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선언 100일, 절망은 없다

327
등록 : 2000-09-27 00:00 수정 :

크게 작게

북쪽의 적극적 태도로 합의사항 이행에 가속화… 남한 보수의 우려가 장애물 돼서야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선언이 지난 9월22일로 100일을 맞았다. 갓 태어난 아기가 100일을 넘기는지를 보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듯 분단 역사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정상회담 합의문도 비교적 순탄하게 100일을 넘겨 안도감과 함께 기대감을 갖게 한다.

지난 6월14일 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공동선언’에 서명하는 장면을 뜬 눈으로 지켜 본 사람들 가운데 “과연 저것이 얼마나 갈까” 하는 일말의 우려를 갖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28년 전인 지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을 때, 가깝게는 8년 전 92년 2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가 발표됐을 때 금방 통일이라도 될 듯이 한껏 부풀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빠진 풍선처럼 허탈해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남북 사이의 수많은 합의와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은 북쪽 때문이라는 게 대부분 남쪽 사람들의 시각이다. 남북 당국간 최초의 합의문서인 7·4공동성명은 물론 통일의 대장전으로 명명됐던 남북기본합의서까지 한낱 ‘빈 종잇장’으로 전락해 버린 것에 대해 오로지 북쪽에 책임을 돌리곤 했던 것이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이었다.

‘합의문 불이행=북쪽 책임’의 역전


남북 정상이 최초로 만나 탄생시킨 ‘6·15남북공동선언’의 경우 적어도 발표 100일을 맞은 지금까지는 종전의 고정관념, 즉 ‘합의문 불이행=북쪽 책임’이라는 등식을 적용시킬 수 없다. 남과 북이 한목소리로 공동선언 이행을 강조하고 있으며 서로가 상대방에 불이행 책임을 전가할 만한 우려스런 사태도 발생하지 않고 있다. 약속 위반을 밥 먹듯 한다는 북쪽이 오히려 공동선언 이행에 적극적이고, 항상 합의문을 충실히 실천해왔던 남쪽에서는 합의문 이행에 제동이 걸리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6·15남북 공동선언은 △자주적 통일 이룩 △양쪽 통일방안의 공통성에 기반한 통일지향 △이산가족 친척 방문단 교환과 비전향장기수 송환 △경제협력 등 다방면의 협력 교류 실시 △당국간 대화 개최 및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 약속 등 5개항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가운데 통일 관련 제1, 2항은 앞으로 접촉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사항들은 일부에서 ‘우려’를 나타낼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

북쪽은 6·15공동선언 발표 이틀 뒤인 지난 6월17일 적십자회담 개최를 먼저 제의했다. 정상회담이 끝난 지 이틀 만에 적십자회담 개최를 제의한 것은 공동선언 제3항을 비롯 합의사항 전반을 준수하겠다는 북쪽의 의지 표현이었다.

지금까지 북쪽이 어긴 유일한 합의사항은 2차 적십자회담을 지연시킨 것이다. 북쪽은 비전향장기수 송환 즉시 제2차 적십자회담을 열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약속 위반으로 문제 삼기는 힘들다. 비전향장기수 63명의 송환 직전에 열린 제2차 장관급회담에서 이산가족 생사확인 및 서신교환 문제를 논의키로 하는 한편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사업을 두 차례 더 진행한다는 ‘진일보’한 합의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생사확인과 서신교환은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있어 일회성 상봉보다 더 효율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더욱이 공동선언에 명시되지 않은 두 차례의 추가 상봉 기회를 마련키로 한 것 등은 장기수 송환 즉시 열기로 했던 제2차 적십자회담에서 거둘 수 있는 성과를 미리 앞당겨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

군사분야 회담 수용, 공동선언의 확장

유리그릇 다루듯 조심스럽게 공동선언을 대하는 북쪽 태도는 군사당국자간 회담 수용에서도 나타난다. 공동선언에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항목을 포함시키는 데 반대하고 실제로 공동선언 발표 이후 군사분야 대화만큼은 한사코 피해왔던 북쪽은 9월13일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의 서한을 통해 국방장관회담을 수용한 데 이어 17일에는 제주도를 회담 장소로 하자고 전격 제의했다.

북쪽은 군사분야 회담을 수용하게 된 배경을 공동선언의 정신으로 설명했다. 정상회담 이후 이뤄진 모든 회담과 접촉의 첫머리에서 하나같이 공동선언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던 북쪽은 군사회담 수용에 대해서도 “력사적인 북남공동선언에 천명된 정신에 따라 북남 사이에 제기되는 군사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라고 밝혔다.

군사회담 수용 사례는 북쪽이 앞으로도 공동선언을 실천하기 위한 남북간 대화 접촉의 경우, 설령 그것이 공동선언에 명시돼 있지 않다 하더라도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공동선언의 파급효과가 미처 예상치 못한 분야에까지 미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청신호이다.

9월11일 서울을 방문한 김용순 특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구두 메시지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김 위원장은 이 메시지에서 “공동선언에 훌륭한 내용들이 많이 나왔는데 또 과거처럼 되돌아 가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공동선언을 확실히 실천하고 이행해야 합니다”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쪽 인사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다. 정상회담 이후 대남 비방을 중단하고 남한 언론사 사장단에 약속했던 송이 추석선물을 공수해 오는가 하면 예정에 없던 국방장관회담까지 수용하는 등 공동선언문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약속’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

정작 문제는 남쪽 내부에 있다. 일부에서는 너무 빠른 관계진전에 놀라서인지는 몰라도 ‘속도 조절론’을 제기하는가 하면 심지어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나서 이렇게 가다가는 적화통일이 우려된다는 등 웃지 못할 ‘막말’까지 돌출하고 있다.

지난 9월4일 하룻동안 이른바 보수 우익층이 갖고 있는 ‘우려’를 볼 수 있는 발언들이 두건이 있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이날 조찬을 겸해 가진 ‘의원 공부모임’에서는 내년 이맘때쯤 복원될 경의선 철도와 비슷한 시기에 개통될 문산-개성 도로가 ‘남침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같은날 대북 식량차관 제공을 논의한 한나라당 총재단 회의에서도 5만t 안팎의 식량 무상지원은 가능하다는 당 입장을 정리하면서 그것도 지원식량이 군량미로 쓰이지 않고 굶주리는 북한 주민에게 전달된다는 점이 투명하게 밝혀져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안보제일론자’들의 지겨운 레파토리

만약 북쪽이 문산-개성 축을 따라 남침한다면 집중포화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은 군사 전문가가 아니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상식에 지나지 않는다. 만에 하나 남북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문산-개성 축은 북진공격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제 전쟁이 일어나면 육해공 전면 입체전이 벌어져 전후방이 따로 없게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어온 ‘안보 제일론자’들이 유독 문산-개성 축만 그토록 주목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군량미 전용 가능성 또한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북쪽 당국이 남쪽에서 지원받은 식량을 주민들에게 배급하고 주민들에게 배정된 원래의 식량을 군량미로 돌린다면 이것은 누구를 지원한 것일까.

6·15공동선언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북쪽 아닌 남쪽에서 돌출하고 있는 현재 상황은 ‘합의문 불이행=북쪽 책임’이라는 고정관념을 새삼 뒤돌아보게 만드는 동시에 남쪽 사회의 보수우익층이 갖고 있는 냉전적 사고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비합리적인가를 새삼 뒤돌아보게 만든다.

정일용/ 연합뉴스 민족뉴스취재본부 북한부기자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