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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박관용의 ‘묘수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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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9-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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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장관 해임안 처리 과정서 일거양득… 불가항력 상황 만들어 날치기 정국 피해

사진/ "6선의 관록이 날치기를 막았다." 박관용 국회의장은 법무장관 해임안 처리의 최대 승리자로 꼽힌다. (이용호 기자)
“이번 싸움의 최대 승리자는 박관용 국회의장이다. 날치기나 양당 간 물리적 충돌 없이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친정인 한나라당에도 나름대로 성의를 보였고, 민주당에도 불편부당한 국회의장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노장은 역시 다르다.” ….

한나라당이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김정길 법무장관 해임건의안 처리를 사실상 포기한 지난 8월31일 오후 1시20분께.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주변에서 한나라당 몇몇 의원들은 이렇게 웅성거렸다.

한나라당이 8월28일 김정길 법무장관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박관용 의장과 국회는 중대한 정치적 시험대에 올랐다. 박 의장이 과연 한나라당 단독 본회의 의사봉을 잡을까?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나라당이 원내 단독 과반수를 확보했고, 국회의장까지 배출한 상황. 헌정사상 유례없는 정치지형 속에서 전임자인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실천한 “날치기 없는 국회”가 지속될 수 있느냐는 순전히 박 의장 손에 달려 있었다. 6선의 관록을 자랑하는 박 의장은 결국 이 원칙을 지켰다. 노회한 처신으로 첫 관문을 넘어선 것이다.

6선의 관록으로 첫 관문 무사 통과


사진/ 한나라당에는 성의를, 민주당에는 틈새를…. 지난 8월31일 오전 박관용 의장이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에서 민주당 의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해임안이 제출된 8월28일, 박 의장은 여야 간 대화와 타협에 훨씬 무게를 두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해임건의안을 오늘 본회의에 보고할 것이다. 그러나 본회의 표결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반드시 합의해 처리토록 할 것이다.” 다급해진 한나라당은 이규택 총무를 중심으로 전방위 압박에 나섰다. 친정에서 조여오자 박 의장은 급속히 무게중심을 옮겼다. “의회는 다수당과 소수당이 모여 토론하고 대화해서 절충점을 찾는 것이 본질이지만, 의장은 국회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 민주당 정균환 총무가 어제 ‘여야 간 의사일정 합의가 안 되면 사회를 보면 안 된다’고 하기에 ‘그럴 수는 없다’고 답했다.” 명목상 대화와 타협을 강조했다. 하지만 합의하지 않을 경우 국회법에 따라 사회를 보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정치권 안팎에서도 이만섭 전 의장이 확립한 타협의 원칙이 무너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했다. 이번에는 민주당이 반발했다. “박관용 의장은 아직도 한나라당 의장이냐”고 성토하며 실력 저지 방침을 굳혔다. 박 의장은 개정 국회법에 따라 당적을 이탈한 무소속 상태다. 민주당은 본회의 저지조를 편성하고 본회의장 농성까지 계획했다. 여야 충돌의 위기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런데 3당 총무회담이 결렬된 8월30일 오후, 박 의장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31일 오전 9시 마지막 총무회담을 소집하고, 총무회담 결과와 상관없이 오전 10시에 본회의를 소집하겠다.” 최구식 의장 공보수석비서관은 몇 가지 해석까지 덧붙였다. “72시간이 처리시한인데, 71시간30분까지 대화와 타협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나머지 30분은 차선책인 다수결 원칙에 의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의장이 본회의 사회를 맡기 위해 의장실을 나설 때 민주당 의원들이 가로막으면 그 의원들을 밀치고 나올 수는 없는 것 아니냐.” 박 의장의 뜻이라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이중적인 메시지였다. 한나라당은 의사봉을 잡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자신을 의장으로 뽑아준 친정에 최대한 성의를 보인 셈이다. 민주당에도 틈새를 보였다. 본회의장 진입을 막으면 해임안을 강행처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전한 것이다. 노회한 박 의장이 나름의 묘책을 내놓은 것이다.

민주당은 속뜻을 재빨리 읽었다. 이날 저녁 일찌감치 농성을 풀고, 표결 당일인 8월31일 새벽 소속의원들을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으로 보냈다. 의장의 국회 출근길을 원천봉쇄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의장을 가두는 폭력적 방식으로 국회를 무력화했다”고 분통을 터뜨리며, 뒤늦게 의장 구출조를 파견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천연덕스러웠다. 이낙연 대변인은 “박 의장의 10시 본회의 발언을 분석한 결과 실력저지를 할 테면 그때 오라는 뜻으로 풀이했다”고 반박했다. 박 의장이 물리적 충돌을 우려해 의도적으로 본회의 시간을 공표하고, 자신을 억류해달라는 뜻을 내비쳤다는 것이다.

사진/ 16대 국회는 날치기 없이 끝날 것인가. 지난 2000년 11월 검찰수뇌부 탄핵소추안 표결 처리를 앞두고 당시 이만섭 국회의장이 민주당 의원들에 붙들려 있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박 의장이 정말 의장 공관에 억류되기를 원했을까?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31일 공관에 갇힌 박 의장 표정은 아주 밝았다. 등원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지도 않았다. 자신을 둘러싸고 한나라당 구출조와 민주당 저지조가 승강이를 벌이자 “공관에서 봉쇄하는 것은 국민 보기에도 모양새가 안 좋으니, 일단 국회 의장실까지는 가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의장실까지는 가셔야 한다”며 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안 가는 게 아니다. 말뜻을 잘 모르는 사람들(민주당 의원)에게 얘기하라”고 답변했다. 억류조 사령탑인 정균환 민주당 총무의 생일을 맞아 의원들과 함께 축가를 부르기도 했다.

대의명분 지키고 한나라당에 성의 보여

“박 의장은 법무장관 해임건의안을 강행처리할 뜻이 전혀 없어 보였다. 노회한 그는 이미 한나라당 지도부가 역풍을 감수하면서까지 해임안을 밀어붙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구출조로 한남동 공관에 투입된 한나라당 한 초선의원은 표결이 무산된 뒤 이런 평가를 내렸다. 박 의장은 처음부터 민주당 저지선을 돌파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속내와 정치적 의도가 무엇이든 박 의장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먼저 대화와 타협이라는 대의명분을 지켜냈다. 한나라당이 단독 과반수를 확보했지만 “여야 합의 없는 날치기는 불가능하다”는 대원칙을 확립했다. 정치적 실리도 챙겼다. 다수결 원칙 준수를 외치며 한나라당에도 나름대로 성의를 표시한 것이다.

“우리 국회의 고질병인 ‘날치기’가 없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과거 어느 국회보다 큰 성과가 있었다고 자부한다.” 50여일 전인 지난 7월8일, 16대 국회 전반기(2000년 5월31일∼2002년 7월8일)를 책임진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이런 말을 남기고 의장석을 내려왔다. 박관용 의장이 2004년에 이런 퇴임사를 이어갈 수 있을까. 갈 길은 너무 멀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여전히 “해임안을 다시 내겠다”고 공언한다. 12월 대선전도 여야 충돌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박 의장은 묘수풀이로 이제 겨우 첫 관문을 넘어섰을 뿐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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