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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신의주, 신의가 추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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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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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 얼굴에 먹칠한 양빈 장관 연행사태…북한은 그의 꾐에 넘어갔다?

“또 한 차례 회오리바람이 몰아칠 것 같다. 아마 몇 사람은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모처럼 의욕적으로 시작한 개혁·개방 길에 암초를 만난 셈이다. 그렇지만 첫 시련이 너무 일찍 찾아온 것 같다.”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신의주 특별행정구 양빈 장관이 10월4일 중국 공안에 연행된 소식을 접하자 이렇게 첫 운을 뗐다. 노비자 입국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신의주 특구를 방문하려는 그를 연행한 것은 곧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대한 중국 당국의 강한 경고 제스처로 보이며, 그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분석이다. 이 관계자는 “양 장관은 곧 김 위원장의 분신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북한 정권이나 김 위원장의 운명을 바꿀지도 모를 막중한 자리에 그를 앉힐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빈의 추락을 예사롭게 볼 수 없는 이유다.

부패단속의 딜레마


사진/ 신의주 특구 대규모 아파트 단지 모형도. 신의주는 외자유치 부실로 제2의 나진·선봉자유무역지대가 될 수 있다. (연합)
양 장관 연행 사건은 특구의 첫 삽을 뜨기도 전에 불거져 북한 지도부에 충격으로 와닿을 게 뻔하다. 또 신의주 특구가 양빈이라는 인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겹쳐져 대외 신뢰도가 크게 떨어지는 바람에 당분간 외자유치는 힘들게 됐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인사 회오리가 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양 장관을 천거한 측근들이 우선 문책을 당하겠지만, 유착 비리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 가능성까지 점치고 있다. 이럴 경우 북한이 첫 자본주의 실험장으로 지난 91년 내세웠던 나진선봉자유무역지대 실패 사례를 고스란히 답습할 가능성도 있다.

당시에도 지금의 신의주 특구 주무부서인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대경추)가 외자유치의 창구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그때도 막상 특구 문을 열어놓았으나 외자유치 실적은 저조했다. 이때 핵심 실무자들이 ‘많지 않은’ 뒷돈을 챙기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문제는 이를 빌미로 북한 사정당국이 체제 단속 차원에서 광범위한 비리·부패 조사를 벌인 것이다. 이때 특구 운영 전문가들을 대거 솎아내는 바람에 특구 운영이 거의 중단되다시피 했다.

당시 사정의 칼날을 맞은 인사들 가운데는 나진선봉 특구 책임자였던 대경추의 김정우 위원장, 김문성 부위원장 등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바깥사정에도 밝았을 뿐 아니라, 외국어 구사도 능숙해 외국 투자가들로부터 많은 호감을 샀었다. 당시 이를 지켜본 남쪽 기업인들은 각종 비리와 부패를 경계는 해야 하나 북한 당국이 체제 단속에 더 신경을 쓰다 보면 성공적인 특구개발은 요원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옥석을 잘 가려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아직은 양 장관의 비리나 연행과 관련해 섣부른 판단을 하기에 이른 대목이 적지 않다. 북한이 사태의 추이를 좀더 지켜볼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양 장관의 임명에 김 위원장의 개인적인 판단이 더 작용했다면 사태 수습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튈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 소식통들의 말을 모아보면 양 장관의 임명에는 그와 밀착관계를 맺어온 북한 내 인사들의 잘못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는 “양 장관 임명 뒤 쏟아져나온 그에 관련된 각종 탈법·비리 혐의를 보고 북한 지도부도 크게 놀란 것으로 알고 있다.

양빈의 자질에 대한 근본적 의문

사진/ 중국 심양 허란춘에서 기자들과 회견하는 양빈 신의주행정장관. 특구행정장관에겐 종합적인 행정능력이 필요하지만 그의 이력서에서는 행정경험을 찾아볼 수 없다. (연합)
김 위원장으로서는 그에 관련된 정보를 아랫사람의 보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런 엄청난 대형사고의 책임은 양빈에 대한 더 철저한 검증절차를 밟지 않았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측근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양 장관 임명 전에 이미 외신이나 홍콩 언론 등은 그를 둘러싼 각종 사업의혹들을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이를 알면서도 그가 신의주 특구 장관에 오르도록 내버려둔 것은 측근들의 보좌기능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가 양 장관이 회장으로 있는 어우야그룹에 대한 의혹을 제기해 이 회사의 주가가 18%나 떨어진 것이 올 1월 초였다. 7월 들어서 세무조사설이 나돌기 시작했고, 그가 중국 세무 당국의 조사를 피하기 위해 북한으로 도망갔었다는 보도가 잇달았다. 하지만 이때도 그는 북한 지도부와 돈독한 관계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는 2001년 7월 평양에 대규모 화훼단지를 만들어 수출산업으로 키우기 위해 평양원예총회사와 ‘평양·유럽·아시아합영회사’를 세웠다. 또 북한의 농업개혁을 돕기 위해 모두 2천만달러를 기부했다고 홍콩 <성도일보>와의 10월5일치 인터뷰에서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김 위원장의 측근들로서는 중국에서도 이름난 갑부인데다 북한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는 그의 수완과 능력에 눈독을 들일 만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특구 행정장관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돈버는 재주만 필요한 게 아니고 종합적인 행정능력이 필요하다. 양 장관의 이력서에서는 행정경험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전문가들도 양 장관이 첫 신의주 특구 장관 임명소식을 접하고는 다들 파격적인 일로 받아들였다. 북한이 정한 6장 101조로 된 신의주 특구 기본법에 따르면 장관은 신의주 특별행정구를 대표하며 입법회의 결정과 행정부 지시를 공포하고, 명령을 내리며 행정부 공무원과 구(區) 검찰소장에 대한 임명·해임권을 갖는다. 신의주 특구에는 독자적인 입법·행정·사법권이 주어지며 특구 장관은 행정부 수반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셈이다.

그가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수완을 발휘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상당 부분은 부동산 투자로 벌어들인 것임을 감안하면 자질과 실력에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일각에서는 양 장관이 평소 비즈니스 관계를 맺어온 외국기업의 초기 투자를 받은 뒤 신의주 땅값을 한껏 올려놓고는 자신의 잇속만 챙기려고 했다는 소문까지 나돈다. 북한 당국도 그의 꾐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최악의 경우 그의 특구 부실 경영의 폐해가 고스란히 북한 정권의 부담으로 넘겨져 회생불능 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이런 관측은 주로 그의 평소 언행이나 중국에서의 비즈니스 활동 행적에 근거한 것들이다.

특구부실 불똥 튈까 우려한 중국

또 다른 문제는 중국 당국과의 긴밀한 협조다. 하지만 이번 일련의 사태를 통해 드러났듯이 양 장관이 중국 당국의 기피인물 가운데 하나로 비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낸다. 더구나 양 장관이 가장 기본적인 노비자 입국 문제를 풀지 못할 정도라면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것이다. 양빈이 초대 행정장관에 임명되자마자 외신이나 베이징, 홍콩 언론들이 그의 각종 비리연루 혐의들을 쏟아낸 배경에는 관련 정보를 일부러 흘린 중국 당국이 자리잡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탈세, 주식투기, 토지 불법개발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신의주 개발의 책임자로 나섰으니 중국 당국으로서는 양 장관뿐 아니라 북한의 신의주 개발 의도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중국 당국이 그의 임명 조짐을 미리 알고 있었는데도 북한 지도부가 양빈을 적극 미는 바람에 달리 손쓸 도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는 한편으로 양빈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돈독한 신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을 무시하는 처사로 비쳐 중국 당국이 불가피하게 인신구속이라는 초강수로 나왔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탈북자 문제로 전전긍긍하던 중국 당국은 애초 신의주 특구가 잘만 운영되면 멀리 보아 북한 체제의 불안전성을 꽤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여긴 듯하다. 하지만 양 장관의 사업방식의 허실을 꿰뚫어봐온 중국 당국으로서는 특구가 부실 운영되어 자신들에게 튈 불똥도 크게 우려한 듯하다.

지금은 양 장관이 풀려난 뒤 북한 당국이 어떻게 나올지가 관심거리다. 그를 계속 앞세우고 정면 돌파를 할지, 아니면 양빈과 북한 내 그의 인맥들을 도려내고 새로운 출발을 할지. 외자유치에 긴요한 신뢰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양빈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다들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래저래 김정일 위원장의 시름만 더 깊어지게 됐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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