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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좀더 기다려 봐야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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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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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공산 충청권 민심기행… 노풍은 사그라들고 이회창·정몽준에 관망세

사진/ 대전 동구에서 만난 노인들. 대선 얘기를 꺼냈지만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한 반응이다. (심규상)
“선거는 왜 하누 틀려먹었어. 대통령에서 말단 공무원까지 죄다 돈뭉치나 보고 쫓아다니니…. 허구한 날 쌈박질이나 하구. 선거 얘기 하지도 말어.”

대통령 선거가 두달 앞으로 바짝 다가왔건만 충청도 민심은 냉랭하기만 하다. 정치 얘기를 잘 하지도 않지만 화제에 오르더라도 금세 말머리가 분질러졌다. 대선이 예전과는 달리 사람들 관심권에서 저만치 물러나 있음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아, 글쎄 관심 없다니까 그러네. 우리 같은 무지랭이들이 뭔 정치를 안다고…. 감투쌈해서 돈 버는 사람들 속을 눈만 뜨면 일만 하는 우리들이 어찌 알겨….” 단순히 무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툭툭 던지는 마디마디마다 정치권에 대한 독소가 물씬 묻어나니 말이다.

“자민련에 미련은 없다”


사진/ 충청권에선 아직 어느 후보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결국 '까봐야' 알지도 모르 일이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충청권 대선민심을 살피기 위해 길을 나선 10월18일 아침. 해가 중천에 떠올랐지만 대전시내 전역에 깔린 짙은 안개는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선을 앞둔 오리무중의 지역민심과 안개낀 하늘이 머릿속에 포개졌다. “그러면 젤(제일) 호감 가는 후보가 누구예요” “글쎄 없다니까….” 또 신경전이 시작됐다.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충청도 사람들의 표심을 엿보기 위해선 끈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경험으로 얻은 노하우다. “그럼 전용학 의원이 민주당을 떠나 한나라당으로 간 건 어찌 생각하세요” “나 같아도 민주당 뛰쳐나왔을 거구만. 맨날 큰소리가 담을 넘는 집구석에 누군들 붙어 있고 싶겠어. 밑에 놈들 힘 합쳐도 모자란 판에…. 민주당은 말만 들어도 어지러워.”

대전 중앙시장에서 만난 이충렬(53)씨는 “‘노풍’이 불 땐 서민정치를 내세운 노무현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이회창과 정몽준을 놓고 따져보는 중”이라고 털어놨다. 중앙시장 골목 모퉁이에서 만난 40대의 이아무개(48)씨와 서아무개(42)씨는 지지 후보가 이회창과 정몽준으로 갈렸다. 이씨는 “이회창이 지지도도 젤 높고, 다른 후보에 비해 준비를 많이 한 것 같다”고 이유를 들었다. 서씨는 “정몽준이는 돈이 많으니 역대 대통령들처럼 친인척 비리나 부정축재는 안 할 것 아니냐”는 반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지 후보는 달랐지만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었다. “이 바닥에선 이회창 아니면 정몽준 얘기가 많이 나와요. 노무현 얘기는 쏙 들어갔어요”

발길을 유성쪽으로 돌려 대덕연구단지와 대학가 부근을 찾았다. 여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만나는 이들마다 노무현 후보를 입에 올렸다. “통일문제나 노동문제를 봐도 정책이나 비전에선 노무현씨밖에 없어요.”(충남대 전강인씨) “정몽준 하면 남북관계에 대한 비전을 말하는데 그게 다 아버지 정주영이 한 일이지 정몽준이 한 건 아니잖아요”(박성래·유성구 신성동)

후보들에 대한 민심은 엇갈렸지만 자민련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또렷했다. 충남 예산에 사는 이재영(41)씨는 “JP의 주특기는 꼬리치기지만 지금은 노쇠해서 꼬리칠 힘조차 없지 않느냐”며 “예산에선 자민련 지지세력이 고스란히 한나라당으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그럴 법도 하다. 이곳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고향 아닌가. 이인제 의원의 고향인 충남 논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 자민련을 지지했다는 문영표(36)씨도 “자민련이 금배지를 팔아 의탁할 곳을 찾겠지만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구걸하는 정당에 미련은 없다”며 자민련의 행보가 자신의 표심과 무관함을 강조했다.

예산 인근 이 후보의 ‘고향론’ 먹혀

사진/ "이 바닥에선 이회창 아니면 정몽준 얘기가 나와요." 대전시 중구 중앙시장. (심규상)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자민련 이완구 의원(홍성·청양)의 탈당과 민주당 전용학 의원(천안갑)의 탈당에 대한 해당 지역구 주민들의 반응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났다. 천안에 사는 박아무개씨는 “지난 2000년 총선 때 이회창을 대놓고 씹어대던 사람이 전용학”이라며 “상황에 따라 한입으로 두말하는 그 사람에게 할말을 잃었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전용학 의원의 홈페이지엔 한나라당 입당 이후 며칠새에 수천건의 비난글이 쏟아져 개설 이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홍성에 사는 김아무개씨는 “JP가 자기 식솔을 팔아 보스 자리를 유지하려 하는데 누가 붙어 있으려 하겠느냐”며 이완구 의원의 탈당을 당연시했다. 이완구 의원이 탈당 직후인 10월16일 청양을 찾아 “JP가 이회창 이외의 다른 후보와 연대를 꾀할 경우 조만간 자민련 의원 대부분이 탈당할 것”이라고 방어벽을 친 것도 이런 지역 분위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의원의 뒤를 이어 홍성군수와 청양군수 등 단체장과 도의원들이 줄줄이 한나라당에 입당서를 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천안에선 민주당 소속 도의원과 시의원들이 지역의 비난여론을 의식한 때문인지 당적을 옮기지 않은 채 관망하고 있다.

두 의원의 탈당은 지역 정가에도 지각변동을 촉발시키고 있었다. 자민련도 그렇지만 민주당 상황은 더욱 말이 아니다. 민주당 충남도지부의 한 간부는 “반노·비노의 태도를 보여온 대전과 충남지역 원내외 위원장들이 조만간 대부분 탈당할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이인제 의원도 포함된 ‘탈당 예상 의원·위원장 명단’을 내보이기도 했다.

자민련과 민주당이 흔들리면서 떨어져나오는 지지세력의 이삭을 챙기는 쪽은 이회창 후보쪽일까 정몽준 의원쪽일까.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예산군 예산읍에 사는 성기원(36)씨는 “처음엔 이회창씨의 ‘예산 고향론’이 먹히지 않았지만 지금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고 지역 분위기를 전했다. “이회창 아버지 생가 복원에다 틈만 나면 내려오는 통에 시비가 거의 사라졌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지난 지방선거에서도 예산에선 한나라당 후보들이 자민련 후보와 접전을 벌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 이 후보의 ‘예산 고향론’은 이웃한 지역에도 약발이 먹혔다. 당진읍 채운리에 사는 최아무개(41)씨는 “당진은 물론, 홍성과 청양 인근까지도 이 후보를 고향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예산 부근에선 아무래도 이 후보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얘기다.

반면 예산과 멀지 않으면서도 수도권과 경기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는 천안·아산 지역은 좀 달랐다. 지역 정가에 밝은 한 지역신문 기자는 “사조직 가동능력 등 외형적 조건은 이회창 후보가 앞서지만 실제 여론은 정몽준 의원이 훨씬 좋다”며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보다 정 의원에 대해 기초적인 정보조차 잘 알지 못하더라”고 말했다. 정 의원이 4선 의원인데도 대부분 정치신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안·아산 지역은 이 후보와 정 의원 지지세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양상이다. 전체적으론 이 후보 지지세가 앞서지만 최근 정 의원에 대한 여론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게 지역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이 때문인지 정 의원은 조만간 열리는 천안시민체전에도 직접 참석해 지역 표밭을 훑을 예정이다.

노 후보 ‘충청권 천도론’에 호감

사진/ 충청도민들 사이에서 대선은 흥미 있는 얘깃거리가 아니었다. (심규상)
이인제씨의 고향인 논산 부근은 조용한 편이다. “이인제에 대한 실망이 겹치면서 대선에 대한 얘기조차 잘 나오지 않는다”고 지구당 관계자가 전했다. 하지만 민주당 충남도지부 관계자는 “이인제씨를 누가 끌어안느냐에 따라 충청권 표심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장담했다. 실제로 대전·충남 지역 상당수 원외지구당 위원장들이 “이인제 의원과 공동보조를 취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충북지역도 민심의 속내를 읽기가 쉽지 않다. 충북참여자치연대에서 일하는 한 인사는 “이회창 후보와 정몽준 의원이 주로 거론되고 있지만 좀더 가봐야 여론의 흐름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충북은 이회창 후보의 ‘충청 고향론’이나 자민련의 조직세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이다. 일종의 중립지대에 가깝다. 노풍이 불 때는 의외로 노 후보의 지지도가 가장 높게 나오기도 했다. 충북도지사의 한나라당 입당 등 외부적 조건은 한나라당 분위기지만 바닥에선 정 의원 지지세가 만만치 않은 편이다.

노무현 후보가 충청표를 의식해 치고 나온 ‘충청권 수도이전론’은 나름의 반향을 일으켰지만 물줄기의 흐름을 바꾸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월15일 저녁 대전에선 80년대 이후 지역 민주화운동을 벌여온 대전지역 각계·각층 인사 수 십여명이 머리를 맞댔다. 이들은 이날 노 후보 지지를 위해 개혁국민정당 등에 가입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대전과 충남지역 개혁국민정당추진위원에는 1달 남짓 동안 1500여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예상외로 짧은 기간에 많은 사람이 몰렸다. 윤종세(40) 대전개혁국민정당 추진위원은 “노 후보가 밝힌 행정수도와 청와대의 충청권 이전 공약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했다. ‘충청지역 천도론’이 발표된 이후 노 후보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지역언론도 노 후보의 행정수도 이전 발표 이후 각각 수차례에 걸쳐 특집 기획기사 등을 통해 분권 필요성과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론’의 당위성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노 후보 공약에 대한 여론의 호응이 높게 나타나자 이회창 후보쪽도 “행정수도 이전은 최소 40조원의 막대한 자금이 소요돼 비현실적”이라며 ‘기능별 지방분산이전론’으로 맞불을 놨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대다수 시민들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목원대 경제학과 조연상 교수는 “기능별 지방분산으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수도이전 정책은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적극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9월부터 지역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지방분권운동본부’(가칭)에도 각계각층이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밝히고 있다. 어쨌든 ‘수도이전론’이 충청권에선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고, 먼저 치고 나온 노 후보쪽이 ‘선점효과’를 얻은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결국 ‘까봐야’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충청도 바닥민심에서 대선은 흥미 있는 얘깃거리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충청도 사람들은 대선을 화제로 삼아 말하기를 꺼렸다. 충청지역 정서를 대변할 만한 후보를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됐다. “이회창 후보는 충청도 사람인 것 같기도 한데, 당을 보면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것 같으니 영 헛갈리고, 노무현 후보는 충청도로 수도를 옮기겠다니 한번 봐줄 만하지만 충청지역 정서완 딴판인 것 같고, 정몽준 의원은 전라도도, 경상도도 아니니 한번 눈길을 줘볼까.” 충청도 사람들의 고민은 아직 이 지점에서 멈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충청도가 들러리 섰다는 얘기는 안 들어야지유. 적어도 ‘충청도가 결심하면 된다’, ‘충청도 사람들이 현명하다’는 소리는 들어야지유. 그럴라치면 좀더 기다려봐야지유. 누가 젤 나은지.” 대전역 광장에서 만난 김상곤(45)씨의 말이다. 여론조사기관에서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충청 민심은 결국 ‘까봐야’ 알지도 모를 일이다.

심규상/ 대전참여자치연대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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