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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TV토론, 쇼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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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1-1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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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게임’으로 전락한 미국 TV토론, 정치 컨설턴트들이 좌지우지하는 비극

사진/ 부시와 앨 고어(왼쪽) 클린턴과 밥 돌의 TV토론 모습. TV토론 본연의 기능은 철저히 계산되고 포장된 이미지와 각본속에서 갈수록 희석되고 있다. (SYGMA)
2000년 미국 대선에서 패배한 앨 고어는 올해 초 가까운 지인들에게 이렇게 회고했다. “2000년 대선에서는 너무 여론조사, 전술 같은 지엽적인 것에만 집착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쳤습니다. 그런 것들은 일단 제쳐두고 진정 내 마음속에 있는 말과 비전을 가지고 승부했어야 했습니다.”

정작 후보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접어두고 사전에 각종 통계 조사를 통해 나온 결과와 전략에 따라 치밀하게 짜인 각본대로 이야기해야 하는 현실. ‘선거공학’(Electioneering)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학적인 분석기법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미국 대통령 선거의 숨겨진 한 단면이다.

후보는 유명 컨설턴트의 로봇?


사실 30년 넘게 방송 스포츠 해설가와 할리우드 배우로 활동한 레이건같이 미디어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TV의 생리를 직접 몸으로 익히지 못한 대다수 후보자들은 TV토론과 같은 다소 낯선 장애물 앞에서 결국 미디어 정치 컨설턴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미 유명 정치 컨설턴트들 사이에는 후보들은 단지 자기들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에 불과하다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후보는 마치 부적이라도 되는 양 선거 1~2년 전부터 유명한 정치 컨설턴트를 자기 진영에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쓴다. 특정 후보가 어떤 컨설턴트를 섭외하는가에 따라 선거의 승패가 갈린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로 미디어의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유명 컨설턴트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한 후보가 수십억대, 혹은 수백억대의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이 돼버렸다.

미디어 컨설턴트들은 나름의 전략을 만들어내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한다. 먼저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여론조사가 있는데, 이들은 시청자 반응을 미리 테스트하기 위해 샘플 집단의 사전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성별·연령·소득수준·인종과 같은 여러 기준에서 세밀하게 계산한다. 여기에는 선거 전문가뿐 아니라 언론인·통계전문가·마케팅전문가·사회심리학자까지 동원되어 각 이슈에 대한 사회적 파급력을 평가한 뒤 수치화해서 각 이슈를 어떤 방식으로 제기하면 지지율이 얼마 오를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내놓게 된다.

또한 여론조사만큼이나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방법으로 포커스 그룹이 있다. 이들은 말하자면 실험 대상인 셈인데, 특정 계층을 대표할 만한 세분화된 포커스 그룹을 만들어놓고 특정 이슈를 제기한 뒤 그 그룹에서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를 먼저 테스트한다. 그리고 반응이 괜찮으면 이슈를 채택하고 아니면 폐기하는 식이다. 후보들은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짜인 각본에 따라 TV토론에 임한다. 정교해진 기술이 인간의 의사를 압도하게 된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언론매체들도 덩달아 TV토론을 통해 후보들이 어떤 메시지를 던졌는가보다는 그 메시지를 던지게 한 전략이 무엇인가를 캐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무슨 말을 했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고 왜 그 말을 했는지를 분석하고 쌍방의 전략을 비교하기 위해 컨설턴트들의 코멘트를 얻는 데 정신이 팔려 있으니 이 정도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시청자의 75%가 도중에 채널을 돌린다

이와 같이 TV토론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느 후보가 얼마나 수세에 몰렸는가를 따지며 누가 이겼는지 점수 매기기에 급급한 언론보도 사이에서 후보자의 생각과 메시지는 ‘실종’되기 일쑤다. 이쯤 되면 TV토론이 하나의 거대한 ‘오락’으로 전락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이미 많은 미국 시민들은 TV토론을 효과적인 정책검증의 장으로 보기보다는 단지 국가적인 ‘쇼’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후보들은 이미 관례적으로 선거의 중심축으로 굳어져버린 TV토론을 거부할 수 없어 ‘마지못해’ 참여할 뿐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견을 널리 알리기보다는 말실수로 꼬투리 잡히거나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가능한 한 상대방 공격의 논점을 흐리면서 자기 주장 반복하기,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말하기 같은 방어적 전술을 고집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처럼 후보자들의 정책을 검증하고 누가 대통령이 되기에 더 적합한 자질을 가졌는가를 비교하는 TV토론 본연의 기능은 철저하게 계산되고 포장된 이미지와 각본 속에서 갈수록 희석되며 결과적으로 유권자들에게도 차츰 외면당하고 있다.

실제로 근래 들어 가장 시청자들의 호응이 컸다고 평가받는 1992년 미국 대선 TV토론에서도 유권자의 약 40%인 9천만명에 달하는 TV토론 시청자들 중에서 정작 열심히 시청한 경우는 절반가량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 75%가량이 도중에 TV 채널을 돌려버렸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이 토론에서 페로는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클린턴과 부시를 ‘꺾었다’고 평가받았지만 다음날 그의 지지율은 고작 4% 오르는 데 그쳤고, 결국 선거 결과에는 1% 남짓한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 임기인 4년 동안의 매출이 2조원대에 육박할 정도로 비대해진 미디어 컨설팅 시장, 정치인보다 더 유명해진 미디어 정치 컨설턴트, 과도한 전략과 전술 속에 감추어진 후보자의 참모습, 이에 대한 시청자들의 염증과 무관심. 이런 것들이 오늘날 ‘그들만의 게임’으로 전락한 미국 TV토론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물론 이러한 흐름을 바꿔보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형적으로 커져버린 정치 컨설팅에 대한 위기감을 느낀 정치권에서 나름의 자정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일례로 상원에서 민주-공화 양당의 합의로 추진된 매케인-파인버그 정치자금 개혁법안은 당초 나름대로 획기적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딕 모리스 등 극소수를 제외한 유명 정치 컨설턴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거의 무산 직전까지 갔다가 이번 중간선거 이후에 시행하기로 함으로써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1987년 대통령 선거 토론위원회가 결성된 이후 TV토론 방식에 대한 개선 움직임도 가시화되어 1992년에 민주-공화 양당 후보 외에 제3당 후보인 로스 페로가 토론에 참여하고 일반 유권자들이 직접 후보에게 질문하는 형식을 도입하면서 한때 TV토론은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는 기대가 무성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변화도 민주-공화당 인사들로 구성된 TV토론 위원회가 ‘현실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96년 선거에 재출마한 페로를 토론에서 제외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미국 꼴 나지 않으려면…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 정치에 새로운 미디어가 정치에 등장할 때마다 이들이 정치판을 근본적으로 혁신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19세기에는 신문이, 20세기 전반에는 라디오, 20세기 후반에는 TV,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인터넷이 정치개혁의 열망을 등에 업고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구원투수로 등판했지만 처음에 잠시 혼란을 겪었을 뿐, 관련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재빨리 적응한 노련한 정치인들 앞에 모두 맥없이 무너졌다. 단지 형식만 바뀌었을 뿐, 기존 정치 질서를 뒤바꾸기엔 역부족이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미국의 역사에 비추어볼 때 한국의 선거에서 TV토론은 초기 도입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미디어 선거의 대표주자인 TV토론이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돈 안 드는 선거’, ‘깨끗한 선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기존의 폐쇄적인 정당정치의 틀을 깨고 유권자들에게 주도권을 쥐어줄 수 있을까. 그 새로운 주도권을 정치 컨설턴트들이 차지해버린 미국에 비하면 아직 TV토론이 가져올 긍정적인 변화에 대해 기대 섞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는 차라리 행복한 편이 아닐까.

미국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국내에서도 당파적 색채가 없는 전문가 위주로 구성된 중립적인 TV토론 위원회를 만들어 상설기구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 또한 TV토론 형식에서도 유권자들의 직접참여를 확대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실험적인 시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TV토론 자체에 대한 개선방안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미디어 정치 컨설팅을 효과적으로 감독·규제할 제도를 마련하여 또 다른 권력집단의 출현을 애초에 방지하는 일이다.

국내에는 아직까지 ‘정치 컨설팅’의 개념조차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상태지만 향후 크게 확대될 정치광고와 맞물려 미디어 컨설팅의 영역이 급팽창할 것으로 예상된다. 진정 저비용, 고효율의 정치를 실현하려면 미디어 선거시장이 누구도 쉽게 메스를 댈 수 없는 공룡이 되어버리기 전에 TV토론과 관련된 미디어 선거에 관한 개념정립과 함께 미디어 선거비용의 세부내역을 의무적으로 공개하게 하는 등 관련규정을 시급히 확충해야 한다.

홍대운/ 미디어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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