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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공직자 재산을 ‘안전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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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9-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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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의원 출마 계기로 중립화 논란… 정책 관련된 이해관계 많아 엄격한 규제 필요

사진/ 정몽준 의원은 현대중공업 지분을 포기할 수 있을까? 정 의원의 대선 출마 선언을 앞두고 공직자의 재산관리 문제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정용 기자)
정몽준 의원이 대선에 출마하면서 권력과 재벌기업의 관계가 다시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재계 서열 10위의 거대기업 현대중공업의 사실상 주인인 정 의원이 대통령으로 선출됐을 때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공정한 업무 수행이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드러내놓고 특정 기업을 편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재계 관계자들은 적어도 현대중공업이 불이익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증권시장 관계자는 “정 의원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순간 현대중공업의 주가가 2배 이상 뛰어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몽준 의원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실제로 현대중공업에 유리한 정책을 취하느냐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애초부터 그러한 가능성을 봉쇄하는 제도적 장치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아주대 김호섭 교수는 “고위 공직자들은 정책을 결정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정보를 접한다. 따라서 정책 결정에 따라 직·간접적으로 가치가 달라지는 공직자의 재산은 처음부터 엄격하게 관리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 의원도 이 같은 여론을 의식해 “현대중공업과 중립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다각적인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으나 구체적인 방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현대중공업 주가 2배 이상 오른다”


그렇다면 중립화의 방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와 관련해 임기 중 제3자에게 재산관리를 맡기는 블라인드 트러스트(백지위임신탁)와 재단에 기부하는 방안 등 몇 가지 대안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제도적 장치는 물론 이 문제에 대한 인식과 연구조차 거의 이뤄지지 않은 실정이다. 몇몇 공직자윤리규정에 부분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선언적인 의미만 담고 있을 뿐이다. 법으로 정해져 있지만 지켜지지 않는 것도 있다. 가장 구체적인 사례가 국회 상임위 배분이다. 국회법은 이해관계가 있는 의원을 해당 상임위에 배정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전문성을 살린다는 핑계로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공직자들이 업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마련됐다. ‘공직자들이 사적 이해관계에 기초해 발생하는 부당한 의사결정’을 사전에 막자는 취지다. 이익충돌의 금지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원칙에 의해 이뤄져왔다. ‘제척’과 ‘박탈’이다. 제척이란 이해관계가 걸린 공직자를 정책결정 과정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공정한 의사결정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해당 업무를 아예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지난 1월 뉴욕시 윤리위원회가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에게 그가 최고경영자로 있는 블룸버그통신에 경제적 이익이 돌아가는 어떤 형태의 의사결정에도 참여하지 못하도록 요구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처분 가능한 신탁 방안이라야 의미

그러나 이해관계가 걸린 공직자가 의사결정 과정에 불가피하게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장·차관 등은 많은 사안에서 자신의 이해관계와 걸리기 때문에 의사결정 과정에서 모두 빠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때 적용되는 것이 ‘박탈’의 원칙이다. 박탈이란 사람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공직자의 이해관계를 제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책결정에 따라 증가하거나 줄어들 수 있는 공직자의 재산을 따로 관리하는 방법이다.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돼온 제도는 블라인드 트러스트다. 주식과 채권 등 자신의 재산을 공직에 종사하는 동안 제3자에게 맡겨 관리하도록 하는 제도다. 물론 공직자는 재산 관리인의 업무에 관여할 수 없고, 더 나아가 재산 관리인이 어떤 방식으로 재산을 관리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공직자가 자기 재산이 특정 기업에 투자됐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정책결정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몽준 의원이 현대중공업 처리를 위해 택할 수 있는 방법도 블라인드 트러스트가 바람직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충남대 윤태범 교수는 “완전한 의미의 블라인드 트러스트라면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한결법무법인의 박경신 미국변호사도 “재산권을 보호하면서 공직자의 이익충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블라인드 트러스트밖에 없다”며 “문제는 이를 얼마나 제대로 시행하는가 여부”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의 정몽준 의원 지분을 신탁회사에 맡겨 관리하게 하고, 신탁회사가 그 지분을 매각하는지 그대로 보유하는지 전혀 알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정 의원이 블라인드 트러스트에 대해 얼마나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최근 지분 매각 가능성에 대해 ‘중립화 방안’을 언급하면서도 “매각은 어렵지 않겠느냐”는 뜻을 밝혔다. 경영권을 행사하지는 않되 제3자에게 매각하지는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차선책으로 거론되는 것은 정주영 전 회장이 세운 아산재단에 현대중공업 지분을 넘기는 방안이다. 일단 공익재단에 넘기기 때문에 명분도 서고, 재단에 출연하고 나면 이를 다시 움직이기도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의원이 아산재단 이사장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또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차피 현대중공업에 대한 정몽준 의원의 지배력은 계속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 의원의 현대중공업 지분은 11%에 불과하다. 회사에서의 직함도 고문이다. 그러나 정 의원은 현대중공업의 실질적인 오너다. 그를 견제할 2대주주가 없기 때문이다. 또 사실상 그의 영향권 아래 있는 자사주 지분이 30.44%에 이른다. 경영권이 위협받을 때 회사는 언제든지 자사주를 우호세력에게 넘겨 현재의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다. 어떤 설명과 변명을 들이댄다 해도 현대중공업은 확고한 정 의원의 통제 아래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현대중공업의 경영권 유지를 전제로 한 신탁이나 재단 기부 등의 방안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다. 김호섭 교수는 “블라인드 트러스트는 재산을 맡긴 공직자가 처분 여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도록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처분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이뤄지는 신탁 방식은 진정한 블라인드 트러스트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다만 정몽준 의원을 계기로 한국에도 공직자 이익충돌규제법이 정식으로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7월 부패방지위원회가 마련한 공무원행동강령 권고안도 이익충돌이 발생할 때 직무회피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제척의 길을 열어놨을 뿐이다. 최고위층 공직자들에게 들이대야 할 잣대인 블라인드 트러스트 등 박탈의 원칙과 관련된 조항은 빠져 있다. 부패방지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중요한 대상은 일선 공무원보다 고위 공무원이다. 특정 지역에 부동산을 많이 가진 사람이 시·도지사로 선출되는 경우도 전형적인 이익충돌의 사례에 속한다. 그러나 블라인드 트러스트 등 고위 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규제 입법을 추진할 경우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돼 쉽게 손을 대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법적 장치로 규제… 공직자 저항 거세

정책 결정자의 의지에 따라 기업이 죽고 사는 사례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97년 외환위기가 터진 뒤 국내에서 1, 2위를 다투던 두개의 거대 그룹이 공중분해됐다. 대우와 현대다. 김대중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 때문에 계열사 간 지원과 금융권으로부터의 자금조달 길이 막히면서 힘없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대우는 98년 말부터 가중돼온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99년 7월 사실상 파산했다. 현대는 2000년 3월 현대투신의 유동성 위기를 시작으로 현대건설·현대석유화학·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 등이 차례로 손을 들었다. 이들의 경영권은 채권단 수중으로 넘어갔으며, 현대그룹은 현대상사·현대상선·현대엘리베이터 등 몇개 기업만 남는 미니 그룹으로 전락했다.

두 그룹의 몰락은 근본적으로 외환위기의 충격파를 견디지 못한 허약한 기업체질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약 당시 대통령이 정주영 전 현대 회장이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어떤 경우에도 현대그룹의 공중분해를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정부가 재벌개혁 정책을 조금만 후퇴시켰다면, 아니 현대자동차를 분리하지 않고 계열사 간 지원을 용인하기만 했더라도 현대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정부 정책이 기업의 생사를 좌우하는 게 현실이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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