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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단호하게, 창보다 단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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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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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개발 문제 둘러싸고 강경발언 쏟아낸 정몽준 후보의 속내는 무엇일까

사진/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핵 관련 간담회를 열기 위해 모인 주요 대선 후보들. 북한에 대한 정 의원의 태도 변화로 '평화 세력 대동단결론'은 입지가 좁아졌다.
“북한 핵 파문이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의원 간 대선후보 단일화 논의의 열쇠가 된다” 최근 민주당 주변에서 나도는 얘기다. 정 의원이 연일 대북 강경론을 쏟아내는 바람에 ‘평화세력 대동단결론’을 후보단일화의 주요 명분으로 내세워온 민주당 내 후보단일화론자들의 입지가 약화된 현실을 빗댄 우스개다. ‘북한의 핵 개발계획 시인’이라는 돌발사태가 대선지형에도 미묘한 파장을 일으킨 것이다.

대북지원설의 부담 벗으려

정 의원은 대화와 교류·협력을 강조해온 그동안의 기조에서 상당히 멀리 나갔다. 10월21일 청주지역 간담회가 기점이었다. 그는 ‘대북정책 재검토’, ‘현금지원 중단과 금강산 관광사업 재검토’ 등 초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형인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주도하고 있고, 아버지 고 정주영 회장의 뜻이 담긴 ‘현대가’의 숙원사업에 제동을 걸고 나선 셈이다. 그는 22일 전주에서도 ‘인도지원을 제외한 모든 경제협력·교류의 당분간 중단’을 요구하며 강경발언을 이어가 일회성 발언이 아니라 기조의 선회임을 확인시켰다. 23일 한국발전연구원(이사장 안무혁) 초청강연에선 한 발짝 더 나아가 ‘경수로 건설지원과 중유공급의 당분간 중단’을 요구했다. 중유공급 중단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미국 부시 행정부보다 더 강경한 태도였다.


정 의원이 대북정책의 기조를 180도 급선회한 배경에 대해선 해석이 분분하다. 첫째, 차제에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현대와 금강산 문제’를 털어내자는 계산이 작용했으리라는 관측이 나온다. 그는 이미 ‘현대상선을 통한 4억달러 대북지원설’이 불거지며 한바탕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핵 문제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면 ‘현대와 금강산 사업 때문이 아니냐’는 공격에 시달릴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국민통합21’의 한 관계자는 “솔직히 현대상선이나 금강산 사업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정 의원이 공격의 표적이 되는 것은 억울한 노릇이다. 최근의 지지도 하락엔 이런 요인들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둘째, 보수표를 의식한 행보라는 관측도 설득력 있게 제기된다. 북한 핵 파문으로 국내 여론이 급격히 보수화할 것을 예상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핵 문제를 계기로 노무현 후보와 차별성을 꾀하는 동시에 이회창 후보보다 분명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한나라당과 이 후보쪽에 쏠려 있는 보수성향 표를 빼앗아오자는 전략이다. 정 의원이 대북문제에 관해 자문을 구하는 박준영 교수(이화여대 정치외교학)는 “정 의원의 최근 발언은 이회창 후보와 비슷하지만 훨씬 구체적이다. 북한의 핵 개발을 막자고 하면서 막연하고 추상적인 표현만 하는 것보다는 가장 실질적 요소인 경수로와 중유지원을 언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핵 문제와 대북지원을 적절히 연계하는 전략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이회창 후보의 발언보다 핵 문제 해결을 대북지원의 선행조건으로 분명히 제시한 정 의원의 발언이 더 강경하다. 정 의원이 대북 강경론을 제기한 한국발전연구원이 보수인사들이 주축이 된 보수적 단체라는 점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내 소신을 밝혔을 뿐”

사진/ 부산 아시안게임 북한선수촌을 방문한 정몽준 의원.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시인 발언이 나온 뒤 그는 180도 급선회했다. (연합)
셋째, 미국을 의식한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핵 문제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부시 공화당 행정부의 호의를 끌어내보자는 계산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정광철 공보특보는 “미국의 전세계적 핵 전략에 대해 국내에서 정 의원만큼 식견이 있는 사람도 드물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정 의원은 핵 문제에 대한 자신의 발언이 대선 전략차원으로 보도되는 데 대해 불만을 나타냈다. “내가 선거를 의식해 북한에 대해 보수적 입장을 발표한 게 아니냐는 기사가 나오는데 평소 생각을 다소 손해보더라도 사실대로 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원에서 국제정치를 전공했고, 국회 국방위 외교통상위원회에서 하던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소신이고 철학임을 강조한 것이다. ‘국민통합21’ 창당준비위도 전략회의를 통해 “정 의원이 전문가로서 평소의 생각을 얘기한 것이지 입장을 바꾼 것이 아니다”고 보조를 맞췄다.

정 의원의 강경발언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조금씩 엇갈렸지만 노무현 후보는 물론, 이회창 후보보다 보수적 견해라는 데 대해선 일치했다. “정 의원이 북한 핵 문제와 한반도 정세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 부시 행정부 강경파의 논리나 마찬가지며, 포용정책이 아니라 봉쇄정책을 펴자는 것이다. 결국 남한은 돈만 내고 협상에서 배제된 YS 시절의 전철을 되밟을 위험이 있다.”(김연철 고려대 교수)

“중유공급 중단 등은 책임있는 정치인으로서 얘기할 성질이 아니다. 집권하면 대북정책을 집행해야 할 위치에 있는 대선후보는 원칙적이고 포괄적인 얘기를 하면 된다. 사려 깊지 못한 발언이었다.”(박건영 가톨릭대 교수)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대북문제에 대한 보수적인 그의 생각이 굉장히 잘 정리돼 있다. 북한의 대외행위의 성격과 수준에 맞게 대응하되 불필요하게 강경한 대응은 하지 말자는 것인데, 조금 멀리 나갔다”고 평가했다. 정 의원이 대북문제에 관해 자문을 구하고 있는 안영섭 교수(명지대 북한학)는 “지금은 북한의 약속위반을 관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안보와 평화가 보장되면 적극적인 경협에 나서야 한다는 게 정 의원의 원칙적인 입장”이라고 말했다.

후보단일화 진영의 딜레마

정 의원이 핵 문제를 치고 나가자 곤혹스러운 것은 민주당 후보단일화론자들이었다. 이들은 후보단일화의 주요 명분으로 정 의원이 대북 포용정책의 기조를 적극 지지한다는 점을 꼽았다. 적어도 교류와 화해·협력의 지속이라는 대북정책의 틀에 관해선

정 의원과 민주당의 노선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후보단일화 진영의 이론가인 황태연 교수(동국대 정치학)는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가 남북평화와 개혁을 통한 민족 대도약의 대국적 관점에서 노선이 일치한다”는 점을 단일화론의 논거로 제시한 바 있다. 이른바 ‘평화세력 대동단결론’이다. 최근 민주당을 탈당해 정 의원 진영에 합류한 김민석 전 의원도 “지금은 한반도의 남북 화해정책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기므로 최대한 평화전선을 넓혀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런데 믿었던 정 의원이 태도를 180도 바꿔버린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노 후보의 선대위에 참여하지 않은 채 후보단일화를 주장해온 김근태 고문은 “일관성이 결여된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정 의원의 대북 강경발언을 공박했다. 후보단일화를 주장해온 김 고문 처지에선 정 의원의 정체성과 민주당의 그것 사이에 차이가 크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대북 강경발언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정 의원 진영에 합류한 신낙균 전 민주당 최고위원도 곤혹스러움을 내비쳤다. 그는 “정 의원의 발언에 표현상의 문제는 좀 있었지만 기본적 태도가 바뀐 것은 아니라고 본다. 안보와 직결되는 핵문제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견지한다고 해서 평화세력이 아닌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후보단일화 압박에 시달려온 노무현 후보쪽은 기회를 놓칠세라 연일 공세의 고삐를 조였다. 김현미 부대변인은 “정 의원에 대해 ‘평화세력’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번 기회를 그의 정체성을 깨닫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정 의원의 대북정책은 이회창 후보의 대북 강경정책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단지 말하지 않는 표정이 독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정 의원과 이 후보를 같은 보수세력으로 묶어버림으로써 후보단일화론자들의 명분을 일거에 허물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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