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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10억원 수수, 잠들지 않는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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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1-1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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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양건설과 한인옥의 진실게임… 김병량씨에게 3억원 수표로 찾아준 새로운 증인 나타나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는 조작이다. 진실을 반드시 밝혀질 것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부인 한인옥씨가 (주)기양건설 김병량 회장한테서 10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펄쩍 뛰며 부인했다. 민주당 선대위는 ‘한인옥씨 10억 수수사건 진상조사특위’(위원장 천정배 의원)를 꾸려 공세의 고삐를 죄고 있다. 진실은 뭘까.

돈 심부름한 ‘미스 민’의 진술

사진/ 민주당 의원총회장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기양 비자금 수수의혹을 보도한 매체 사본을 읽고 있는 의원들. (한겨레 이정우 기자)
의혹의 베일을 한 꺼풀 벗겨줄 새로운 증언자가 나왔다. 김 회장에게 돈을 찾아다준 것으로 지목된 당시 ㅎ다방 종업원 이마무개(37·일명 미스 민)씨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씨는 97년 초부터 98년 말까지 이 다방에서 근무했으며, 이 무렵 김 회장과 이교식씨는 이 다방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다방 주인 이아무개씨(41)씨가 전했다.


당시 기양건설의 자금관리를 맡았던 이 전 상무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은 두 부분이다. △김병량 회장이 97년 대선을 앞두고 주택은행 양재동 지점에서 다방 종업원을 시켜 5천만원에서 1억원씩 찾아오게 했으며 △김 회장이 비자금 10억원을 처음엔 부인 장순예씨를 통해, 나중엔 자신이 직접 한인옥씨한테 전달했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다방 종업원 이씨는 “97년 대선을 2~3개월 앞두고 주택은행 양재동 지점에서 김씨에게 1억원짜리 수표 3장을 찾아다준 적이 딱 한번 있다”고 말했다. 김씨에게 찾아다준 돈이 현금이 아니라 수표였으며, 금액이 5천만원에서 1억원이 아니라 3억원이었고, 돈 심부름을 여러 차례가 아니라 딱 한번 했다는 점이 이교식씨의 진술과 다르다. 돈 인출 장소와 시기는 대체로 이교식씨의 진술과 들어맞는다. 돈을 현금이 아니라 수표로 찾았다면 검찰이 계좌추적을 통해 돈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진/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민주당 전갑길 의원. (한겨레 이정우 기자)
폭발력 있는 얘기는 그 다음이다. 다방 종업원 이씨는 “김 회장이 찾은 돈을 이회창씨쪽으로 주겠다는 말을 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이 돈을 찾아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면서 ‘이회창이가 당선돼야 내가 산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이교식씨의 진술과도 합치한다. 이씨도 “‘한인옥씨에게 로비자금을 건넸다’는 말을 김 회장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으로 미뤄볼 때 적어도 김 회장이 97년 대선을 2~3개월 앞두고 갑자기 큰돈을 만지기 시작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회창 후보와 한인옥씨에 대한 얘기를 하고 다녔다는 정황은 포착된다. 다방 주인 이씨의 이야기도 이를 뒷받침한다. “커피값이 수십만원씩 밀리던 김 회장이 갑자기 97년 10월께 외제차 크라이슬러를 뽑는 등 큰돈을 만지기 시작했다. 김 회장은 한인옥씨와 처가쪽으로 친척이 된다는 말을 과시하듯 하고 다녔다. 또 주변사람들한테도 이회창 찍으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당시 기양건설 업무부장으로 재직한 장아무개씨도 검찰에서 동일한 정황을 진술했다. “97년 가을부터 김 회장에게 돈이 생기기 시작했고, ㅎ다방에서 살다시피 했으며, 다방 종업원 미스 민에게 시켜 수십억원이 든 주택은행 통장에서 돈을 찾아오게 했다.”(서울지검 진술서)

한나라당은 왜 청문회를 포기했나

사진/ 의혹의 시선을 받고 있는 한인옥 여사. 민주당은 '한인옥씨 10억 수수의혹사건 진상조사특위'를 꾸려 공세의 고삐를 죄고있다. (김종수 기자)
사실무근이라는 김씨의 해명(10월10일 해명서)과 달리 회사 내부 자금사정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던 이교식 전 상무와 장아무개 전 상무, 다방 주인과 종업원 등 주변의 여러 인물들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김 회장이 한인옥씨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얘기를 사실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가 자기과시를 위해 사실이 아닌 얘기를 지어내서 떠벌리고 다녔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교식씨가 ‘자금제출 내역서’라는 자료에 ‘한인옥(이회창)씨에게 수시지급’이라고 적어놓았지만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선 ‘김 회장한테 들었다는 것뿐이니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 밖에 민주당쪽이 기양건설과 이회창 후보와 관련해 제기하는 의혹은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공적자금 관련 부분이다. 기양건설로 인해 440억원의 공적자금 손실이 발생했으며, 기양건설이 조성한 비자금 가운데 상당액수가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쪽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공적자금 청문회를 무산시킨 것도 김병량 회장과 이교식씨를 증인으로 채택하자 이 후보에게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한 때문이라는 게 민주당쪽의 주장이다. 한나라당은 “이 후보를 흠집내기 위해 공적자금 비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김회장을 증인으로 요구해 청문회를 포기하기로 했다”고 공적자금 청문회 무산 배경을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우선 김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하면 이 후보에게 흠집이 난다는 한나라당 주장이 석연치 않다. 이 후보와 김 회장이 무관하다면 증인으로 채택해도 흠집이 날 이유가 없다. 또 하나는 기양건설이 공적자금과 관련이 없다는 한나라당 주장과 달리 공적자금관리위원회사무국은 “기업의 부도 등으로 금융기관이 부실화되고 그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이 투입됐다면, 해당 기업의 부도는 공적자금의 투입이나 손실을 유발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기양건설이 공적자금 투입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김 회장이 공적자금 투입과 무관하므로 공적자금 증인 채택에서 제외해야 하고, 국정조사에 응할 수 없다는 한나라당 논리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원래 민주당의 기양건설 관련 의혹은 이회창 후보가 살던 가회동 경남빌라 302호의 바로 아래층인 202호를 기양건설의 김 회장이 제공했다는 데서 출발했다. 한나라당은 202호를 이 후보 고모의 손녀(5촌)인 장석자(61)씨가 전세 6억원에 얻어줬으며 큰 아들 이정연씨 부부가 가끔 이용했다고 해명한 바 있다. 민주당쪽은 김 회장이 6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장씨에게 전달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근거로 내놓은 것이 조흥은행 남산지점에서 2000년 5월23일 발행한 6억원짜리 자기앞수표(바가36671241)와 기양건설의 입금표다. 이 수표가 김 회장의 부인 장순예씨의 계좌를 거쳐 이 후보 친척인 장씨쪽으로 전달됐고, 이 수표가 다시 202호의 집주인 김아무개씨한테 전세금 명목으로 건네졌다는 것이다.

언제든 가려낼 수 있는 ‘6억원의 진실’

검찰은 애초 6억원의 행방에 대해 “어떠한 고소·고발이 없으므로 수사 대상이 아니다”고 밝혔으나 김정길 전 법무부 장관은 11월1일 국회 예결위에서 “6억원의 사용처 등에 대해 관할 검찰청에서 수사 중에 있다”고 답변했다. 민주당은 같은 날 오전 202호와 관련해 서울지검에 김 회장과 집주인 김아무개씨의 부친에 대해 뇌물수수 의혹이 강하게 제기된다며 수사를 의뢰했다.

사실 6억원 부분은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진실을 가려낼 수 있다. 이미 수표 사본과 입금표까지 제시됐기 때문이다. 계좌를 추적해 6억원이 이 후보 친척인 장석자씨에게 흘러들어가고 다시 202호의 전세금으로 사용됐다면 결과적으로 이 후보의 두 아들은 엄청난 액수의 공적자금 손실을 발생시킨 기양건설의 부도덕한 돈으로 전세 6억원의 고급주택에서 생활한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반대로 6억원이 장씨에게 흘러가지 않고 다른 곳에 사용됐다면 민주당은 허위사실을 유포한 법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여기까지 온 이상 검찰이 핑계를 대거나 더 머뭇거릴 이유는 없어 보인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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