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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몽준 신당, 안개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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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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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 배제’ 집착하며 모호한 행보… 비책으로 내세운 원내정당도 지지부진

사진/ 지난 8월21일 국회의원 회관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 참석한 정몽준 의원. 그의 신당창당 행보가 지지부진하다.
대선출마를 기정사실화한 정몽준 의원(무소속)의 신당창당 행보가 순탄해보이지 않는다. 그는 출마선언에 이어 곧바로 신당의 얼개를 띄워 ‘정계개편’의 중심에 서겠다는 의중을 자주 드러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지 못한 곳에서 삐걱하더니, 이제는 여기저기서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잇따른다.

정 의원은 요즘 현실 돌파 비책으로 ‘원내정당’을 내걸었다. 하지만 추진하고 있는 ‘원내정당’의 개념 자체가 아직 생소하다. 정치권으로부터 우리 정치현실을 도외시한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원내정당론’의 진정한 의도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에서도 한때 그러한 정당개혁론이 제기된 적이 있다. 16대 국회에서 쇄신파동을 겪을 때마다 각당의 개혁파 의원들은 “정당개혁 완결을 위해서는 중앙당을 폐지해야 한다”며 ‘원내정당론’을 들고나왔다. 그러나 대선을 위해서는 전국 지구당을 반드시 활용해야 한다는 현실론에 밀려 번번이 좌초된 바 있다.

이를 잘 아는 정 의원이 최근 간담회나 동료 정치인들을 만날 때마다 “정당개혁을 위해서는 여야 의원들이 탈당해 원내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까닭은 뭘까. 그의 지론은 중앙당이 국회를 통제해서는 안 되며,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의원들이 국회에서 자율적으로 활동하고 정부로부터 국고보조금도 직접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 등 비중 있는 정치행사를 위해 일시적으로 중앙당 기능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조직과 홍보, 정책 등을 뺀 나머지는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원내정당을 실시하는 미국에도 지구당이 있는 만큼, 국내 정치현실을 고려해 지구당을 전면 폐지하자는 뜻은 아니라고 말한다.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한발 뺀 셈이다.

정 의원의 이런 구상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정치권에는 부정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그를 잘 아는 한 전직 의원은 “정 의원의 구상이 다소 빠른 것 같다. 지역구 공천에 목숨을 걸고 있는 정치인들의 생리와는 괴리가 있다. 그에게 우호적인 의원들도 다소 생소해하는 게 사실이다”고 말했다.

그가 대선주자로 급부상하면서 갑자기 ‘원내정당론’을 들고나온 데 대해 의구심이 가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정 의원이 최소 비용으로 대선을 치르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대선을 치르려면 제대로 된 정당조직을 갖춰야 한다. 천문학적 창당 비용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문제를 ‘원내정당론’이라는 카드로 쉽게 해결하려는 뜻이 아니냐는 것이다.

한국 정치는 지금까지 대선국면을 앞두고 늘 양당 구도에 포섭되지 않는 제3세력의 등장을 경험했다. 하지만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이런 전례에 비춰볼 때도 정 의원의 원내정당 구상이 국내에서 뿌리내릴 가능성은 아직 희박하다는 해석도 있다. 각 정당들은 대선을 앞두고는 원내정당 구현 등 정당개혁보다는 표몰이를 위한 세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후발주자인 정 의원도 결국 ‘대세’를 따르지 않겠느냐는 관측이다.

정 의원은 아직까지 원내정당 구상에 최대한 심혈을 기울인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그가 여러 정파의 대선주자들 가운데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대표를 가장 먼저 만난 것도 그런 속내가 숨어 있다. ‘정당개혁’에 공감하는 두 사람이 함께 신당창당의 깃발을 들어 세규합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박 대표도 정당개혁과 정치개혁을 위해 국민의 지지를 받는 신당이 창당되면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하지만 8월22일 만남은 아무 결실이 없었다. 핵심인 ‘국민경선’에서 이견이 드러난 때문이다. 정 의원 구상은 첫 단계부터 틀어졌다. 정 의원은 비교적 세가 약한 ‘벤처정당’의 박근혜 대표를 끌어들여 여러 정파와 협상에서 ‘입지’를 과시하려 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사진/ 축구협회 행사에 참석한 정몽준 의원. 그는 민주당내 반 노무현 진영인 박상천 의원과 신당창당 논의를 했지만 혼선을 부추켰다.
정 의원이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민주당 안의 이른바 ‘반노무현 진영’과의 신당창당 논의도 한풀 꺾였다. 8월19일 박상천 최고위원을 만났다가 혼선만 부추긴 채 두 사람 모두 정치적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쪽의 조직적 반발기류가 감지되는 등 역풍 가능성도 있다. 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던 일부 중진들조차 “의원 113명이 무소속 정 의원 1명에게 휘둘렸다”며 노골적으로 정 의원을 비판했다. 이런 틈새 속에서 일부 ‘비노무현 진영’ 의원들은 노무현 대통령 후보 중심체제로 당을 하루빨리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급기야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정 의원이 없다고 (신)당이 안 되는 게 아니다”며 가시 돋친 비난을 퍼붓기에 이르렀다.

정치권에서는 ‘원내정당 구현’이라는 ‘정몽준 신당’ 전술이 이미 한계에 부닥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박상천 민주당 최고위원과의 ‘합의번복 소동’에 이어, 박근혜 의원과의 회동조차 별 소득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정 의원이 자칫 ‘게도 잃고 구럭도 잃는’ 최악의 처지에 몰리는 게 아니냐는 섣부른 분석까지 제기한다.

그의 신당창당 행보가 지지부진한 원인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그를 만나본 정치권 인사들은 대체로 정 의원이 듣기에 따라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애매모호한 화법’을 구사하는 것을 문제로 지적한다. 만나봐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정 의원은 아직 대선출마를 선언하지 않은 ‘예비주자’여서 ‘딱 부러진 화법’을 쓸 처지가 못 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정치인치고는 해명이 구차해보인다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

정 의원도 지난 22일 간담회에서 신당창당과 관련해 “정치인과 비정치인들을 많이 만났으나, 내 뜻에 공감하는 인사들은 많지 않다. 아직까지는 ‘단기필마’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이런 지적을 어느 정도 인정한 셈이다. 그는 최근 자신이 구상하는 신당에는 능동적이고 다양한 추동력을 지닌 인사들이 모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단 ‘홀로신당’ 창당은 포기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상태다. 게다가 ‘반부패 국민통합 신당’, ‘원내정당 구현’, ‘지역색깔에 얽매이지 않는 혁명적 정당’을 주창한다. 여론 지지도만큼이나 ‘참신한 마스트플랜’을 구축한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당분간 단기필마로 갈 듯

그러나 정 의원은 모든 신당논의의 전제조건으로 ‘국민경선 배제’를 밑바닥에 깔고 출발했다. 정가 일각에서는 신당논의 자체가 벽에 부딪힌 주된 원인을 정 의원이 전제조건에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민주당처럼) 경선 후유증이 있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라며 ‘직접민주주의’의 폐해를 줄곧 주장한다. 이는 우회적으로 자신을 ‘합의추대’해야만 모든 협상에 임할 수 있다는 태도로 해석될 소지가 높다. 이 때문에 정치권은 정치개혁을 요구한 정 의원이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배척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 전직 국회의원은 “재벌기업에서 성장한 ‘황제주의적 행태’가 몸에 밴 탓이다. 지금이 어느 땐데 정치판에서 ‘밥상 차려주기’만을 바라는지 의심스럽다”고 비난했다.

민주당은 8월26일부터 신당추진위원회를 본격 가동해 신당의 윤곽을 확정하겠다고 한다. 민주당은 정 의원의 동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 의원이 합의추대를 고집하는 상태에서는 논의가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지금 추세대로 정 의원이 신당추진 행보를 지속한다면, 자신의 말마따나 9월 초 대선출마를 선언해도 별로 달라질 게 없다. 당분간 ‘단기필마’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익림 기자/ 한겨레 정치부 choi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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