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스런 인물만 핵심라인에 포진… 일관성과 시스템 플레이도 없다
김대중 정권이 임기 중반을 넘기면서 중대한 위기에 처했다. 고유가와 대우자동차의 매각 무산 등을 계기로 경제의 허약한 체질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의약분업에 따른 의료계의 폐·파업 투쟁이 이어지면서 출구없는 장기 악성분규로 치닫고 있다. 국회는 한나라당의 장외투쟁 등 극단적 대치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 더욱 나쁜 것은 정국 경색의 원인을 대부분 여당이 제공했다는 점이다. 정권 초기처럼 ‘발목잡는 야당’이라고 몰아붙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금의 시국은 정권 차원의 위기라고 진단하기에 충분하다. 모든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면서 민심 이반을 부추기는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는 국민들 사이에 불안을 낳는다. 의약분업에 따른 국민 불편은 짜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 가운데 박지원 전 장관의 의혹 사건 등은 현 집권세력에 대한 ‘신뢰의 위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갈가리 찢겨지는 ‘2기 개혁’의 깃발
정권쪽은 그럼에도 수습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과연 정권 차원의 위기관리 시스템이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이다. 혹자는 노동법 날치기와 한보 사태, 김현철 비리 따위가 잇따라 불거지면서 정권의 통제력이 상실됐던 김영삼 정권의 96년 말∼97년 초와 지금이 흡사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8월25일 임기 전환점을 지나면서 치켜들었던 ‘김대중 2기 개혁’의 깃발이 한달 만에 갈가리 찢겨버린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위기의 핵심적 원인은 우선 인사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정치 내지 통치의 본령은 어떤 인물을 어떤 시기에 기용해 통치자의 구상을 펼쳐보이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정권 담임세력’의 면면을 두고 ‘2기 개혁’을 명실상부하게 주도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사람은 드물다. 김 대통령의 한 핵심참모조차 “현재 당과 정부의 고위직 담당자들은 국정을 이끌어갈 만한 진용이 전혀 못 된다”라고 말했다.
정권의 핵심 담임세력이라 한다면 청와대의 한광옥 비서실장, 남궁진 정무수석, 신광옥 민정수석, 행정부의 진념 재경부 장관(경제팀장),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 민주당의 권노갑 최고위원, 김옥두 사무총장 등을 들 수 있다. 청와대와 내각, 당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 라인을 차지한 게 바로 이들이다.
이들 면면의 1차적인 공통점은 김 대통령의 오랜 가신, 그 중에서도 높은 충성심으로 무장해 내밀한 심부름 따위를 충실하게 수행하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한 실장이나 남궁 수석, 권 최고위원, 김 총장 등은 동교동계 비서그룹 가운데서도 기획이나 정책보다는 총무나 자금 담당을 하면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위기 상황, 즉 큰 문제가 발생하면 팔을 걷어붙이고 부처와 당을 장악한 가운데 해법을 제시하고 나서는 사람이 필요하다. 김영삼 정권 때는 어쨌든 이원종 정무수석-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그런 역할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정권에선 그와 비슷한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한마디로 국정 운영의 노하우가 부족한 사람들이 정권의 핵심 직위는 깡그리 차지한 채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매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의사들이 얕잡아본 이유가 있다
현재 정권 담임세력의 면면은 그동안 비슷한 위치에 있다가 떠밀려난 인물군과 비교해도 성격이 잘 드러난다. 이강래 첫 정무수석, 문희상 두 번째 정무수석,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종찬 전 국정원장, 조세형 전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개개 인물의 공과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후자의 그룹은 그래도 여권 인사 가운데 합리적 마인드와 기획력, 정책 조정력 따위를 갖춘 인물로 평가되었다”며 “어느덧 그런 인물들이 물러나고 ‘충성 부대’ 위주의 ‘순혈성’이 확보됐다”고 말했다.
각론으로 들어가보자. 현 정권의 난맥상에는 일관성과 시스템 플레이의 부재가 도사리고 있다. 의약분업에 따른 혼란이 일어나고 대통령이 연일 조속한 수습을 강조하자 청와대와 정부는 ‘호떡집에 불난’ 격이 됐다. 국무총리는 총리대로, 보건복지부 장관은 장관대로,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은 수석대로 제각각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이를 바탕으로 역시 제각각 의료계와의 대화를 터보겠다며 접촉선을 뚫느라 부산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식으로 여러 기관이 중구난방으로 나서면 상대편은 정부를 한층 얕잡아보게 마련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 차원에서 뒤늦게 이에 따른 혼란상이 지적돼 청와대 참모들을 중심으로 의약분업 사태 해결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만들게 됐다”고 전했다.
시스템 플레이의 중요성은 그 중 잘한 것으로 평가되는 대북정책에서 확인된다. 여권 핵심부는 정권 출범 초기 국가안보회의 상임위원회를 활성화했다. 과거 정권에서부터 있었지만 유명무실하던 기구를 가동한 것이다. 국정원장, 통일, 외교, 국방장관, 외교안보수석 등이 참석한 회의를 통해 정부는 대북 문제에 관한 한 ‘일관된’ 정책방향을 세웠다. 남북정상회담 등 남북관계가 성과를 올린 데는 이런 기구를 통한 정책의 조율, 그리고 서해 교전사태 등이 터져도 흔들리지 않았던 일관된 정책기조 등에 힘입은 바가 크다.
국정 난맥상에는 무원칙과 소심함도 한몫 한 것으로 꼽힌다. 지난 6월 이래 의료계가 폐·파업 투쟁에 들어가자 복지부 등 주무 부처는 의료관계법 위반행위에 대한 법적 대처 등의 원칙론을 건의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조정을 통해 풀어야”라며 제동을 걸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당시 최고조에 이르렀던 의사들에 대한 비난여론을 등에 업고 정부가 단호하게 대처했더라면 지금 같은 사태 악화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행정에서는 어차피 모든 이해 당사자를 만족시키는 해법은 없다”며 “모든 관계자와 타협하려는 김 대통령 특유의 스타일이 무원칙한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문제점 인정하기 싫어하는 DJ’
정부는 대신 그뒤 의보수가 인상, 총리 산하 보건의료발전특별위원회 설치 등의 ‘당근’을, 그나마 찔끔찔끔 제시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롯데호텔 노조원의 파업에는 즉각 경찰력을 투입함으로써 ‘법대로’마저 이중잣대가 적용됐다.
정국운영의 과단성 결여는 최근 경색 정국을 풀어나가는 방식에서도 되풀이됐다. 박지원 전 장관 의혹, 윤철상 의원 발언파동, 여당 당직개편, 국회법 날치기 문제 등이 뒤얽혀 있는 상태에서 박 전 장관만 덜렁 사퇴하는 수순이 나온 것이다. 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은 “찔끔찔끔 하나씩 내주는 것보다는 한꺼번에 일괄조처를 하는 것이 야당에 양보를 덜하면서도 국민을 감동시키는 효과가 나올 수 있다”며 “최고위원 회의 등에서 이런 방안을 주장했으나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나라당은 박 장관이 사퇴하자 “그것만 갖고는 안 된다”며 9월21일 부산 집회를 강행했다.
좀더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문제점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김 대통령 특유의 스타일을 꼽는 사람도 많다.
김 대통령은 경제팀 개편을 주축으로 한 8·7 개각 당시 ‘안정’을 선택하면서 경제팀장 겸 재경부 장관으로 진념 장관을 기용했다. 김 대통령은 개각 직후 열린 국무회의에서 “1기 경제개혁은 올바른 방향으로 추진되었으며 다만 부처간 조정과 대국민 홍보 부족이 문제였다”고 진단했다. 경제의 기본 체질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보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김 대통령은 9월4일 방송의 날 회견에서도 “완전 성공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6·25 뒤 최대 위기라던 2년 반 전에 비해 나아진 것 아닙니까. 38억달러의 외환 보유액이 914억달러가 됐습니다”라며 외형적 실적을 앞세웠다.
그러나 유가 급등과 대우자동차의 매각 무산 사태 이후 다수의 전문가들은 우리 경제의 체질이 여전히 허약하기 때문에 외생변수의 충격이 더욱 크다고 진단한다. 또한 허약한 체질의 배경으로 ‘구조조정의 불철저함’을 꼽는다. 김 대통령이 이른바 ‘4대 개혁’의 일환으로 금융, 공기업 등의 구조조정을 수도 없이 외쳐왔지만 정작 실적은 극히 지지부진하다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급기야 정부는 9월22일 공적자금 50조원을 추가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감각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
여권 안팎에서는 이에 따라 위기를 돌파하는 근본대책으로 정권교체와 IMF 위기 당시의 ‘초심’을 되찾는 것이 시급하다는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국민의 협력과 이해를 구하는 접근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당에서는 이런 차원에서 당쇄신 방안과 관련해 최고위원들이 사무총장, 원내총무, 대변인 등 집행 당직을 직접 맡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한 중진 의원은 “최고위원들이 격을 따질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좀더 근본적인 대책으로는 김 대통령의 용인술에 일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견해들이 떠오르고 있다. 김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은 자신에게 편한 사람, 자신에게 익숙한 사람,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챙기는 편향을 드러내왔다. 단순한 ‘관리 유지’로 족한 평상시국이라면 그런 인사들도 문제는 없다. 그러나 비상시국이라면 다르다. 과거와 다른 새로운 처방이 필요한 만큼 익숙한 사람보다는 낯설더라도 새로운 감각을 가진 인물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과거 정권에서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김 대통령은 지금 ‘나와 다른 사람’을 기용하는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박창식 기자cspcsp@hanimail.com


(사진/박지원 전 문화부 장관의 의혹 사건 등은 현 집권세력에 대한 ‘신뢰의 위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진/부산에서 열린 한나라당의 국정파탄규탄집회.야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 하여도 여당의 원인제공을 피할수 없다)

(사진/민주당 간부들과 함께 한 김대중 대통령. 정권은 위기로 치닫고 있지만 수습책은 전혀 나오지 못하고 있다)

(사진/정부는 의사들에게는 끌려다니고 롯데호텔 노조원의 파업에는 즉각 경찰력을 투입함으로써 ‘법대로’에서도 이중잣대를 적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