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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헤드쿼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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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9-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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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문희상 의원이 말하는 현 정국위기의 원인과 해법

최근 시국에 관한 위기의식은 여권 내부에도 고조된 상태다. <한겨레21>은 9월21일 민주당 문희상 의원을 만나 위기의 원인과 해법을 물었다. 문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의 야당 시절부터 비서를 지낸 동교동계 인사이지만, 그 중에서도 기획력을 인정받은 편에 속한다. 현 정권 첫 정무수석과 국가정보원 기조실장 등을 지냈다.

-지금의 시국을 어떻게 진단하나.

=주가가 폭락하는데다 야당이 뛰쳐나가 아우성치는데도 집권여당은 속수무책이다. 위기를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국가의 아이덴티티가 흔들리는 본질적인 위기는 아니며 대통령이나 정부, 집권여당이 힘을 합치면 극복할 수 있는 위기라고 본다.

-97년 노동법, 한보 사태 당시 김영삼 정권의 위기와 비슷하다는 견해도 있다.


=비슷한 측면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개혁주체세력 측면에서 당시 민주계는 완전히 분열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쪽은 예를 들어 한화갑 최고위원이 대권에 도전하겠다 해도 대통령이 한마디 하면 즉시 중단한다.

-그렇다면 최근의 위기는 왜 왔나.

=문제는 내치에 있다. 마스터플랜은 하자가 없는데 프로그램에서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 문민정부는 초기에 사정으로 인적 청산을 효과적으로 했다. 현 정부는 민주인권국가라는 장기 비전을 중시해 기성 언론에 대한 것도 못했고…. 이후의 문제는 너무 잘 알지 않나. 세풍이니 총풍이니 하나도 못했다. 기득권세력과 한꺼번에 다 같이 가려고 과욕을 부렸다. 청산작업을 소홀히 했다. 게다가 부패방지법, 인권법 등 사회적 비용이 덜 드는 과제도 쭈뼛쭈뼛 천천히 갔다. 10년이나 20년 뒤에 빛날 일들, 즉 국민연금, 기초생활보장제, 의보통합, 의약분업 등 사회개혁적 과제에 초장부터 너무 공을 들이다보니 사회적 비용이 너무 많이 발생해 지금 발목이 잡혔다.

-각론으로 들어가자. 의약분업이 이렇게 뒤얽힌 이유는 뭔가.

=의약분업은 누가 해도 언제고 해야 한다. 그런데 개혁 우선순위에서 이것을 좀 늦춰 충분한 준비를 거쳐야 했다. 그래도 국민이 성숙해서 10년, 20년 뒤 이 제도로 덕을 본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전에 그러한 공감대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시기선택을 잘못한 원인은.

=국정 시스템의 문제다. 통일외교의 경우 초반부터 국가안보회의 상임위원회를 활성화해 관계장관들이 매달 두번씩 정례회의를 했다. 그 결과 일관성 있게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의약분업은 (시스템에 의한 검토없이) 주무 장관이 “염려마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하니까 대통령이 믿고 결단을 내렸다가 붕 뜨는 결과가 됐다.

-당 일각에서 의약분업을 유보하자거나 임의분업으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미봉책이며 인기영합주의다. 개혁적 차원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내린 결론이니 어떻게든 국민과 함께 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박지원 전 장관의 사퇴에도 불구하고 정국이 안정되지 않는다.

=특검제는 미국에서도 이란 콘트라게이트, 즉 레이건 대통령이 관련된 사건에서 효력을 발휘했고 그뒤 무용론이 제기돼 없어졌다. 즉 최고 통치권력의 비위를 파헤칠 때만 필요한 것이다. 박 전 장관 사건은 수사가 안 끝난 상태이고 대통령이 관련됐다는 혐의는 전혀 없으며 야당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단지 외압 여부가 논란인데 그런 것 갖고 특검제를 하면 앞으로 모든 사안을 다 특검제 해야 한다.

-박 전 장관 사건이 국민들에게는 현 집권세력의 도덕성 문제로 비쳐지고 있다. 현 정권의 실세들은 도덕성 문제에 자신있나.

=한광옥 실장이나 권노갑 최고위원 등 거론되는 사람들이 돈 한푼도 없이 정치한다고는 말 못하지만 이번 사건과 관련해 돈을 받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 한보사건 때 민주계 인사들은 도덕성에서 타격을 많이 받았다.

=대통령의 측근세력은 기본적으로 더 높은 도덕적 책무가 있다. 우리가 그들보다 훨씬은 몰라도 상대적으로는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처럼 체계적 조직적으로 뜯어먹지는 않고 있다.

-체계적, 조직적은 아니더라도 개별적으로는 뭔가 있나.

=정치자금법에 따른 모금을 비롯해 건전한 상식을 넘는 행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경제 구조조정이 구호로 많이 외친 것에 비해 덜 철저히 이뤄졌다.

=최선을 다했는데 그렇게밖에 안 됐다고 본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공공부문도 많이 개혁하려 했고 실적도 있지 않나. 대통령이 일관되게 4대 개혁을 외치면서 이끌어왔기 때문에 그만큼이라도 된 것이며, 구조조정이라는 문제점도 도출된 것이다. IMF 전에는 막연한 낙관주의였지만 지금은 인식이 다르다. 지금은 감사원감사 등 모든 체크 기능이 작동되고 있는데 이것은 가능성을 시사한다. 병이 뭔지 모르는 게 문제이지 병을 안다면 해결방법만 남은 거다. 오히려 내년 2월까지 4대 개혁을 마치겠다고 목표를 세우는 게 경제 마인드로 볼 때 맞는 것인지, 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목표를 정해놓고 막 몰아붙일 때 부작용은 없을지 우려된다.

-김 대통령이 임기 중반을 넘기면서 업적에 대한 초조감을 느끼는 건 아닌가.

=치적에 대한 욕심은 버린 지 오래라고 본다. 다만 개혁피로증후군이 닥쳐서 개혁 마무리를 못하나 라는 걱정 때문에 4대 개혁만이라도 마무리지으려는 생각으로 시한을 정했을 것이다.

-윤철상 의원 사건을 두고도 야당은 특검제를 주장한다.

=윤 의원 사건은 실언일 뿐이다. 특검제는 말이 안 된다. 어떻게 집권당 사무부총장이 검찰권 행사에 관여할 수 있겠나. 국민들은 오히려 그런 힘을 못 가진 여당을 두고 이게 무슨 여당이냐라고 보기도 한다.

-실언이라지만 야당은 확실히 안 믿어주겠다는 거고, 국민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야당이 제일 먼저 부정선거 시비를 꺼냈다가 턱도 없다는 것이 드러나니까 꽁무니를 내리지 않았나. 다른 더 재미있는 쟁점들이 나오니까. 박 전 장관 사건도 그런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이회창 총재의 대권전략에서 나오는 정략적 공세일 뿐이다.

-국회법 날치기 문제도 있다.

=민주당과 자민련 의원들이 도장 찍어낸 안을 상임위에 상정하는 과정에서 폭력으로 방해받은 게 사건의 본질이다.

-정당하니까 계속 밀고나가겠다는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고나가기는 어려우니 운영위에서 다시 논의하자는 입장 아니냐.

-근본적으로는 자민련 때문에 생긴 문제인데, 자민련과의 관계를 재검토할 수는 없나.

=어려운 문제다. 야당이 당리당략을 버리고 국익 우선으로 성숙한 의회상을 정립하고 상생하는 정치를 하겠다면 (자민련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이다. 정치는 항상 현실이다. 표는 자민련이 열몇표라도 확실하다. 이상이 좋다는 것을 누가 모르나. 그러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논쟁은 끝이 없고 답이 없다. 그래서 현실을 택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 안에서 당직개편 등 당쇄신론과 현상유지론이 맞서고 있다.

=당은 늘 쇄신해야 한다. 지금은 더구나 집권 2기를 시작하며 전당대회를 치른 마당이니 당연히 쇄신해야 한다. 그러나 전략전술 차원에선 당 3역, 10역을 전면적으로 갈면 대야 관계에서 문제점이 생긴다. 야당이 “저놈들이 꽁지 내리는구나”라고 승승장구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분위기가 성숙되면 자연스럽게 당직개편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밀리면 안 된다는 야당과의 게임의 논리에만 빠지다보면 국민들의 마음이 떠나는 수가 있다.

=전쟁중에 말을 갈아탈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전쟁중이다. 대통령은 본질적으로 더 큰 구상, 정치개혁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기회에 정치개혁이라는 화두를 던져 국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집권 2기에도 국회에 발목잡혀 아무 일도 못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정치개혁이라면 정치관계법 손질인가.

=그 모든 것을 포함한다. 정치개혁의 본질은 국회 운영상의 개혁이다. 그 밖에 또 있겠지.

-뭐가 또 있을지 궁금하다.

=방송의 날 3사 회견을 보면서 대통령한테 정치개혁 프로그램이 있지 않나 하는 감을 받았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가 한꺼번에 터지는데 수습이 잘 안 된다. 정권 차원의 위기관리 진용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공자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보와 경제 이상으로 믿음이라고 했다. 지금 모든 문제는 불신에서 시작한다. 불신을 씻고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환골탈태하는 기분으로 감동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 방안의 하나로 나는 민주당의 당 10역을 최고위원들이 다 맡자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권노갑 연수원장, 김중권 정책위의장, 한화갑 사무총장, 정동영 대변인 식으로, 정권교체 당시 문지기라도 하겠다는 심정으로 나서면 국민이 신임하지 않겠나.

-청와대와 당이 동교동 일색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율곡이 군주의 형태를 창업형, 수성형, 경장형으로 갈파했다. 창업형은 아주 친한 측근을 기용하며, 수성할 때는 측근을 물리치고 테크노크래트를 써야 하고, 경장할 때는 측근을 중심에 쓰고 테크노크래트를 부차적으로 써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정부는 순서를 바꿨다. 초창기에 측근을 내쳤다. 측근들이 주도했으면 문제가 다른데 그들은 주도하지 못하고 조연이었다.

-초기에는 김중권 실장 주도이고 측근들은 조연임이 맞다. 그러나 지금은 측근이 주연 아니냐. 그러면서 관리 능력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시스템 부재는 국민의 정부의 일관된 문제다. 헤드쿼터가 없다. 대통령은 5천년 역사에 없는 지도자이지만 밑의 시스템은 안 되고 있다. 그래서 안 되는 지도 모르겠다. 시스템의 문제이지 동교동이 해서 문제가 아니다. 동교동만으로 시스템을 하는 것도 곤란하지만 어쨌든 마스터플랜과 프로그램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착착 진행할 시스템이 절실히 필요하다.

-시스템이 작동되려면 개별적인 심부름꾼들이 아닌, 참모장도 필요한데 지금의 대통령은 용인술에 있어서 그런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 점은 나는 이야기할 수 없다.

박창식 기자cspcsp@hani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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