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협조공문은 기자 출신의 작품

426
등록 : 2002-09-11 00:00 수정 :

크게 작게

‘신보도지침’ 논란 일자 한발 물러선 한나라당…언론 출신 공보특보 3인방에 의혹의 눈길

사진/ “도대체 누가 만든 거야?” 방송사 협조공문 파문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한나라당 국회의원들.
“그럼 당 직인을 잘못 관리한 총무국장을 잘라야겠네? 정말 웃기는 짓들만 하는군”, “자꾸 이런 식으로 나가면 열심히 일하는 당직자들마저 시니컬해질 수밖에 없다”….

지난 9월5일 서청원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 지도부가 ‘신보도지침’ 논란을 불러온 ‘불공정보도 시정촉구’ 공문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자, 한나라당 내부는 크게 술렁였다. 지도부를 향해 육두문자를 내뱉는 실무 당직자들도 있었다. 방송사와 싸움을 중단 없이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이른바 ‘한-문 전쟁’으로 불리는 한나라당과 문화방송의 공방에서 판정패당했다는 자괴감, 이번 사태를 주도한 핵심들은 뒷전에 숨고 힘없는 실무 당직자들만 희생양으로 만든다는 반발 심리가 뒤엉킨 것이다.

실무 당직자의 실수?


9월5일 이른 아침, 확대당직자회의에서 이뤄진 사과 발언은 잘 짜인 각본 같았다. 먼저 서청원 대표, 이상배 정책위의장 등 지도부가 오랫동안 수해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무능한 대응을 비판하며 분위기를 잡았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현경대 공정방송특위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8월27일 방송사에 대한 협조공문을 일부 언론이 ‘신보도지침’이라고 표현했는데…. 매우 유감이다. 방송 보도로 인해 우리 당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뜻을 담은 협조요청이었다. 일부 표현이 매끄럽지 못해 오해를 일으킨 데 대해서는 유감스럽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서청원 대표는 즉각 “당에서 대외 공문을 보낼 때는 공정방송특위 간사나 위원장, 당 대표가 사인하는 당규를 만들 필요가 있다”며 사무총장에게 대책수립을 주문했다. 그리고 김영일 사무총장이 결론을 맺었다. “당의 직인이 찍혀 나가는 공문에 대한 관리가 소홀했다. 이번 사안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다. 나라도 봤으면 오해스런 부분은 손봤을 텐데…. 이번 실수와 관련된 실무자를 문책조처하겠다.” 이정연씨 병역비리 의혹을 보도할 때 ‘이회창 후보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자제해달라고 적은 것은 실무자의 단순 실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최종 책임도 한나라당 직인을 소홀히 관리한 실무당직자, 즉 총무국장 몫으로 돌린 격이었다.

지도부의 의도는 분명했다.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독재적 언론관을 비판하는 쪽으로 파문이 확산되자 실무 당직자 몇몇의 실수로 사태를 축소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협조공문 파문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방송사에 공문을 보내는 것은 무리라는 이견이 공정방송특위 안에서도 제기됐다. 그런데 몇몇 위원들이 ‘지난번에도 공문을 보냈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얘기했다. ‘문화방송이 너무 적대적이다. 더 세게 밀어야만 달라진다’는 주장도 있었다.” 공정방송특위에 참석한 한 위원은 공문 작성 당시 내부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강경파’로 분류된 다른 한 공정방송특위 위원은 좀더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냈다. “모든 방송사가 비슷하지만, 문화방송은 정말 이회창 후보를 악의적으로 물고늘어졌다. 그런데 믿을 만한 한 공정방송특위 위원이 ‘대선 때까지 이 후보 병풍 문제를 집중 보도하라는 김중배 사장의 지시가 있었다’는 문화방송 내부자의 제보가 담긴 문건을 들고 왔다. ‘정말 이럴 수 있나’,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한나라당 안에는 문화방송의 적대적 보도 태도를 어떻게든 중단시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공정방송특위가 체계적인 대응책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문화방송에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5일 방영 직후다. 국민경선을 다루면서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일방적으로 띄워줬다고 판단한 한나라당은 소속 의원들의 문화방송 출연을 전면 금지시켰다. 당 차원에서는 편파방송대책특위를 구성해 항의방문과 민사소송까지 제기했다. 한동안 휴전상태가 이어졌다. 하지만 7월 검찰이 이정연씨 병역비리 의혹을 수사하면서 적대감은 한층 더 고조됐다.

문화방송에 강공 펴다 역풍 맞아

사진/ 지난 9월5일 한나라당 중앙당사 앞에서 방송탄압을 규탄하며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언론노동조합 소속 조합원들. 한나라당과 문화방송의 공방은 계속된다.
공정방송특위로 조직을 확대·개편했고, 편파방송 사례도 계속 수집했다. 한나라당은 △<오늘의 역사>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 사건을 당시 배석판사였던 이회창 후보가 주도한 것처럼 보도하고, 법복 입은 이 후보 사진까지 내보낸 것 △라디오의 <차인태 입니다>에서 주간 오마이뉴스의 김당 기자와 대담 형식으로 김대업씨 주장만 일방적으로 전달한 것 등에 특히 분개했다.

분노한 한나라당은 8월 들어 문화방송을 겨냥한 구체적인 대응책을 모색했다. 8월7일 공정방송특위는 △국회 문화관광위 소집 △공정방송 촉구 공문 발송 등 대응 방침을 굳혔다. 이에 따라 8월14일 방송 4사에 첫 공문을 발송했고, 문화방송을 국정감사 대상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얘기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1차 공문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당시 상황을 관망하던 방송사들이 문건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부에서는 강경론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당 3역 가운데 한 인사는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서 “문화방송 기자들의 당 출입을 금지하고, 전면전에 들어가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서청원 대표는 “문화방송 출신인 하순봉 최고위원도 계시니 좀더 지켜보며 잘 처리하자”며 말렸다. 하지만 이 당직자는 “나는 다른 대안이 없다. 이 방법 외에 다른 방침에 대해서는 나한테 맡기지 말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서 대표는 8월21일 김중배 사장을 만나 화해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견만 확인됐고 한나라당 내부는 강경기조에 완전히 압도됐다. 8월26일 한나라당 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문화방송을 국정감사 대상에 포함시키는 법률안이 제출됐고, 다음날인 27일 문제의 2차 협조공문이 발송됐다. 물론 문화방송을 비롯한 방송 4사 모두에게 전달됐다.

잇단 강공은 그러나 문화방송의 반격을 촉발했다. 문화방송은 8월29일 오후, 이 협조 공문을 전격 공개하며 ‘한나라당의 방송장악 음모론’을 역설했다. 한나라당도 8월30일 의원총회를 열고 ‘김중배 사장 배후 지시론’을 제기하며 맞불을 놓았다. 서청원 대표와 이원창 의원은 “김중배 사장이 임원회의에서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제거될 것이다. 대선까지 병풍문제를 크게 보도하라고 지시했다”고까지 주장했다. 하지만 이 발언은 조작 논쟁과 함께 더욱 큰 역풍을 몰고 왔고, 9월5일 한나라당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는 반전됐다. 서 대표를 비롯한 핵심 당직자들은 이제 “잘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며, 애꿎은 실무 당직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데 동참하고 있다.

“초안을 놓고 논의는 했지만…”

사진/ 협조공문을 둘러싸고 언론인 출신 공보특보 3인방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왼쪽부터 고흥길, 이원창, 양휘부 공보특보.
협조공문 파문은 과연 누가 주도했을까. 현재 공정방송특위에는 현경대 위원장을 비롯해 고흥길 간사, 이원창·맹형규·이윤성·박종희·심재철·이주영·이경재·김병호 의원 등 10명의 현역의원과 양휘부 공보특보, 김경훈 법무특보가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전후 사정을 가장 잘 알 만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대부분 손사래를 친다. 방송기자 출신인 맹형규·심재철 의원 등은 “처음 논의 과정에서 빠졌기 때문에 정확한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청원 대표실 한 핵심 인사는 “이미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서 관련자들이 거세게 비판받았다. 모두 특보들을 성토했고, 경고도 충분히 보냈다. 그 사람들을 갈아치울 수는 없고, 공개석상에서 000 책임져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회창 후보의 특보 직함을 달고 있는 인사들이 이번 사건의 주역이라는 것이다. 이 후보의 한 측근 참모도 “문화방송의 병풍 보도 태도를 보고받은 이회창 후보는 심기가 아주 불편했다. 이런 보고를 하고, 그 속내를 헤아릴 사람이 과연 누구겠냐. 특보 라인이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공정방송특위 위원인 ‘언론인 출신 공보특보 3인방’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고흥길 의원, 경향신문과 문화방송 기자를 거친 이원창 의원, 한국방송 창원총국장이었던 양휘부 공보특보가 그들이다. 이들은 한때 잘 나갔던 언론인들로, 현재 이회창 후보를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최측근들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관련 사실을 부인한다. 김중배 사장 배후지시설을 제기했던 이원창 의원은 “모두들 나와 고흥길, 양휘부 세 사람을 지목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런 문건을 일일이 작성할 정도로 한가하지 못하다. 실무 당직자가 직접 작성해 제출했다”고 해명했다. 이와 관련해 한 전문위원 이름이 구체적으로 오르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논의·의결 구조 특성상 실무자가 초안을 작성했더라도 최종 책임은 이들 특보 3인방에게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초안을 놓고 특보단과 공정방송특위 논의를 거치면서 내용이 수정·보완되기 때문이다.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된 한 특위위원도 특위 안에서 문건이 논의됐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실무자의 초안을 놓고 논의를 했지만, 최종 데스크를 거치지 않았다. 좀더 검토하기로 의견을 모았는데, 실무자가 그냥 방송사로 보냈다. 이것은 진실이다.”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