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정쟁에 힘센기관 횡포로 만신창이… 연중 감사로 바꿔야 의정 활동 정상화
장면1#
“민주당 A의원은 탤런트 C양을 지역구 행사장에 데리고 와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추행했다. B, C의원도 A의원의 소개로 K, L양 등으로부터 성상납을 받았다.”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9월23일 서울고·지검에 대한 법사위 국정감사장에서 연예기획사들의 성상납 의혹을 폭로했다. 그는 “연예기획사들이 자신들을 수사하던 서울지검 강력부장을 경질시키기 위해 관련 국회 상임위에 로비를 벌여 지방 지청장으로 좌천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포츠신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이를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홍 의원은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음란비디오를 폭로하겠다며 반격에 나섰다. 장전형 민주당 부대변인은 “홍 의원이 계속 허위사실을 유포할 경우 한나라당 A의원의 여자문제, 이회창 대통령 후보 가족을 둘러싼 음란비디오 문제 등을 우리도 꺼내들 수밖에 없다. 홍 의원이 밝힌 정도의 유언비어는 우리 당에도 넘치고 넘친다”고 한술 더 떴다. 여의도가 정말 섹스게이트에 휘말릴 것인가?
장면2#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9월24일 국회 정무위의 금융감독위원회 감사에서 “한화그룹이 대한생명을 인수하기 위해 대통령 비서실장과 민주당 대표, 대통령 후보 등에게 로비를 했다”고 주장하며 김승연 회장의 전화 통화 내용을 옮겨적었다는 문서 3장을 흔들었다. 민주당 의원들이 출처를 대라고 추궁하자 “도청을 통해 얻은 정보라 공개할 수 없다”며 국감장을 빠져나갔다. 이후 국감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됐고, 결국 민주당 의원들의 집단 퇴장으로 국감은 파행으로 치달았다. 장면3# 지난 9월24일 한나라당 ㅇ의원 사무실. 국감자료 제출과 관련해 한 보좌관이 재경부 사무관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재경부) “요청하신 경제장관 간담회 자료 말인데요, 그 많은 걸 어떻게 다 제출하라는 겁니까?” (국회) “대우 처리와 관련한 회의가 몇차 몇차 회의인지 우리가 자료를 갖고 있어요. 그것만 주면 되는데 뭐가 많다는 겁니까?” (재) “….” (국) “그건 줄 수 있죠?” (재) “그건 자료가 없는데요.” (국) “아니 관련기관에 뭐라고 통보를 했을 것 아니에요.” (재) “그건 구두로만 했습니다. 자료로 남겨두지는 않았어요.” 국회의 막가파 행태 즐기는 행정부
올해도 어김없이 국정감사 철이 돌아왔다. 정치권은 저질 폭로와 욕설, 정쟁으로 날을 새우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자료제출을 하지 않으려고 혈안이 돼 있는 행정부의 구태도 여전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완전히 사라졌다가 지난 87년 민주화 열풍을 타고 가까스로 부활한 국정감사 제도.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질이 떨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높다. 일부에서는 아예 국감 무용론까지 제기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데는 국회와 행정부 모두에 책임이 있다. 특히 대통령선거가 3개월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은 대권가도의 총알받이임을 자처해 정쟁을 일삼고 있다. 한나라당은 김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후보를, 민주당은 이회창 후보를 겨냥하고 있다. 당지도부는 아예 공식석상에서 소속 의원들에게 상대 당에 대한 파상공세를 펼치도록 독려하고 있다. 이에 따라 헌법재판소와 산업자원부에 대한 법사위와 산자위 국감에서조차 현안과 동떨어진 병풍수사, 대북정책 등을 놓고 입씨름이 벌어졌다. 이처럼 의원들은 정쟁에만 온 힘을 쏟으면서 민생 현안에 대해서는 서면질의로 대체하거나 아예 무시하기 일쑤다.
행정부는 의원들의 이런 막가파식 행태를 속으로 즐긴다.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0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400개에 가까운 피감기관을 감사하다 보니 하루에 2∼3개 기관을 감사해도 시간이 모자란다. 애초에 감사다운 감사는 이뤄질 수 없는 형편이다.
특히 올해는 행정부의 자료제출 거부행태가 더욱 심해졌다는 게 의원들의 평가다. 일단 제출자료의 양이 너무 많다고 엄살을 떨다가, 정작 핵심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자료가 아예 없다고 우기는 수법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현 정부 초기에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이 이뤄진 대통령인수위나 경제장관간담회, 경제대책조정회의는 핵심자료를 거의 제출하지 않고 있다. 사실상 조직적 은폐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자료제출 거부는 국세청·국가정보원·감사원 등 힘있는 기관일수록 노골적이다. 국세청은 건설사의 대한주택보증(주) 출자금 손비처리 심판청구 결정문은 제출하면서 언론사의 무가지 심판청구 결정문은 과세자료라며 제출할 수 없다고 하는 등 자의적 판단에 따라 불리한 자료의 제출을 거부하고 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국세청이 개인정보 보호라는 이유로 거의 아무런 자료도 제출하지 않고 있어 국정감사를 어렵게 하고 있다”며 “거부수준이 조직적”이라고 질타했다.
국정원은 국가기관과 공공기관별 해킹 사례에 대한 자료에 대해 ‘부처의 명예가 실추된다’, ‘공개하면 다음부터 부처들의 자진신고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제출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둘러대고, 전체적인 통계만을 달랑 제출했다. 기관별 실태를 점검하고 유사한 사태를 줄이는 기회로 삼으려던 과학기술정보통신위의 취지는 보기 좋게 무시당한 것이다.
“금융감독원에 금융기관별 스톡옵션 관련 자료를 지난 8월1일쯤 요청했는데, 8월 말이 돼서야 전화를 걸어오더니 이제 각 금융기관에 자료를 요청하려 한다고 하더라. 한달을 쥐고 있었던 거다. 그러고 나서 또 한달이 다 돼가는데 아직도 취합이 안 된다고 한다. 이런 사례가 하도 많으니까 지치게 되고 잊어버리는 것도 많다.”(자민련 소속의 한 비서관)
국감의 공적들… 국감 스타는 바보?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연중 상시 국감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미국 등은 상임위원회·소위원회 제도가 발달해 있어 1년 내내 자료요청과 증인채택, 청문회가 가능하다”며 “우리처럼 20일 만에 모든 국가기관을 감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김민전 경희대 교수도 “국감 기간을 따로 정한 것은 독재치하에서 여당이 국감을 거부할까봐 만든 방어장치”라며 “이제는 그런 시대가 지났으므로 (국감 기간을 정해놓은 것은) 당연히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금처럼 모든 위원회가 한날 한시에 전국을 휩쓸고 다닐 이유가 없다. 위원회별로 문제가 있는 기관만을 골라 이틀이고 사흘이고 계속 감사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정작 의원들은 이런 제도개혁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행정기관을 상임위별로 나눠 관리하면서 지역구 민원이나 해결하고, 군림하기에는 지금 이대로가 더 편리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국회 개혁의 핵심은 정당 민주화”라며 “당의 중앙집권화로 의원들이 자율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개별 의정활동은 자연히 뒷전으로 밀려나게 돼 있다”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한나라당 한 보좌관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국감 열심히 하는 의원은 바보 취급받는다. 그렇게 열심히 해서 재선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 의혹성, 폭로성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다음 선거에서 공천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재성 기자 firib@hani.co.kr

사진/ 욕설과 저질 폭로, 무책임한 정쟁이 판치는 국감. 민생현안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겨레 이종근, 한겨레 김경호 기자, 이정용 기자)
장면2#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9월24일 국회 정무위의 금융감독위원회 감사에서 “한화그룹이 대한생명을 인수하기 위해 대통령 비서실장과 민주당 대표, 대통령 후보 등에게 로비를 했다”고 주장하며 김승연 회장의 전화 통화 내용을 옮겨적었다는 문서 3장을 흔들었다. 민주당 의원들이 출처를 대라고 추궁하자 “도청을 통해 얻은 정보라 공개할 수 없다”며 국감장을 빠져나갔다. 이후 국감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됐고, 결국 민주당 의원들의 집단 퇴장으로 국감은 파행으로 치달았다. 장면3# 지난 9월24일 한나라당 ㅇ의원 사무실. 국감자료 제출과 관련해 한 보좌관이 재경부 사무관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재경부) “요청하신 경제장관 간담회 자료 말인데요, 그 많은 걸 어떻게 다 제출하라는 겁니까?” (국회) “대우 처리와 관련한 회의가 몇차 몇차 회의인지 우리가 자료를 갖고 있어요. 그것만 주면 되는데 뭐가 많다는 겁니까?” (재) “….” (국) “그건 줄 수 있죠?” (재) “그건 자료가 없는데요.” (국) “아니 관련기관에 뭐라고 통보를 했을 것 아니에요.” (재) “그건 구두로만 했습니다. 자료로 남겨두지는 않았어요.” 국회의 막가파 행태 즐기는 행정부

사진/ 국정감사 자료들은 대부분 속 빈 강정이다. 국회의원들에게 제출된 국정감사 자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이용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