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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토론은 손해보는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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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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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확정 안 됐다” 합동 TV토론 거부하는 이회창 후보…노무현·정몽준 ‘협공’ 우려한 듯

사진/ 97년 TV 합동토론회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회창 후보. (이용호 기자)
“적어도 후보들이 닭싸움이나 하는 것으로 비쳐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회창 후보의 텔레비전 토론을 실무적으로 총괄하는 양휘부 방송담당 공보특보(한나라당 미디어대책위 방송운영단장)는 이 후보가 무슨 이유로 텔레비전 합동토론회를 기피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되물었다. TV 합동토론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형식과 절차를 갖춰서 하자는 얘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합동토론회에 관한 한 어쨌든 이 후보는 수세에 몰려 있다.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의원쪽에선 하자고 하는데도 이 후보쪽에서 이를 거부하는 모양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할말이 많다.

협상하면 진행절차 문제 안 돼


한나라당은 후보등록 이전에 열리는 합동토론회엔 응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거부이유는 방송사의 공정성 확보장치가 미흡하고, 후보로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합동토론은 곤란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합동토론을 하려면 사회자를 누구로 할지, 패널선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 카메라의 앵글, 조명, 발언순서 등은 어떻게 정할 것인지 등 복잡한 문제들이 많은데 야당 입장에서 공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방송사가 판을 벌였다고 일일이 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후보단일화가 계속 거론되는 상황에서 후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과 토론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점도 이유로 내세운다. 이 밖에 미국에서도 합동토론회는 법정선거기간에만 이뤄지고 있고, 지난 97년에도 마찬가지였다는 ‘관행’도 얘기한다.

그러나 이면엔 노 후보와 정 의원의 ‘협공’에 대한 우려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대책위의 한 관계자는 “솔직히 현재 앞서가고 있고, 상대 후보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을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TV 토론을 일찍 시작할 이유는 없다”고 털어놨다.

한나라당은 노 후보나 정 의원보다 토론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냐는 시각엔 펄쩍 뛰며 부인한다. 이미 97년에 해본 경험이 있어서 다른 후보들보다 ‘실전경험’이 많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TV 토론 실무를 맡고 있는 한 관계자는 “객관적으로 노 후보보다 말을 더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없다. 그래도 요즘은 썩 잘하는 편이며, 횟수로 따지면 경험이 가장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항변엔 논리적으로 허약하고 옹색한 구석이 많다. 먼저 방송사의 공정성을 문제삼지만 세부진행 절차와 규칙을 방송사에 맡기지 않고 후보 대리인들이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아 협의하면 공정성은 확보될 수 있다. 문제는 한나라당이 이런 시도조차 해보기 전에 ‘후보등록 이전 합동토론 불가’라는 선을 긋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의 요구 “직접 한판 붙어보라”

또한 ‘예비후보’들과의 토론에 응할 수 없다는 점도 그렇다. 이 후보는 이미 각종 시민단체나 이익단체의 토론회 등에 ‘예비후보’들과 나란히 참석했다. 이 후보는 “아직 아무도 후보등록을 하지 않았으므로 법적 후보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얼마전이 후보가 제1당의 후보라는 점을 내세워 김대중 대통령과의 단독회담을 요구했다. 유독 TV 합동토론에 대해서만 ‘예비후보’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인 셈이다.

한나라당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지만 폭넓은 대중적 정서는 ‘후보들이 직접 한판 붙어보라’는 것이다. 국민은 어떤 여과장치도 거치지 않고 직접 후보들의 정책능력과 자질, 인격, 사고방식 등을 따져볼 기회를 바란다. 97년 대선에서 TV 토론제도 도입과정에 참여한 바 있는 이효성 교수(성균관대 신문방송학)는 “가능하면 후보들이 직접 토론하는 방식이 더 활기 있고, 우열을 더 잘 가릴 수 있다. 미국에선 토론에 대한 국민의 기대 때문에 후보들이 토론을 회피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손해가 된다”고 지적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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