와 합리적인 진보가 함께한다”는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답변에 그쳤지만 패널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개 이런 식이다.
찬스제도 등 ‘양념 도입’은 신선한 시도
패널의 질문이 지나치게 장황한 경우도 많았다. SBS <토론공방>의 한 패널은 정몽준 후보의 정체성을 묻는 한개의 질문에 무려 3분50초를 사용했다. 미국에선 패널의 질문을 45초 이내로 제한해 핵심만 묻도록 유도한다. 패널이 잘못된 정보에 근거해 엉뚱한 질문을 하는 일도 있었다. 문화방송 <100분토론>의 한 패널은 돈세탁방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는데도 마치 통과되지 않은 것처럼 가정하고 질문을 던져 후보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공정성 문제는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국방송 <심야토론>의 진행자 길종섭씨가 특히 심해 언론노조에서 편파적 진행을 문제삼는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TV토론을 청문회로 착각해 후보를 죄인이나 피의자 다루듯 하는 문제도 간간이 지적된다. 각종 통계나 수치에 대한 암기력과 기억력을 테스트하는 ‘장학퀴즈식’ 질문의 잔재가 남아 있지만 많이 줄어들었다.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지만 그래도 TV토론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상호토론이 좋지만 1명씩 불러서 하는 방식도 후보들 각자의 가치관과 정견을 차분하게 가늠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부족하다고 없애거나 줄이자고 할 게 아니라 어떻게 개선시킬 것인지에 대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어렵게 쟁취해서 얻은 것인데 시행착오가 좀 있다고 ‘무용론’을 들먹이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얘기다.”(동국대 신문방송학과 김무곤 교수)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 우선 방송사는 다양한 형식을 도입해 더 이상 ‘붕어빵 토론회’라는 비난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방송사들이 토론의 큰 틀에선 차별성이 없었지만 세부 진행과정에선 나름의 ‘양념’들을 섞어 긍정적인 시도로 평가된다. 특히 한국방송이 미국식 타운홀 미팅 방식을 본떠 시민패널제를 도입한 것이 눈에 띈다. 한국방송 선거기획단이 여론조사 기관의 과학적인 여론조사 기법을 동원해 시민패널을 선정한 것도 좋은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문화방송이 대선후보 경선토론 때 채택한 찬스제도(후보가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일정한 시간 안에서 찬스를 사용할 수 있게 함)도 신선한 시도였다. 한국방송도 경쟁 후보진영에 질문권을 주는 새로운 형태를 선보였다. 김무곤 교수는 ‘답변시간 총량제’ 도입을 제안한다. 후보가 꼭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는 질문에 대해선 충분한 시간을 사용하게 하되 다른 답변에서 시간을 공제하자는 것이다.
한나라당 책임 가장 커
올해 TV토론은 별다른 준비 없이 그저 방송사들의 관성에 의지해 흘러왔다. 5년 전 마련된 법규에서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5년 동안 시청자들의 눈높이와 방송·정치적 여건은 훌쩍 커버렸지만 5년 전에 맞춘 제도와 법규의 옷은 그대로인 꼴이다. 여기엔 정치권의 책임, 특히 다수당인 한나라당의 책임이 크다. ‘돈 안 드는 선거’를 되뇌어온 정치인들이 정작 미디어 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국 보다못한 시민단체들이 나섰다.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전국 102개 시민·사회·언론단체가 결성한 ‘2002대선미디어공정선거국민연대’(공동대표 성유보)는 11월6일 선거방송심의위원회의 활동을 앞당기도록 하는 등의 선거법 개정 청원을 국회에 냈다.
후보 초청의 범위도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이 필요한 문제다. 진보정당의 뿌리가 미약한 한국적 정치풍토에서 여론지지도 5%를 밑도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외면당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방송사의 제작진과 정당의 실무자들, 언론단체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주장하는 개선방안이 있다. 바로 TV토론의 규칙을 정하는 선거방송토론위원회의 설치를 앞당기거나 상설화하자는 것이다. 이 기구는 미국의 대통령토론위원회(CPD·Commission on Presidential Debate)를 본뜬 것이다. 방송 관계자와 정당 추천 인사 등 11명 이내로 구성되는데, 실무적으로 보면 선거운동 기간 3차례의 합동토론을 주관하는 일이 전부다. 현행 선거법상 이 기구는 대선 60일 전까지 설치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개별 방송사들은 선거일 120일 전부터 출마 예정자들을 초청해 자율적으로 TV토론을 열 수 있다. 결국 60일 동안의 틈이 발생하게 된다. 이 틈새 기간에는 방송사들이 자체적으로 규칙을 만들어 자율적으로 TV토론을 진행한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바로 이 기간의 합동토론회를 거부하고 있다. 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선거방송토론위원회 설치를 대선 6개월이나 1년 전으로 앞당기면 이런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토론의 세부형식을 정당 간 합의에 의해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토론위원회가 토론의 의제와 형식을 개발하는 등 토론을 알차게 할 수 있다. 길게 보면 토론의 활성화 등 정치문화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
거부하는 후보는 출연기회 박탈을
이제 TV토론을 통해 후보를 검증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선 이미 사회적으로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러나 검증을 어떻게 할지의 방법론에 대해선 아직 논의가 부족하다. 검증 절차와 방법에 대한 제도화가 시급한 셈이다. 결국 효율적인 TV토론은 대선 후보와 정당, 방송사의 의지에 달려 있다. 후보들은 두말 필요없이 유권자들에게 정직하게 심판받겠다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방송사도 이 눈치 저 눈치 볼 것이 아니라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되, 거부하는 후보에 대해선 출연기회 박탈 등의 과감함이 요청된다. 후보들이 TV토론에서 마주 앉는 사람은 진행자나 패널이 아니라 안방에 있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사진/ 대담인가, 토론인가. 현재의 1인 TV토론으로는 어떤 사안이나 정책에 대한 후보들의 견해를 비교하기 어렵다. (연합)

사진/ (연합)

사진/ (한겨레)

사진/ "알맹이 있는 토론을 보고 싶다." 지난 97년 대선 당시 서울역에서 대선후보들의 토론을 지켜보던 시민들. (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