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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남북한 둘 다 맘에 안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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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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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까지 버린 북한의 대화 제의에도 냉랭한 미국이 대선 이후를 기다리는 속셈

“부시 행정부 내부의 김정일 정권에 대한 불신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려스러운 점은 남쪽의 김대중 정부에 대한 불신도 덩달아 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결사항전'과는 거리가 먼 북한

사진/ 부시 정권은 대북 포용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남쪽의 DJ정부가 큰 부담이다. 제 10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만난 세 나라 정상. (청와대사진기자단)
워싱턴과 평양을 오가며 고위급 메신저 역할을 해온 한 재미동포 인사가 내밀하게 전한 말이다. 그는 북한 핵 문제가 김대중 정권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풀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북이 지금 아무리 새로운 제안을 내놓아봤자 허공에 헛발질이나 다름없다는 말도 보탰다. 더구나 중간선거와 이라크 정권교체에 온 힘을 쏟고 있는 미 행정부로서는 당분간 현상유지가 한반도 정책의 단기목표라는 게 이 관계자의 평가다.


미국이 북한의 핵 개발 추진 사실을 일찌감치 감지하고도 이례적으로 느긋한 대응을 보인 까닭도 이런 목표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북한 때리기의 ‘적기’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북한의 대응은 왠지 초조해보인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10월25일 “미국이 불가침조약을 통해 우리에 대한 핵 불사용을 포함한 불가침을 확약한다면 (북한 핵·미사일·재래식 무기 등) 미국의 ‘안보상 우려’를 해소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조건을 달긴 했으나 핵 문제를 협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박길연 유엔주재 북한 대사도 기자회견을 열어 미국이 북한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계속하면 대결밖에는 대안이 없으나,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더욱 선호하고 있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다른 한편으로 남쪽과의 관계개선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10월26일에는 남한 경제를 공부하겠다며 고위급 인사 18명이 입국해 남쪽의 주요 산업시설을 둘러보았다. 금강산을 경제특구로 지정했다는 소식도 들리며, 경의선 연결이나 개성공단 건설에도 매진하고 있다. 핵 개발을 시인했음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둘러 갈 길을 재촉하고 있다. 분명 미국과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결사항전의 수사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인사들의 말을 통해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정말 놀랐다. 북쪽 관계자들은 남쪽 사람들이 오히려 무안할 정도로 개방된 모습을 보여줬다. 북한의 어려운 사정을 숨김없이 털어놓으면서 투자를 호소했다. 그러면서 마음껏 와서 보라며 여기저기를 개방했다. 과거에는 ‘사진을 찍지 마라’는 등 ‘하지 마라’ 일색이었는데 이제는 거꾸로다. 자꾸 이것저것 해보라고 해 오히려 당황했다.” 지난 주말 남포·개성 등 북한 산업시설을 돌아보고 온 한 기업인이 전하는 말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이런 놀라운 변화상 이면에는 절박함이 배어 있다고 진단한다. 이제는 체제생존이 지금까지 최고 가치로 여겨온 자존심까지 점차 우선순위에서 밀어내고 있는 것 같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이런 변화를 감안하면 분명 북한은 지난 90년대 초반과 같은 벼랑 끝 전술을 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지난 94년 6월 핵 문제로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상황이 재연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는 근거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바라보는 부시 행정부의 태도는 냉담하다. 불가침협정 우선체결 제안을 단번에 거절하는가 하면 남북관계 개선 움직임이나 개혁·개방 움직임에도 시큰둥한 반응이다. 이전 클린턴 정권이 북한의 핵 공갈에 넘어가 보상을 해준 데 대해 강하게 비판해온 부시쪽 강경파들로서는 선택이 폭이 넓지 않아 보인다.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하고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클린턴 때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즉 처음에는 강경 일변도로 나가다가 결국은 부시 정권도 당근을 써서 문제 해결을 시도하리라는 기대는 버려도 좋을 듯하다.

결국 지금 시간벌기에 들어간 쪽은 미국인 셈이다. 미국은 북한이 핵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미-북한 간 관계개선을 위한 대화는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물론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는 것만도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 초강수를 두기에는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북한의 핵 개발 시인에도 대북 포용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남쪽의 DJ정부가 큰 부담이다. 북한의 핵 개발 포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남쪽 정부의 전적인 도움이 필요하지만 이를 기대하는 미 행정부 관리들은 거의 없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서두를 까닭이 없어 보인다. 마침 수개월 뒤면 남쪽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진다. 부시 행정부는 핵 문제 해결을 위한 파트너로 DJ정권은 아니라는 결론을 이미 오래전에 내린 듯하다. 이는 미 행정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의 공통된 견해다.

DJ정부 햇볕정책에 강한 불신

사진/ 개방에 대한 북한의 놀라운 변화상 이면에는 절박함이 배어 있다. 지난 10월27일 서울 양평동 롯데제과 공장을 방문해 제조 공정에 대한 설명을 듣는 북한 경제시찰단. (사진공동취재단)
미 행정부의 DJ정권 불신은 어느 날 갑자기 불거진 현상은 아니다. 무엇보다 북한에 달러가 걸러지지 않고 흘러들어가는 게 불쾌했다.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축적에 신경을 곤두세워온 미국으로서는 달러의 사용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다. 특히 금강산 관광 대가로 보내지는 뭉칫돈에 대해 여러 채널을 통해 미국쪽의 우려를 전했다. 하지만 남쪽 정부의 미온적인 반응은 미국 행정부를 적지 않게 당혹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불거진 농축 우라늄에 의한 북한의 핵 개발 계획이 DJ정권 출범 이후인 98년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미 행정부 일각에서는 DJ정부의 안이한 접근이 결국 북한의 핵 무장을 부추킨 측면도 있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북한 김정일 정권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을 표출해온 부시로서는 이런 DJ정권이 곱게 보일 리 만무하다. 그렇지 않아도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한국민들 사이에 드높아진 반미감정도 DJ정부의 무조건적인 대북 포용정책 탓으로 돌리던 터였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전 터져나온 정세현 통일부 장관 발언도 불씨가 됐다. 그는 8차 남북 장관급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뒤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이달 초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에게 “제네바 핵합의는 무효화됐다”고 밝혔다는 미국쪽 설명에 대해 “거두절미한 게 있는 것 같다”고 잇달아 문제를 제기했다. 청와대가 나서 서둘러 진화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상호 불신감을 증폭시킨 꼴이 됐다. 켈리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24일 정 장관의 발언에 대해 “제네바 합의를 무효화하겠다는 북한의 입장에 대한 자신의 기억은 (북한으로부터) 들은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반박했다. 한-미 고위 관계자의 견해차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회창의 대북 강경노선을 기대한다?

사진/ 최근 <파이낸셜타임스>는 "올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승리할 경우 대북정책에서 한국과 미국 정부 간의 긴장은 제거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뿐 아니다. 핵 개발 시인 이후 대북 제재를 모색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와 달리, 남쪽은 대북지원이나 경제협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대조적인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부시 행정부의 어느 인사도 원칙적인 입장만을 밝힐 뿐 불만의 속내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속사정을 잘 아는 소식통은 미국 정부가 모르는 남북 정권 차원의 밀약 가능성까지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고 귀띔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파이낸셜 타임스>가 10월24일 보도한 내용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골자는 남한은 북한의 핵 개발 시인에도 북한과 경제협력 강화에 합의함으로써 북한을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입장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이 신문은 한국기업을 위한 북한 내 공단건설 등이 평양에서 열린 남북 장관급회담의 주요 합의내용이라고 전하고, 한국의 햇볕정책 강행 결의는 북한이 핵 개발계획을 시인한 이후 북한을 고립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미국을 무시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북한에 대해 강경노선을 택할 것이라고 다짐해왔다”고 지적하면서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이 후보가 승리할 경우 대북정책에서 한국과 미국 정부 간의 긴장은 제거될 것이라고 언급한 점이다. 이 신문 보도에 대해 서울이나 워싱턴 당국 모두 입을 다물었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켈리 특사는 평양을 다녀온 뒤 남쪽 정부와 충분한 정보 교류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특히 북한의 핵 개발 시인과 관련해서도 주변 정황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요지만 설명해 남쪽 관계자들이 북한과 미국 모두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는 후문이다.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핵 개발을 시인했다는 보도가 나간 뒤 한참 동안 정부가 워싱턴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부시 행정부는 언제쯤 북한 문제에 본격적으로 매달릴 것인가. 전문가들은 이라크 문제가 해결되고, 남쪽에서 새 정부가 출범한 뒤인 내년 봄이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얘기한다.

이들은 최근 부시 행정부의 라이스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이나 럼즈펠드 국방장관 같은 강경파들이 입을 모아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다”, “대화를 통해 해결한다”고 하는 데 다 이유가 있다고 본다. 최소한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내년 봄까지 갈 것이기 때문에 내년 봄까진 북한 문제를 대화를 해결한다는 태도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미국이 이라크 상황을 정리할 내년 봄 이후는 어떤 태도를 보일지 모른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내년 봄 심각한 국면 전개될 수도

사실 켈리 특사도 10월 초 방북시 “내년 봄 이라크 문제 해결 전까지 핵 개발 프로그램을 즉각적이고 가시적으로 포기하라”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당국 모두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시간제한은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게 워싱턴 소식통의 전언이다.

이 소식통은 “금년 중에 북-미 대화 재개는 어려울 것이다. 내년 봄쯤에 재개되더라라도 이견 차이가 크서 상당한 기간 진통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의회쪽에서 강경기류가 대단하다”며 “중유와 경수로 건설 모두 그만둬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을 거슬러 미국이 온건정책을 쓸 가능성은 없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핵 문제는 기본적으로 협상대상이 아니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내년 봄에 심각한 국면이 전개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미국은 이라크 문제로 여력이 없으며, 미국과 비슷한 대북정책를 내세우고 있는 아무개 후보의 당선이 확실한 상황이라 새 정부가 출범해 진정한 한-미 공조가 가능한 내년 봄을 기다리고 있는 게 확실해 보인다. “이게 지금 미국이 북한 핵을 대화로 해결하겠다는 뜻이다. 미국의 수단은 무력동원뿐만 아니라 고립압박을 강화해 제풀에 붕괴되도록 압박하는 수단, 즉 완전 무시 정책을 구사할 수도 있다.”

부시 대통령은 10월27일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멕시코 로스카보스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만나 ‘긴밀한 공조’와 ‘평화적 해결’ 원칙에 합의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이 내년 봄에도 똑같은 목소리를 낼지 자못 궁금해진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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